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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알든 모르든 부르심받은 데서 제 사명을 다하는 자가 가장 경제적인 인생을 산다. 대중이 이리저리 좋다고 하는 데로 쏠려다니는 건 아직 자기 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내 힘이 점점 빠지고 삶이 단순해지기 시작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증거다.
주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며 내 마음에 기쁨이 없다면 내게나 사람에게 유익한 종이 되어가는 중이다. 주 앞에 무익한 종이 되어야 하는데 유익한 종이 되려고 애쓰는 증거다. 무익하면 주님만 내세운다. 유익하면 나를 내세운다. 끝까지 무익해야 진짜 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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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형식적, 율법적인 수행의 종교가 아니라 생명력 넘치는 관계의 종교다. 주께 대한 진실한 믿음의 고백이 결정적인 출발점이 되는 이유는 그때부터 생명력을 공급받는 관계가 시작되어서다. 그 관계 안에서 이뤄지는 순종과 행함이기에 내 공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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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의 뜻을 다 몰라도 하나님은 다 아신다. 나는 퍼즐 한 조각만 볼 때 하나님은 전체를 꿰맞추고 계신다. 그러나 기뻐할 수 없을 때 기뻐하고 의탁하기 싫을 때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면 나도 주님처럼 퍼즐 전체를 보며 하루하루를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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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우리가 위험(죄)으로부터 어떻게 구출되었는지에 대한 메시지이다." 팀 켈러의 말이다. 그 메시지를 듣고 반응하는 사람에게만 복음은 복음이다. 복음이 기쁜 소식인 줄 모르면 기쁜 소식이 아니다. 죄와 심판을 아는 자리에서만 복음이 내게 들린다.
7
바울신학의 핵심이 칭의보다 하나님나라에 있다고 보는 관점은 설득력이 있다. 성화를 칭의의 다음 단계로 나누기보다 칭의와 성화를 하나로 이어갈 때 하나님나라도 신자의 삶을 통해 계속 확장되어간다. 구원은 그 전체 여정에서 주와 끝까지 동행하는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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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사 44:24). 창조주 신의 음성이 녹취된 오디오가 있다면 어떨까. 정말 어딘가에 있다면 그 매체의 희귀성은 특종감이다. 지금은 그 희한한 오디오북이 너무 흔해져서 아무나 못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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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못 믿어 기적적인 존재인 하나님을 못 믿겠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정자와 난자가 만나 뼈와 치아, 머리카락과 눈과 손발과 혈액과 온갖 정교한 장기들이 빚어지는 건 기적이 아닐까. 나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기적적이라는 걸 모르면 신도 못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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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은 특정한 실체가 아니다. 돌발성, 비일관성을 뜻하는 어떤 개념이다. 그런 비인격적인 개념이 인격을 가진 게 분명한 나와 같은 사람을 만들 수 있을까. 무신론적 자연주의자가 되려면 먼저 인격을 깨끗이 비워야 한다. 안 그러면 인격에 대한 모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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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순간 질서있게 존재하며 운행되는 우주와 지구와 만물을 우연이 창조하지 않았다면 누가 창조했을까. 사람은 피조물인 게 관찰되니 안 만들어진 절대자 신밖에 없다. 어쨌거나 인류의 절반 이상이 창조주 신이라 믿는 성경 속의 그 신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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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아닌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신 말고 제3의 존재는 더 없다. 또 그 신은 진짜든 가짜든 전능하고 인격적이며 역사적인 존재여야 한다. 그리스 신화 속의 신이나 태양신은 다 자격 미달이다. 한 민족의 실제 역사 속에 말씀으로 함께한 신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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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이 우연히 생겼을 거라 믿는 게 비합리적이라 느끼면서도 인격적인 신의 창조 또한 무시하는 이들이 많다. 중간에 제3의 가능성은 전혀 없는데도 본성적인 게으름에 굴복한 자들은 최후 심판대에서 창조주이시기에 심판자가 되실 분 앞에 아무런 변명거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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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관에서 힌두교는 범신론적 다신교, 불교는 무신론, 유교는 불가지론이다. 3억의 인도 신, 8백만의 일본 신은 또 너무 많다. 어디서 창조의 신을 만날까. 정교한 창조세계를 보면 그는 종교에만 갇혀 있지 않은 아주 일상적이고도 합리적인 존재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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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만물이 서로 충돌 없이 질서정연하게 창조되고 유지되려면 비슷한 권세를 가진 신들이 많을수록 불리하다. 세계에서 최초로 유일신 사상을 전파한 한 민족에게서 유래한 세계 최대의 유일신 종교. 이런 분명한 약도도 그럴 만하게 의도된 창조세계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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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엘바하는 신이 인간을 만든 게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스 신화 속의 신이나 태양신부터 바다신, 서낭당신까지만 보면 그럴 만하다. 그러나 진짜 신이 꼭 한 존재 있기에 가짜 신들이 사칭하며 돌아다닌다. 가짜들의 존재 근거는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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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슥 8:17). 행동 이전에 마음이 이웃을 원망하고 적대시해도 하나님은 싫어하신다. 하나님이 미워하셔도 내가 좋아하면 서슴지 않고 하는 게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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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전 12:12). 출판과 공부를 금하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만큼 더 경건해지는 열매 없이는 공부도 헛되다는 의미다. 공부할 거리만 더 많아지는 공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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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구원받는다면서 왜 또 순종과 행함의 열매를 요구하냐는 이들이 많다. 믿음은 특정 사실에 대한 단순한 지적 동의나 고백만이 아니다. 그것만의 믿음은 처음부터 없었다. 죄사함의 복음을 정말 믿는 자는 죄를 극히 미워하는 것까지 믿음이란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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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할수록 하나님과 더 오래 같이 있고픈 마음이 들면 좋은 기도다. 기도는 천국에서나 온전해질 그 애틋한 마음을 여기서 잠깐 미리 맛보는 것이다. 기도할수록 일상에서 주의 임재와 동행을 더 많이 누린다면 일의 기도가 아닌 마음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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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도 욕심을 내는 이들이 있다. 기도는 잘 해야 하는 무슨 경쟁 도구도 아니고 나를 잘 모르는 하나님께 애써 나를 알리는 도구도 아니다. 기도는 내가 주 앞에 꾸밈없이 내가 되는 일이다. 내 죄와 염려와 아픔을 있는 그대로 죄다 보여드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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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주님만을 증거하고 싶어요. 주님만을 자랑하고 싶어요. 다른 소원은 없습니다." 이 고백이 내 마음에 숨은 모든 이기적인 동기를 다 솎아내진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기도의 고백을 사용하신다. 그분이 사용하시기에 나는 나를 넘어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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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몸에 남자의 씨와 아기의 생명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한 본체에 세 인격을 뜻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드러낸다." 라비 재커라이어스의 말이다. 창조자를 추방한 진화론은 결코 이런 창조와 창조주의 신비를 담아내지 못하고 흉내조차 못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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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창조는 창세기 1장에만 있지 않다. 이후 안식일 계명을 주실 때도 거듭 언급된다.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출 31:17). 앞의 엿새가 여섯 시대가 아니기에 일곱째 날도 그저 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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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원숭이로부터 창조되는 데 한 시대의 긴 시간이 필요했다면 현재 10개월의 잉태기만 거쳐 태어나는 아기들은 어떻게 된 걸까.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는 명령은 처음부터 완성된 생물체에만 적용된다. 처음부터 창조는 창조고 진화는 진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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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고도의 지성적 설계로 완벽하게 고안되지 않았다면 엄마의 섬세한 자궁이나 아기의 태는 수천억 년이 지나도 절대 생성 불가다. 무생물에서 저절로 진화되어오던 인간이 언제 엄마 뱃속으로 껑충 뛰어들어간 걸까. 진화론은 생각보다 딜레마가 꽤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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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비싼 걸 왜 서점에서 새 걸로 사?" 세계적인 무슨 상을 받았다는 소설을 하나 사서 소설 좋아하는 아내에게 선물했더니 의외의 반응에 풀이 죽었다. 안 그래도 동네 도서관에 대관 신청을 해뒀다나. 난 아내의 심쿵을 기대하며 선물했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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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진화론자들에게 인간은 진화의 한 단계인 유인원에게 인간의 요소가 가미된 존재다. 신은 그 진화 과정에 창조적으로 참여하셨고, 아담은 처음부터 신의 형상으로 지어지기보다 진화 과정의 한 산물이다. 자유주의가 과학을 명의로 교회에 위장전입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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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같은 유인원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을 생령으로 만드셨다는 유신진화론자들의 주장은 첫사람 아담을 흙으로 지으셨다는 성경의 명백한 기록을 신화로 만든다. 흙으로 지어져 흙으로 돌아가게 하셨다는 사실에 담긴 심오한 신학적 진리도 속된 우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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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사람과 짐승, 새, 물고기의 육체가 다 다르다고 증언한다(고전 15:39).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 생물들을 종류대로 완벽하게 창조하셔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셔서 사람을 만드시는 데 진화론이 가정하는 긴 시간을 필요로 하시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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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으로 체험한 적이 없는 이들은 학문적으로만 보는 데 익숙하다. 유신진화론은 창세기를 사실의 기록으로 보기보다 창조에 대한 신화적, 상징적 선포쯤으로 격하시킨다. 그러나 거듭난 자에게 성령은 성경을 사실로만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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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창조를 언명하는 창세기는 역사성의 본질상 단순히 신학적 진리만을 전달하려는 상징적인 비유이거나 신화일 수 없다. 과학적인 서술보다 당대의 고대문화에 맞게 이야기의 방식을 택했을 뿐 창조의 구체적인 사건을 사실로 보도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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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의 6일 창조설은 과학계에서 비웃음의 대상이라는 데 자존심이 상한 기독교인 과학자들이 많은가 보다. 자기 분야에서 인정받으려는 그들의 은밀한 생존 동기가 창조의 진리를 뒤엎고 있다. 전문가라는 지위를 이용해 순진한 교회를 비진리로 유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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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진화론자들은 교회가 하나님께서 창조의 과정에 진화의 방법을 사용하셨다고 말하면 과학주의에 물든 현대인들을 전도하는 데 유용하다고 주장한다. 한때 나도 그 의도에 찬성했지만 지금은 반대한다. 하나를 얻는 대신 둘 또는 전부를 내주는 이적행위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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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진화론자들은 무신론적 자연주의 진화론자들을 반대하는 듯해도 그들이 주장하는 진화의 방법을 거의 그대로 차용한다. 어쨌든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니 별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성경 기록의 진실성과 사실성을 미심쩍게 만들어 결국 믿음을 흔들고 무너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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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의 창조를 믿는 이들은 앞으로 극단적인 문자주의자나 과학에 완전 무식한 비지성주의자, 근본주의자로 몰릴 분위기다. 진리보다 세상을 더 의식해온 이들은 주춤거리며 세상의 눈치를 볼 것이다. 잘 숨어 있던 우상의 실체가 절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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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진보적 지성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는 유신진화론을 교회가 못 막으면 성경의 권위는 크게 훼손된다. 주류 자연과학계와 창조론의 대화라는 목적이 의미있다 해도 그 작업이 성경의 권위와 창조의 실체를 타협하는 거라면 그 대화로 누가 무슨 유익을 얻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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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99퍼센트의 진리를 말하거나 하나님의 말씀까지 대담하게 인용하지만 1퍼센트의 거짓을 살짝 뒤섞는다. 그 1퍼센트로 전체를 뒤집어 엎어버린다. 그래서 웬만하면 다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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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한 옛날 사람들을 실시간 채팅에 등장시키는 게 요즘 책들이다. 카톡 친구 목록에는 태조부터 세종, 이순신, 장영실에 궁궐의 내시까지 등장한다. 사진과 만화, 카톡으로 역사를 말하는 시대. 역사로서의 복음 또한 요즘 사람들에게 맞는 옷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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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어떻게 사느냐가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를 결정한다." 필립 얀시의 말이다. '이거 끝내고 나서 뭐 해야지' 하는 사람치고 정말 그거 끝내고 뭐 하는 사람 없다. 해야 할 걸 미루면 다른 해야 할 것이 또 생겨서 결국 둘 다 제대로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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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대한 아주 작은 믿음이라도 귀히 여겨야 한다. 그조차 천국에 속한 기적 없이는 가질 수 없었다. 내 믿음의 모양이 작고 보잘것없어도 예수님 없이는 불가능했을 그 믿음 없이는 구원도 없다. 세상의 별난 온갖 것들보다 그 믿음의 권세가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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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할수록 육신이 점점 죽어지는 이가 있고 큰 변화가 없는 이도 있다. 내 영적 상태를 날마다 점검하지 않고 자꾸 내일로 미루면 그러는 만큼 죄가 쌓인다. 진실한 회개 기도가 거룩의 순도를 높인다. 어떤 기도를 하느냐가 성화와 성숙의 열매를 좌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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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 재커라이어스의 내한 강연회에 갔다가 사전에 질문을 제출한 이들이 2630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권위주의 시대를 지나 이제 더 이상 경직된 전통이나 교리로만 눌러둘 수 없는 참해답에 대한 갈망이 피부로 느껴졌다. 변증목회가 필요해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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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들은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피상적으로는 같아보인다." 라비 재커라이어스가 내한 강연에서 인상깊게 전해준 말이다. 각 종교는 선하게 살자는 정도만 비슷할 뿐 구원의 내용과 방법에서 다 다르다. 종교들은 실상을 제대로 모를 때만 고상하게 비슷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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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변증적인 강해설교를 전한다. 본문 중심으로 신자가 신앙생활에 대해, 비신자가 기독교에 대해 던지는 질문들에 답하려 한다. 흥미롭게도 비신자들의 질문을 신자들도 동일하게 갖고 있다. 그 질문들 또한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에 신선한 자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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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면서도 변증적인 설교를 할 수 있다. 말씀의 해석과 적용을 유추해낼 때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는 변증적인 방향을 택하면 된다. 일반적인 강해설교보다 변증적인 강해설교는 그래서 개개인의 삶에 더 절박하게 다가가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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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만 한 스마트폰에 세상이 다 들어 있다. 세상의 소식들, 내가 아는 사람들, 갖가지 일들이 거기서 저마다 내게 말을 걸어오고 활동을 요구한다. 세상과 소통하는 데 이만큼 생산적인 도구가 없다. 그러나 세상에 중독시키는 데도 이만 한 권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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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마 24:11). 이단에만 거짓선지자가 있는 게 아니라 정통에도 많다. 그들은 심판을 경고하지 않고 세상에서 잘 될 거라며 안심시킨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괜히 두려움을 일으키는 존재들로 낙인찍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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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에 가장 두려운 일은 거짓선지자를 따르는 이들이 많다는 건데 그 추종자들이 이단에만 있지 않다. 참된 구원의 도를 모른 채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만 하면 구원받는 줄 아는 이들도 적지 않다. 때로 지극히 정통적으로 보이는 것들에 거짓의 함정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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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전 하나님이 너무 좋아요. 왜 이렇게 좋죠?" 누군가가 이런 기도를 들으면 오그라들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기도를 드릴 때가 좋다. 그럴 때마다 내 몸과 마음 전부를 더더욱 깨끗하게 고이 싸서 주께 올려드리고 싶다. 사랑하면 거룩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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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주님밖에 없어요. 제게 있는 것 다 주님께 드리고 싶은데 제가 가진 것이 없네요." 기도의 언어로는 이런 말도 통한다.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 있어서다. 하나님은 이런 말을 듣고 "야, 말이 안 된다" 하시지 않고 가만히 들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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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보다가 기도제목을 발견하면 스크랩해 골방에 두고 기도한다는 분이 있다. 세인들이 세태를 비판만 할 때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골방으로 가져가는 사람이다. 무엇을 놓고 기도하느냐를 내가 제한하지 않으면 골방의 열매가 열방과 사회 곳곳에서 맺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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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칩 받으면 종기 나고 지옥 간대." "오 마이 갓!" 길 한복판에서 두 여자가 눈앞의 '베리칩 지옥!' 팻말에 대고 던진 말이다. 맥락없이 전해져 기독교가 오해될까 안쓰러웠지만, 그 팻말은 분주한 이생 한복판에서 큰 소리로 내세를 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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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칩은 장차 적그리스도 치하에서 어떤 형태로 변형을 거치든 종내에는 짐승의 표로 쓰일 가능성이 꽤 높다. 생체칩은 현대인의 삶의 전방위 영역에 위치 추적과 신분 확인, 매매활동에 편의성을 극대화하는 시스템들의 총아다. 충분히 의심하고 경계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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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계 13:17). 묵시록은 특성상 상징이 많이 사용되지만 사실도 많다. 지금이 성경이 예견한 마지막때라면 매매용 짐승의 표 시스템의 전 단계는 이미 우리 삶의 곳곳에 일상화되어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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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이식되는 생체칩의 상용화가 장차 666과 전혀 무관할 거라고 못박는 게 겸손하고 지혜로운가, 연관될 가능성이 높으니 예의주시하자는 게 겸손하고 지혜로운가? 더욱이 각 신자의 영원한 영적 생명이 좌우될 우상숭배와 연관된다면 어느 쪽이 더 안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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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보수 교단들이 짐승의 표를 상징화시키는 데 급급한 이유가 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믿어서다. 인간이 만든 물질이 영적인 구원을 좌우할 수 있느냐는 논리다. 역시 일관되게 성경 기록(계 14:11)보다 자신들의 신학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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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단순히 짐승의 표를 받는 자가 영원히 지옥에 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짐승에게 경배하고 표를 받는 자가 구원을 잃는다고 말한다. 영적인 경배가 먼저다. 지금도 영적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자들이 물질로나 행위로도 주님을 부인하며 사는 것과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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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짐승의 표로 예견되는 어떤 표식도 거기에 영적 경배가 먼저 강제되지 않으면 효력이 없다. 물론 지금이라도 신자들은 그런 표식을 몸에 받을 이유가 없다. 신자의 몸은 성령의 전이다. 노예처럼 뭔가에 매이는 표식은 주 예수의 흔적 말고는 불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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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천년설자들은 마지막때에 전 세계에서 실제 역사로 진행될 중대한 예언적 사건들을 자기 신학으로 다 날려버렸다. 주께서 교회가 꼭 알아야 복을 누린다고 하신 일들에 대해 그들은 성도들의 눈을 가리고 입을 막아버린다. 신학에 잘못 안주하면 진리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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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복음주의자들도 보수주의자들 못지않게 바리새적이다. 자신들이 굳게 붙잡은 노선을 우선하느라 종말이나 내세처럼 성경이 분명히 강조하는 사안들을 의도적으로 도외시한다. 그들을 따르는 이들도 한 곳만 보고 가는데, 가히 '선택적 태만'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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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이성주의는 기독교를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사안들만을 다루는 종교로 전락시킨다. 역사성이야말로 타종교와 다른 기독교만의 절대성인데도 미련없이 기독교를 약자를 위한 윤리 도덕적, 정치적 종교로만 제한시키려 든다. 그들에게 재림은 얼마나 생뚱맞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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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에 성경에 해박한 바리새인과 당대의 내로라하는 제도권 종교인들은 예수님의 초림을 몰라봤다. 이제는 오늘날의 그들이 그분의 재림을 몰라보진 않을지. 반복되는 역사의 궤를 따라 그때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지금도 딱 그만큼의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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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개척하면서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노선 중 무엇을 택할지를 놓고 망설임이 있었다." 요즘은 개혁주의를 표방하면 사람들이 안 모일 것 같아서라고 한 목회자가 토로했다. 상황보다 각자가 받은 소명과 진리가 더 우선되어야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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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이 소속 정당에서 바른 말을 뒤로 돌리는 건 나중에 한 자리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기독교계에서도 멀리까지 자기 자리에 연연해 하는 사람은 어린아이 같은 진리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의 자리에는 연연해 하지 않는다. 어디서나 정치가 무섭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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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기독교 이성주의자들은 지식을 깊이있게 획득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거기까진 좋은데 그 후유증으로 의미있는 체험이나 풍부한 감성의 가치에 미맹이 된다. 성경은 지성, 감정, 의지라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두루 가득 차 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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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죄의 실상을 들여다보고 깊이 뉘우쳐본 이들은 믿은 이후 죄를 경계하는 삶을 산다. 그 전까지 많은 시간을 방황하며 보냈을지라도 올바른 회개를 경험한 이들은 그만큼 시간을 번다. 거룩과 무관한 가짜 회심은 빨리 적발해낼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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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땅에서 작아보이는 일들이 천국에선 아주 크고 화려할지 모른다. 이땅에서 크고 화려해보이는 일들이 천국에선 아주 작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땅에서 복음과 한 영혼을 위해 한없이 죽어지고 낮아지는 것은 사람의 칭찬을 듣는 모든 일들보다 확실히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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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며 돌아보니 내게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이 많이 부족하다. 영혼들을 이용하려는 마음이 더 크다. 주님을 사랑하기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탓이다. 주님이 내 주인이 되시는 만큼 나를 버릴 수 있다. 그때만 나보다 다른 한 영혼을 더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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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사자가 새끼사자를 나무라는 듯한 사진이 눈에 띈다. 애 앞에서 너무 헤프게 위엄을 부리는 듯한 아빠의 입도 재미있지만 새끼의 표정이 가관이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데 이건 갑을관계도 아닌 것이 좀 애매하다. 위엄도 상대에 맞게 부려야 제멋인데...
71
목회는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가장 우선적이다. 거기에 설교도 있고 큐티도 있고, 소그룹 나눔과 친교도 있다. 봉사와 전도, 선교는 이 말씀이 중심축을 이루는 가운데 진행되어야 한다. 성경을 골고루 체계적으로 알아갈 때 삶과 사역 또한 균형을 잡는다.
72
설교의 기본은 선택한 본문의 본래 의도와 함께 다른 성경과의 연관성을 이해하고, 그것이 성도 각자의 삶에는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에서 성도들은 많은 걸 얻거나 기억하지 못한다. 먹기 좋게 잘 요리되지 않으면 반찬 없는 맨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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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2). 주의 재림을 사모하는 정도로도 부족하다. 간절히 사모하지 않으면 주 앞에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준비되려는 소원도 약하다. 주님 외에 딴 생각이 많은 것이 성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74
갈급함이 있는 자들을 주님은 외면치 않으신다. 갈급함만으로도 이미 큰 은혜다. 설령 이땅에서 내가 원하는 만큼 주님을 다 못 느껴도 사모하는 심령에 천국에 예비된 보화가 많다. 주님과만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그래서 이땅에선 표나는 보상이 없다.
75
기도할 마음이 안 생기고 감동이 적을 때에도 정해진 시간과 자리를 지켜내는 훈련이 곧 기도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내가 궂을 때나 좋을 때나 늘 그분만을 의지하는가를 보시는 지표와 같다. 기도의 시작을 내 감정으로 막지 않으면 기도에 실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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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보면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서 나를 하나로만 만드셨다. 둘도 아닌 하나인 나를 타인과 비교하면서 둘, 셋, 넷이 되려고 욕심을 낸다. 하나님이 하나이시듯 그분과 통하는 나도 하나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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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아멘, 관세음보살..." 한 재난 보도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세인들은 석가의 불교가 철저한 무신론인 걸 모른다. 석가가 본의 아니게 신격화된 줄은 더더욱 모른다. 당사자의 동의도 없이 하나님과 부처님을 동격으로 두는 게 사람의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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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여행과 미국 생활은 다르다. 삶으로 속속들이 느끼는 집과 거리와 문화는 패키지 여행으로 구경하는 그것과 다르다. 신앙생활도 자칫 구경으로 일관할 수 있다. 일상에서 참예배자의 삶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데 무심하면 신앙도 맛보기 구경까지다.
79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 12:43). 자기 믿음을 드러내어 말하지 못하는 데 대한 주님의 평가다. 진리보다 생존을 우선시하는 게 당연하면 이미 우상숭배다. 우상은 아주 매끄럽고 자연스럽다. 추하다면 누가 섬길까.
80
일상에서 사탄은 신자에게 생각을 넣어주는 걸로 자기 뜻을 내비친다. 생각을 흘러가는 대로 방치하면 내 삶도 그쪽으로 흘러간다. 경건은 생각을 잘 단속하는 것이다. 주의 음성도 내 생각을 통해 전해지는데, 기도와 말씀이 풍성하면 생각의 길이 탄탄해진다.
81
신앙의 길은 정말 천로역정과 같다. 가다가 딴 길로 빠지거나 가다가 말거나 굳은 결심이 사탄의 방해로 금세 허물어지기도 한다. 존 번연은 천국 입성 바로 직전에 지옥으로 빠지는 샛길을 그리기도 했다. 신앙의 길이 쉬운 줄 아는 자들은 마귀의 밥이다.
82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과학은 '왜, 어째서'는 고사하고 '어떻게'조차 대답해줄 수 없다." 라비 재커라이어스의 말이다. 성경이 주는 답이 명백한 만큼 왠지 단순하고 심심하다고 느낀 이들은 슬슬 과학주의를 기웃거린다.
83
세계대전이나 한국, 베트남 전쟁의 영상을 보면 너무도 참혹하다. 전쟁이나 기근, 지진, 전염병이 하나씩 나타나도 참혹한데 마지막 환난에선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창세 이후 전무후무한 환난(마 24:21)을 거듭 경고해도 신자들마저 이생의 잠이 깊다.
84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 성경에 기록된 신자들의 역사도, 교회사도 망각되면 다 무의미하다. 광야생활에서 이스라엘이 불순종한 역사나 교회가 타락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 지금 내 삶에도 되풀이된다. 그 결과를 기억하지 못하면.
85
대체로 현재 신자가 바로잡아야 할 것들 중에 이전에 주님이 여러 번 권고하시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 다 알고도 이런저런 이유로 차일피일 미룬다. 나도 쓸데없이 뻗댄 시간이 많다. 그 시간에 주로 해온 일은 주님이 뭘 싫어하는지 살피는 일이었으니...
86
어린이날을 졸업하는 게 아쉬웠던지 딸이 달고나를 사달라고 졸랐다. 우연찮게 뽑기에 걸려서 월척을 낚았다. 아라뱃길에 동행한 처형들은 화살로 과녘을 맞춘 줄로 오해하고는 신궁 아니냐며 부추긴다. 어린이 딱지를 뗀 딸이 받은 격려치고는 겹으로 괜찮았다.
87
"미래는 현재와 무척 닮았다. 단지 더 길 뿐이다." 누군가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늘이 이러하면 내일도 이러하다. 오늘 심지 않으면서 막연히 내일을 기대하다가 세월만 다 간다. 오늘 하나라도 새롭게 시작하면 내일은 어제의 오늘과 같지 않다.
88
개혁주의자들은 성화 없이 칭의로만 구원받진 못한다면서도 칭의받은 자는 반드시 성화된다고 믿는데, 앞뒤가 안 맞다. 칭의만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걸 돌려 말한 것뿐이다. 칭의받고도 성화에 실패할 수 있어야 칭의만으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89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벧후 1:9). 성경은 열매 맺는 삶을 살지 못하면 죄를 용서받은 구원의 경험조차 잊어버리게 된다고 경고한다. 구원받을 때의 회개만 밑천삼고 삶속에서 회개의 열매가 지속되지 않으면 받았던 은혜도 까먹는다.
90
환난 후 휴거를 주장하더라도 역사적 전천년설은 마지막때의 적그리스도 출현과 큰 환난을 상징화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천년설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다. 그러나 마지막때 역사의 핵심 동력인 이스라엘의 회복을 무시하는 점에선 여전히 불완전한 종말론이다.
91
마지막때의 대환난은 십자가 이후 오랫동안 유예된 한 이레의 야곱의 환난의 때(렘 30:7)다. 유대인들이 성전을 재건하고 거기에 적그리스도를 거짓 메시아로 받아들일 역사는 신구약성경이 확증한다. 성경은 명백한데 인간의 사상이 미세먼지처럼 눈을 가린다.
92
교회는 이스라엘을 대체하지 않았다. 구원받는 이방인의 수가 차면 유대인의 때로 다시 넘어간다(롬 11:25). 대체신학은 이스라엘이 표면적으로 사라진 후 회복될 기미가 없던 때나 그럴싸했다. 이스라엘의 기적적인 회복은 성경의 정확한 역사성을 변증한다.
93
휴거가 환난 전인지 후인지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7년 대환난은 하나님이 교회가 아닌 유대인을 다루시는 때다. 요한계시록 3장까지 일곱 교회시대가 끝나면 교회를 포함한 24장로는 하늘에 있다. 이후 땅에는 교회 대신 유대인과 이방인 성도만 등장한다.
94
세대주의 신학의 주된 약점은 모든 세대의 구원의 통로가 믿음이라는 진리를 무시하고, 율법의 역할을 축소시키며, 미래에 초점을 두면서 현재 이땅에서의 삶을 소홀히 하는 이원론적인 경향이다. 그럼에도 종말론에서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해낸 것은 큰 공로다.
95
어떤 교회의 권사회가 식당에서 목회자와 함께 단체식사를 나누는 자리를 우연히 엿보게 되었다. 목회자는 식기도를 드린 후 줄곧 딱딱한 표정으로 말없이 밥만 먹었다. 권사님들도 어색한지 별 말이 없었다. 목회자의 말은 말을 풀어놓는 마중물인 게 분명하다.
96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벧전 5:8-9). 굳건하게 할 믿음이 없는 비신자는 마귀의 메뉴에 없고 관심사도 아니다. 신자는 마귀를 대적하여 믿음을 지켜야 살아남는다.
97
사람을 위한 중보기도는 한꺼번에 여러 사람을 몰아서 드리기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따로 충분히 드리는 것도 좋다. 중보기도는 한 영혼을 주의 마음으로 깊이 돌아보며 어루만지게 해준다. 기도할 때 말고는 한 영혼에 대한 촉감이 그리 예민해지지 못한다.
98
리처드 도킨스조차 창조와 진화는 양립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가 진화론자들에게 손을 벌리며 창조에 진화를 적당히 학문적으로 뒤섞어보면 어떻겠냐고 구애를 한다. "이러는 걸 보니 너희는 진화를 모르는구나." 이것이 도킨스의 대답이다.
99
유신진화론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깎아내리면서 성경적 신앙을 학문주의의 아래에 두려고 시도하는 듯하다. 지구의 역사가 아주 짧진 않다 해도 그것이 45억년을 기정사실화할 근거는 아니다. 45억년에 먹히면 400만년의 인류 진화 연대도 거부할 근거가 없다.
100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유신진화론자들은 원숭이와 사람의 조상이 같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종류대로 생물을 만드셨다는 창세기의 증언이 무색하다. 친동성애나 친WCC처럼 친유신진화론 역시 서서히 배도의 길목에 들어서는 듯한 느낌이다.
101
인류역사상 동성애가 지금처럼 대로나 광장으로 뛰쳐나와 자신을 당당히 주장한 적이 없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나서 동성결혼 합법화를 추인해준 역사도 없다. 창조질서에 반하는 배도가 인류사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어도 마지막때의 시세를 모르면 여전히 감감하다.
102
자신의 열등감이나 성공한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가 동기가 되어 악착같이 공부하고 성공한 사람들은 끝이 안 좋은 경향이 있다. 자기가 노력한 만큼 세상적인 보상을 바라는 경우가 많아서다. 시작과 동기가 주님이 아니면 끝도, 자신의 유일한 보상도 주님이 아니기 쉽다.
103
밥을 함께 먹으며 식탁에서 나누는 가족의 대화는 정말 너무 사소하고 작은 것들이어서 어쩔 땐 유치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얼마나 진지하게 나누는지 모른다. 밖에서 보면 장관급 회담쯤으로 보일 듯싶다. 친근한 사랑은 그렇게 소소한 것이다.
104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신자를 이끌어 승리해내고야 만다는 개혁주의자들은 공의를 이룬 예수님을 믿고 나면 사랑뿐인 듯 오해케 한다. 그러나 주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은 그대로 살아 있다. 그 인자에 계속 머물지 않으면 신자도 찍히는 바 된다(롬 11:22).
105
신자에게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출애굽의 은혜는 거룩한 삶의 능력을 부여받은 출발점이다. 이후 광야에서는 그 은혜의 능력에 의지하여 각자가 거룩한 신분에 어울리는 거룩한 순종의 삶을 책임있게 살아야 한다. 출발점에서만 맴돌면 가나안땅에 못 들어간다.
106
은혜를 강조하는 자들일수록 "난 못해요"라고 말하는 데 익숙하다. 연약하여 계속 실패하고 넘어지는 삶일수록 은혜에 더 많이 의지하고 그 사랑을 더 크게 누린다는 공식을 신봉한다. 그들에게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라(히 12:4)는 권고는 어명이 아니다.
107
주의 은혜에 자기 공로를 조금이라도 더하려 말라고 엄포를 놓으며 당당히 신자의 책임을 희석시키는 이들은 자기 신학을 말씀보다 더 절대시한다. '주여, 주여' 하는 믿음의 고백만 있으면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삶이 없어도 천국 간다는 신학은 성경에 없다.
108
구약은 물론이고 마태복음과 야고보서, 히브리서,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의 서신들은 행함 있는 믿음이 구원받는 산 신앙에 얼마나 중요한지 곳곳에 거듭 강조한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특정 신학의 전제가 너무 강하면 한 글자도 안 보인다. 정말 단 한 글자도.
109
말씀을 자기 신학에 억지로 꿰맞추려는 이들 중 학자적 양심으로 불편하거나 고민하는 이들은 그나마 희망이 있다. 그러나 끝까지 합리화하며 현재의 자기 기득권을 지키려고 진리를 가리는 데 앞장서는 이들은 주님도 못 말리신다. 그들의 주인은 따로 있어서다.
110
사랑하는 이웃이 내게 한 말들 가운데 상처가 되거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 말들은 다시 점검해봐야 한다. 그 말들을 내 방식으로만 해석하고 말면 오해를 굳혀버린다. 말보다 사람을 더 신뢰하면 때로 그 사람으로 특정한 말을 얼마든 재해석할 여지가 있다.
111
나는 변증을 공부나 연구, 심지어 신학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았다. 내 삶의 지극히 현실적인 방황에서부터 시작했다. 아마도 공부로 시작했다면 재미가 없어 중도에 포기했을지 모른다. 변증은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을 다루지 않으면 금세 사변적으로 전락한다.
112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린 바 되어 드리는 방언기도는 거룩한 삶에 또 다른 차원을 열어준다. 죄악에 노출되기 쉬운 마음이 성령의 보호막으로 부드럽고 강하게 덮여지는 것 같다. 하나님께로부터만 오는 좋은 것들의 각양 혜택은 인간의 최선보다 훨씬 더 낫다.
113
기독교변증은 공부할수록 매력적이다. 사실이 아닌 건 조금 파들어가다가 흥미를 잃는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인간의 삶과 인류 역사의 전모가 있다. 왜 타종교에는 변증이 발달되어 있지 않을까. 사실이나 역사보다 윤리나 철학이어도 큰 상관 없어서는 아닐까.
114
신앙적으로 아무리 칭찬 들을 만한 일을 하고 믿음이 좋아도 그것으로 자기 영광을 구하며 살면 하나님 앞에는 상이 없다. 사람들 사이에 명성이 높은 것도 아무 소용없다. 그들도 그걸 알지만 욕심을 못 버린다. 자신이 원한 대로 받게 되니 이것도 순리다.
115
주님 외에 다른 소망이 따로 있는 이들과는 속 깊이 마음 터놓고 교제하는 일에 무언가 벽이 느껴진다. 그 벽을 애써 모른 체해줘야 하는 부담이 든다. 주님만 사모하는 마음은 그 어떤 업적이나 사상보다 귀하다. 천국에 가면 영원한 가치로 확인될 것이다.
116
참신앙은 자유의지로 시작했다가 마치 자유의지가 없는 사람처럼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의지가 100퍼센트 발휘되는데도 그것이 또한 하나님의 뜻에도 100퍼센트 상응하는 상태다. 천국 가기 전에 거기에 다다를 수 있을까.
117
"복음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는 설교자의 존재 자체가 그를 따르는 이들이 받는 심판이다." 폴 워셔의 말이다. 서로 뜻을 같이하지 않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한 강단에 모여들기란 어렵다. 맹인이 맹인 아닌 자들을 인도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118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이 사회 변화를 위해 섬기는 복음적인 헌신은 칭찬 들을 만하다. 그러나 그들의 비전이 기독교적인 종말이나 재림에 대한 소망과 상관없다면 그들의 기독교는 세상의 엘리트나 착한 사람들이 만들려는 조금 더 나은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119
지옥의 영원성은 지금 시공간 가운데 느끼는 시간의 길이와는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무한대의 시간에 무한대의 고통을 겪는다기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현재의 세계에 내던져지는 그 무엇이다. 지옥멸절론은 인간적인 감수성으로 하나님을 제한하려는 시도다.
120
'아하, 이게 영원이구나!' 사람이 지옥에 떨어지는 즉시 이렇게 느끼지 않을까. 영원이란 시간을 끝까지 다 살아보지 않아도 그 순간 자체가 영원이란 걸 느낄 테니까. 천국의 영원성도 비슷할 것이다. 영원한 기쁨, 영원한 고통은 지금 여기선 힌트뿐이다.
121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사 26:19-20). 죽은 성도의 부활과 환난 전 휴거가 연계되어 있다. 그래서 이 밀실은 단순한 땅의 도피처일 수 없다.
122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은 실제의 두 사람이다.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계 11:4)는 "기름부음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슥 4:11-14)다. 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롬 11:17), 곧 유대인과 이방인 중 한 명씩이다.
123
요한계시록의 재앙들, 곧 피로 변한 물, 우박과 황충, 흑암, 독한 종기의 재앙은 출애굽 당시의 재앙과 흡사하다. 출애굽기의 재앙이 사실이듯 계시록의 재앙도 상징이 아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린다. 신학에 이리저리 꿰맞추는 상징풀이는 이현령비현령이다.
124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벧전 2:1). 같은 말도 의도나 표현방식에 따라 비방이 되거나 말씀 중심의 건실한 비판이 되거나 한다. 비방은 비난 섞인 판단이요 인격을 깎아내리거나 인신공격성 의도가 깔린 비판이다. 비방은 어떤 종류도 금지가 원칙이다.
125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계 7:14). 이 말씀은 환난 후 휴거를 지지하지 않는다. 교회의 공식적 휴거는 구약과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가 대상이다.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에는 그들이 빠졌다. 모든 시대의 교회는 먼저 환난 전에 휴거된다.
126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14만4천 명은 문자 그대로 열두 지파에 속한 유대인들이다. 이들의 전도로 큰 환난에서 구원받는 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수가 구원받은 자의 총수라고 믿는 이들이 계시록 사건들을 기준도 없이 상징화하는 무천년설자들이다.
127
이스라엘 회복이나 환난 전 휴거에 대한 믿음을 세대주의의 전유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이런 섣부른 범주화로 성경적 진리가 타격을 입는다. 전통주의의 우위성을 고수하려는 의도 아래 진리보다 소속 진영을 더 중시하는 낡은 시대의 유물 같은 바리새주의다.
128
세대주의 신학을 안 좋아하지만 세대주의자들이 성경에서 찾아낸 이스라엘의 회복과 환난 전 휴거설은 지지한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을 때 자연스럽게 인정할 수 있어서다. 그들의 신학 역시 여느 신학처럼 한계와 단점이 있지만 바르게 본 건 인정해야 한다.
129
지금 유대인들의 성전 재건과 구약 제사 복원 움직임은 순전히 유대교 복원의 일환이다. 예수님을 통해 모든 제사가 끝난 기독교와는 상관없다. 다만 이 움직임이 적그리스도를 성전에 받아들이는 사건(살후 2:4)과 관련이 있어 의미있게 예의주시하는 것이다.
130
아직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적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잘못 받아들인 후에야(요 5:43)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넘어올 것이다. 이 예언이 아직 성취되지 않아 미래에 반드시 문자적으로 성취될 텐데도 무천년설은 마냥 먼 산만 바라본다.
131
"내 또래 친구들한테 한번 물어봐요. 내 나이에 아빠한테 뽀뽀해주는 사람 있나? 내가 잘해주는 줄 아세요." 사춘기에 접어든 딸의 일장훈시다. 스스로 아빠 생일 선물로 1년 동안 유효한 아침 저녁 뽀뽀 쿠폰을 줘놓고는 자주 내뺀다. 격세지감이랄지...
132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께서 특히 지리에 능통하시다는 걸 느끼게 된다. 특정 지역의 형세와 토양, 기후는 물론이고 거기에 누가 언제부터 어떻게 살고 있는지 훤히 꿰고 계신다. 오랫동안 그 지역만 연구하고 관찰해오신 분 같다. 하나님은 만물 전문가다.
133
주께 내 삶의 귀한 부분들을 특별하게 올려드리면 그 가치를 그분이 아신다. 나는 세밀하게 구분하지 못해도 그분은 다 구분하신다. 내가 삶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걸 나만 아는 줄 알면 오산이다. 하나님은 내가 그걸 스스로 넘겨드릴 때까지 모른 체해주신다.
134
사역자든 성도든 아무리 잘해도 막판에 잘 못하면 앞에 잘한 것이 다 물거품이 된다. 이런 생각을 못하고 앞의 것들을 자기 공로로 여길수록 잘 못하기 쉽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산다고 믿는 이들은 삶의 모든 지점에 축적된 자기 것이 없고 매번 주님뿐이다.
135
예전에 안티기독교인들과 토론해본 경험에 따르면 그들은 학문적으로 여러 복잡한 이론들이 있다는 걸 성경을 반박하는 근거로 삼는다. "이런 걸 너희는 모르지? 그러니까 너희가 믿는 건 가짜고 무시당해도 돼." 그들은 학문의 진리와 학문주의를 구분 못했다.
136
보수 개혁주의자들은 복음이 전해지기 전 시대 사람들은 다 지옥에 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처음부터 선택받지 못해 그런 시대에 태어났다는 전제에서다. 그들의 이중예정 논리로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독재자나 폭군 이미지로 여겨 예수께로 흔쾌히 못 나아온다.
137
하나님을 몰라 세상을 전부로 여기며 살아갈 때 나는 세상의 환경에 이리저리 쏠리는 사람이었다. 날이 추우면 함께 추워하고 바람이 불면 함께 흔들렸다. 여름 지나 가을이 오면 마음도 스산했다. 지금은... 변함없으신 하나님이 내 삶을 꽉 붙잡고 계신다.
138
기도를 중시하는 자들은 말씀묵상을, 말씀묵상을 중시하는 자들은 기도를 소홀히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선한 것이 주께로부터 나온다. 내 안에는 아무것도 선한 것이 없다. 기도만 하거나 말씀묵상만 하면 이 두 가지 진리를 균형있게 두루 다 배우기 어렵다.
139
기도에도 자세가 중요하다. 걷거나 서서 또는 똑바로 앉아서도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무릎꿇고 엎드릴 때 하나님께만 집중하기에 가장 좋은 것 같다. 기도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라면 내 몸도 그 내용에 맞는 그릇인 게 좋다.
140
"시간이 충분하면 무생물도 생물이 되고 식물에서 동물이 나오는 것도 가능하다고 본다." 한 자연과학도가 내게 자신있게 건넨 말이다. 신이 있다는 걸 인정할 바에야 우연을 신으로 삼겠다는 투다. 신과 우연 사이의 제3지대에 인간의 턱없는 자존심이 있다.
141
비신자들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새롭게 환기되는 진실이 있다. '지금 내가 가진 이 하나님 신앙은 기적이구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예수님을 죽도록 사랑하는 이 마음이 이미 기적이구나. 성령님이 내 안에 옮기신 영생의 불씨는 누구도 꺼트릴 수 없구나.'
142
교인들을 아무 교회나 가서 섬기라고 내보내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섬기러 가는 교회가 올바른 교회인가에 대한 점검 없이 그저 작은 교회니까 도와주라는 거라면 위험하다. 교회는 세상단체와 다르다. 생명을 찾으러 온 교인들을 아무 데나 내보낼 수 없다.
143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 않고 요한계시록을 상징으로 해석하면서 신천지 같은 종말론 이단들이 활개칠 토양을 제공했다. 알레고리에 기대지 않고는 설교의 소재로도 안 삼다보니 그 틈새에 이단이 기생한다. 종말론을 제대로 다루길 꺼리면 교인들이 계속 방황한다.
144
자녀를 위해서건 자신을 위해서건 밤에 자기 전에 기도하면 자는 동안 마음이 보호받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자나깨나 하나님이 무조건 보호해주실 것 같은데 실상은 기도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밤기도가 아침기도 또한 지키고 살린다.
145
밤에 심신의 평안을 집의 정중앙에 자리한 TV에서만 찾는다면 적어도 밤에는 그것이 내 삶의 신이다. 일상의 삶에 대중매체를 통한 쉼과 위안이 필요하지만 생각없이 과도하면 생각없이 내 삶이 야금야금 잡아먹힌다. 밤이 어지러운 사람에게 맑은 아침은 없다.
146
누군가의 신앙이 좋다, 안 좋다 하는 걸 사람이 섣불리 판단하긴 어렵다. 다만 그 기준이 무엇일까 돌아보면 그 사람의 삶의 뿌리와 지향점이 어디에 놓여 있나로 판가름난다. 남이 뭐라 하든 그의 삶이 주인 되신 하나님께 매여 있으면 어떻게든 표가 난다.
147
"태초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위치 선정이 좌중국(황사, 미세) 우일본(방사능)이냐." 봄철 미세먼지로 평범한 일상을 빼앗기다시피 한 일상인들의 탄식이다. 평범하게 누리던 파란 하늘, 맑은 공기가 특별해진 요즘이다. 생명도 다할 때쯤엔 그렇지 않을까.
148
기독교변증은 이중적인 공부가 요구된다. 기독교의 내용물은 물론이고 세상의 담론도 이해해야 한다. 전자는 정적인 면이 크지만 후자는 동적이고 영역도 많다. 변증전도의 매력은 그때그때 계속 연구하고 반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세상의 무차별적 공격이다.
149
종말론에서 이스라엘과 교회를 못 나누면 그 자체가 종말적인 재앙이다. 다니엘이 받은 이스라엘을 향한 70이레 490년 역사 중 남은 한 이레가 마지막 환난의 때에 열린다(단 9:24). 그 7년을 지나쳐버리면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의 입구가 안 열린다.
150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요한계시록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하고 시간순으로 보면 읽고 지키기 쉬운 책이다. 이걸 수수께끼처럼 만든 신학이 어려울 뿐이다.
151
"요한계시록은 목사님들이 설교로 잘 전해주시지도 않아 그냥 덮어놔야 할 책으로 알았어요." 외국에서 교회를 방문한 한 성도의 말이다. 문자적으로 해석할 곳과 상징적으로 해석할 곳을 기준도 없이 뒤섞어버리면 요한계시록이 약속한 복은 찾아 누리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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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무능은 덮어줘도 무례는 절대 용납 안 한다." 한 정치인의 인터뷰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정치계만이 아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사람에 대한 예의가 그리스도인에게도 기본이다. 나와 의견이 달라도 타인은 그 자체로 늘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153
교회가 영혼 구원에 관심 갖고 기도하고 마음 모아 섬기면 전도하려던 영혼이 안 돌이켜도 전도할 사람들을 계속 붙여주신다. 한마디로 전혀 예상 못한 엉뚱한 데서 전도가 이뤄진다. 결국 전도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교회는 하나님께 중심을 드리면 된다.
-안환균 목사의 트위터, 페이스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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