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많은 이들이 기도는 하지만 충분한 기도는 안 한다. 하나님과의 진짜 만남은 충분한 기도로 이뤄진다. 찔끔찔끔 드리는 면피용 기도로는 늘상 군불만 지피다 마는 격이다. 사골을 우려내듯 진득하게 앉아 중심으로 기도하면 오래잖아 반드시 하나님을 체험한다.
2
요즘 신자들에게 기도의 야성이 점점 사라져간다. 하나님의 깊은 임재를 경험할 때까지 기다리는 기도를 못 견딘다. 하나님 외에 달리 기다리고 기대하는 것들이 많아서다. 사탄은 성도들이 단순하게 기도하는 건 두려워하지만 복잡하게 고민하는 건 안 두려워한다.
3
하나님께서 기도를 그토록 중시하시는 건 내 마음을 온전히 얻고 싶으셔서다. 기도는 하나님께만 집중하지 않으면 드릴 수 없고 그렇게 진실한 전심을 못 드리면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주된 통로가 기도인 이유는 이 독보적인 메커니즘 때문이다.
4
일상에서 간간이 조금씩 이어지는 기도도 필요하다. 그러나 한 자리에서 집중적으로 드리는 기도에 능력과 은혜가 많다. 한 번은 깊이 뚫려야 기도의 맛이 올라온다. 기도가 기도를 낳고 눈덩이처럼 불어나 기도가 저 홀로 굴러간다. 그것이 살아숨쉬는 기도다.
5
아픈 이웃과 어그러진 세상을 위한 기도에 올인해보라. 중보기도를 주님이 얼마나 기쁘게 여기시는지 맛볼 수 있다. 이기적인 기도에는 기도의 상상력과 감흥이 덜 따라붙는다. 그러나 이타적인 중보기도에는 기도의 줄이 금세 잡히고 기름부음의 감동도 더 크다.
6
기도가 잘 안 된다는 건 하나님과 나 사이가 꽉 막혀 있다는 증거다. 이 소통의 부재를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없다. 기도 외의 다른 것으로 허전함을 채우려는 이들이 많다. 사탄의 노략질을 알면서도 무심코 그를 좇아간다.
7
지성은 중시하나 지성주의는 경계하고 지식은 중시하나 지식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기본을 당연한 듯 턱없이 소홀히하게 만들기 쉬워서다. 꼭 필요한 지성이나 지식보다 늘 좀더 많은 걸 얻으려 욕심내다 다 놓친다.
8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고 싶다. 억울해서든 잘못해서든 하나님이 너무 좋고 고마워서든 하나님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고 싶다. 피조물로서 그보다 더 진실한 모습이 있을까. 기도나 삶에서 눈물이 말라간다면 내가 주인 되어 잘 사는 것이다.
9
말씀묵상 생활을 통해 작은 거 하나라도 하나님 앞에서 지키겠다고 결심하고 그대로 삶속에서 지속적으로 순종하면 나중에 엄청난 은혜를 받는다. 이건 실제로 경험한 자들만 안다. 하나님이 안 보시는 것 같지만 실은 내 마음의 길을 낱낱이 다 보고 계신다.
10
은혜 타령만 하면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듯 사는 신자들이 참 많다. 그들은 행한 대로 받고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씀이 신약에는 아예 없는 듯 담대하기까지 하다. 예수님의 준엄한 경고의 말씀들을 교리주의자들의 발 아래 뭉개버린 대가가 클 것이다.
11
신자의 온전한 해방은 주께 대한 온전한 복종에 있다는 진리는 참 역설적이다. 복종하면 내가 가진 걸 다 잃어버릴 것 같아보인다. 그러나 대가 지불 없인 진짜 순종도 없다. 겉은 화려하나 끝에 가짜로 판명나는 경우는 처음부터 내 것을 안 내놓은 경우다.
12
좋은 설교는 거의 예외없이 준비하는 데 들인 시간에 비례하는 듯싶다. 꼭 한 설교에만 적용되는 룰이 아니다. 평소 성경신학적인 공부와 폭넓은 독서, 묵상, 기도에 들인 시간이 다 포함된다. 직접적이고도 실용적인 자료들은 그 바탕 위에서만 효과가 있다.
13
청소년 시절 여러 문학 고전들을 읽으며 처음으로 삶이 섬세하다는 걸 배웠다. 사람의 눈빛은 많은 말을 담을 수 있고 침묵에도 큰 외침이 잠겨 있다고 느꼈다. 사람이 몸에 붙은 손발을 놀려 움직이는 것 하나하나도 심장이 같이 따라나오는 유별난 언어였다.
14
"지금 우리가 보는 우주의 존재 자체가 기적이다." C. S. 루이스의 말이다. 기적적인 공간에서 기적적인 존재로 살아가면서도 기적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주제 파악을 아직 제대로 못한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구도의 여정에도 필요한 조언이다.
15
C. S. 루이스는 신학적인 용어를 쓰지 않고 신학을 말하고 종교적인 용어 없이 종교를 말했다. 현학적이지 않은 평범한 일상 언어로 하나님을 전하고자 애쓴 변증가였다. 그의 생각을 되씹고 음미하며 삶을 음미해나가는 것이 얼마나 맛나고 고마운 일인지.
16
여름철에 모기들이 집에 출몰하면 테니스 라켓처럼 생긴 전자 해충 박멸기로 잡는다. 주로 딸이 모기를 목격하고 아내가 몰아잡는데 "아빤 뭐 하고?" 물었더니 밖에서 모기를 데리고 온단다. 그래선지, 피맛이 별로여선지 모기들이 나는 잘 안 물고 지나간다.
17
교우들이 공부하고 일하는 곳들을 찾아가 그들과 교제 나누는 기쁨이 참 크다. 교회가 작다고 해서 그 멤버들의 사연마저 작은 건 아니다. 한 사람이 한 우주요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교회다. 갈고 닦아 윤이 나게 하는 대화로 치자면 끝이 없어야 맞다.
18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어찌 놀라운 일이겠는가?" 라비 재커라이어스의 말이다. 서점에서 수많은 책들의 제목을 보며 종종 느낀다. 컨텐츠는 무수한데 방향은 없고 삶은 살리는데 죽음은 못 살린다.
19
일차적으로 하나님은 만나야 할 분이지 공부해야 할 분이 아니다. 신앙은 생명이지 이론이 아니다. 만남에서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고 그 의존 관계에서 믿음으로 살아갈 힘과 지혜, 곧 은혜를 받아 누린다. 구원은 그 전 과정에서 말씀과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삶이다.
20
청년이 이성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건 그 상대방의 몸에 하나님의 신비로운 솜씨가 깃들어 있다고 직감해서다. 사람이라면 성적인 기관을 포함해 신체의 모든 부품이 일체 완비다. 사람의 몸이 신적인 작품이 아니라면 신비도 없다. 신비가 없다면 매력도 없다.
21
대체로 부부는 서로에게 상대적이다. 누구를 배우자로 만나냐에 따라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도 되고 나쁜 사람이 괜찮은 사람도 된다. 그래서 부부간의 일은 외부인들이 보는 것과는 다른 잣대로 봐야 할 때가 많다. 물론 공통된 기준은 언제나 한 분이겠지만.
22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신자의 섬김에 이 기도가 살아 있다면 타락하지 않는다. 신자는 그저 빵이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알게 된 나환자들과 같다(왕하 7:9). 주의 은혜 없이는 언제까지나 어느 것으로나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는 인생들이다.
23
묵상하는 말씀에 대해 질문을 안 던지면 묵상이 진행되지 않는다. 질문은 말씀에 대화를 요청하는 것과 같다. 내가 순전히 내 입장에서 질문을 던져야 상대방도 상대방의 입장을 있는 그대로 전해준다. 다 알겠거니 하고 적당히 넘어가면 대화나 성숙도 없다.
24
지금은 종말에 깨어 있지 못하면 세상에 중독되거나 일에 중독되거나 한다. 요즘 같은 세상과 교회 형편에서 타락하지 않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낼 길은 종말신앙뿐인 듯싶다. 개혁이다 뭐다 떠들어도 이 신앙에 무지하고 무감각하면 꿍꿍이속이 따로 있어보인다.
25
이렇게 급박한 시대에 신자들이 예수님의 재림에 왜 눈을 못 맞출까. 교회와 세상, 자기 사역과 일을 주님보다 더 사랑해서다. 자신의 일로 주님 사랑을 드러낼 수 있지만 그분 자체를 원함만 못하다. 주님이 좀 더디 왔으면 하며 일하진 않는지 돌아볼 것.
26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7:8). 세상에 믿음이 흔하면 아직 예수님이 오실 때가 아니다. 지금 재림을 열심히 무시하는 이들이 재림을 더 앞당긴다. 지금 너무도 흔한 이 불순종이 재림의 주된 전조라는 사실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27
"지금의 평화가 늘 계속되고 불미스런 심판이나 재앙은 함부로 내려선 안 된다. 이런 바람을 거스려 환난 운운하면 불안과 현실도피를 조장하는 짓이다." 지금 교계 분위기다. 현실 안주 대신 늘 종말에 깨어 있으라는 하나님 말씀의 분위기와는 온도 차가 크다.
28
종말이나 환난을 말하면 불안해지는 신앙은 불안정한 신앙이다. 개인적이든 역사적이든 종말신앙은 끊임없이 신앙이 바로 서 있는가를 점검케 해준다. 비현실적 신앙을 현실적인 신앙으로 바로잡아준다. 종말에 마냥 침묵하는 것이야말로 현실도피를 조장하는 짓이다.
29
예수님 이름보다 자기 이름을 더 중시하는 이들이 있다. 왠지 창피하고 없어보여 지옥을 입에 안 담는 일꾼들이다. 지옥은 구더기와 불이 죄인에게 영원한 고통이 되는 곳이다. 주님이 거듭 경계한 지옥에 대해 침묵하는 건 그분을 대놓고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30
요한계시록의 큰 환난을 문자적으로 보는 면에서 역사적 전천년설이 무천년설보다 진리에 더 가깝다. 그러나 교회가 그 환난을 다 거친다는 주장은 무모하다. 전무후무한 환난에서 살아남을 자가 거의 없는데다 만신창이 신부로 신랑을 맞이하게 하실 리도 없다.
31
요즘 딸이 기말고사로 바쁘다. 엄마도 딸아이의 교과서를 함께 공부하다시피하며 학업을 도와준다. 집에 늦게 들어가보니 얼핏 합숙훈련 분위기마저 감돈다. 과외를 안 시키려다 아내가 고생이다 싶어 안쓰럽다. 난 오며가며 멋쩍은 듯 딸내미 머리만 쓰다듬는다.
32
울산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동해에서 진도 5.0 규모의 지진이 났다. 그 지진이 만약 육지에서 일어났다면 원전을 비롯해 국가적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주의 자비가 없다면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는 일도 없다. 아직은 은혜의 때라는 경고음 같다.
33
"한국에선 아직 변증설교가 안 먹히고 사람들도 안 좋아한다. 그건 알고 개척해라." 교회를 시작할 때 주변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요즘처럼 교회 안팎으로 무신론이 횡행하는 시대엔 그런 안 먹히는 설교를 하는 교회들이 생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34
크든 작든 목회자는 목양의 현장을 섬기는 게 좋은 듯싶다. 그래야 영성이 안 죽는다. 목회가 영성을 유지시켜주는 토양이기도 하다. 사람살이와 신앙생활이 무 자르듯 원칙대로만 안 된다는 삶의 복잡다단함도 목회하며 배운다. 현실은 생각보다 더 현실적이다.
35
누군가가 요즘은 '주 예수'가 점점 '(주)예수'로 보인다고 했다. 교회 타락이 당연시되는 시대에는 영적 생명을 우선하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생명 외의 다른 이유로 타락한 교회에 매여 있는 건 스스로를 서서히 죽이는 일이다. 그 책임은 각자의 몫이다.
36
하나님은 내가 많은 일을 하는 것으로 칭찬하시지 않을 것 같다. 맡기신 그 일을 하는 것에 상 주실 것 같다. 그 일을 알면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는 사람은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돕는답시고 자기 일을 하면 하나님께 도움이 안 된다.
37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의 내 모습에서 하나님은 나를 일꾼으로 사용하실 수 있는지를 재보신다.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내 모습은 참고용일 뿐이다. 내 모습에서 정말 중요한 건 나와 하나님만 아는 것 또는 나와 내 이웃들은 모르고 하나님만 아시는 것이다.
38
해와 달과 별들이 떠 있는 한 흩어진 이스라엘도 반드시 나라로 회복된다고 주께서 약속했다(렘 31:35-36). 이스라엘의 회복을 도외시하고는 아무리 요한계시록을 파고 또 파도 물은 안 터져나온다. 약속의 말씀을 무시하면 무지와 혼돈 자체가 심판이다.
39
종말의 사건들을 자신이 예측하는 틀에 임의로 궤맞추는 건 위험하다. 특정일을 정하거나 특정물을 666으로 대입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별난 음모론 없이 성경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종말 시대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다. 그래야 끝까지 성경의 권위가 선다.
40
지금 자기 생계나 사익을 위해 진리를 외면하거나 왜곡하는 자들은 적그리스도의 때에 자기 생존을 위해 주를 배반하고 우상에게 경배할 자들이다. 지금부터 생계마저도 주께 맡기는 연습을 해야 한다. 적그리스도의 때는 미래의 어느 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다.
41
동네 건널목을 건너는데 올망졸망한 초등생들이 앞선다. 한 남자애 머리를 쓰다듬으며 몇 학년이냐고 물었다. 많이 받아본 질문이었던지 익숙하게 손가락 하나를 들어올린다. 눈빛이 마치 "나는 작아요"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것 같다. 작을 때가 얼마나 좋은가!
42
"사람은 나면서부터 동등하지 않아!" 지하철 광고에서 얼핏 본 말에 금수저 흙수저가 금세 오버랩된다. 사람들의 이기심으로 공동체성이 깨어진 탓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듯한 느낌. 세상의 불공평함과 불완전함을 기준도 없이 감정적으로 마구 뒤섞어버린 느낌.
43
"너를 나라들 가운데에 매우 작게 하였으므로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느니라"(옵 1:2). 창조주가 역사의 주권자다. 민심은 천심이란 말은 그의 경영방식 중 하나가 아닐지.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도 훗날 하나님나라 완성에 꼭 필요했던 일로 판명날 것이다.
44
한국교회 안에서 사역자들도 정치인들처럼 자신을 위해 모호하게 말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성경 속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 분명한 성경의 진리마저도 이 사람 저 사람 염두에 두고 이리저리 다 잘라서 애매모호한 말들로 둔갑시킨다.
45
"이건 진리의 문제"라고 하면 "아니다. 그건 해석의 문제"라고 한다. 진리 해석의 측면에서 사람은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모든 진리를 그런 말로 모호하게 둘 순 없다. 이땅과 함께 천국과 지옥도 동시에 중시하지 않는 경향만 봐도 이런 예들은 많다.
46
개인기도를 공중대표기도처럼 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 격식도 필요하지만 때로 형식 없는 기도도 중요하다. 하루 중 내가 느낀 것, 미움과 아픔과 하나님께 대한 속마음까지 있는 그대로 다 토해내며(시 62:8) 기도하면 회개가 우러나와 마음이 깨끗해진다.
47
거창한 주제들만 놓고 기도하길 좋아하는 사람은 삶에서도 위선자가 되기 쉽다. 기도에서도 기쁨과 자유를 못 누린다. 좋은 거 좋다, 싫은 거 싫다, 미운 거 밉다고 주께 아뢰지 못하면 마음에 감정의 쓰레기들이 고스란히 남는다. 나중엔 하나님도 미워진다.
48
기도할 내용이나 소재가 딸린다는 건 하나님 앞에서 나에 대해 솔직하지 못해서다. 그 앞에서조차 기도로 나를 포장하기에 바빠서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나아갈 길을 스스로 막고 있다. 기도의 핵심 모토는 무조건 있는 모습 그대로다. 다른 건 다 불순물이다.
49
스스로 느끼기에도 본래의 자신보다 지나치게 착하고 순한 기도는 이제 그만둬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바리새인의 기도로 느끼신다. 나의 기도를 찾아야 한다. 마음 저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나만의 기도를 회복해야 한다. 안 그러면 기도가 큰 짐이다.
50
신음도 기도다. 사람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이들이 하나님께도 싫은 소리를 못한다. 지금 그 패턴을 못 깨면 죽을 때까지 그대로 간다. 실은 그게 얼마나 큰 교만이며 하나님을 무시하는 제 고집인지를 끝내 모른다. 회칠한 무덤이 따로 없는데 남들만 본다.
51
기도는 하나님과 흉허물 없이 대화하는 것이다. 내 삶과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갖가지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말 그대로 다 드러내 보여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다 아시지만 나는 모른다. 그걸 다 아뢰는 것으로 나를 똑바로 보게 하시는 통로가 기도다.
52
기도할 때 지루해지는 건 하나님 중심의 기도를 너무 많이 의식해서다. 내 마음에 충실하면 하나님께도 충실해진다. 먼저는 나의 절박한 데서 시작해야 한 걸음씩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 나로부터 하나님께로 가는 과정이 생략된 기도는 금세 무기력해진다.
53
기도에 재미가 없다는 건 하나님께 죄송하게 여겨야 할 별 일이다. 아버지 하나님을 힘없는 허수아비로 만들었거나 지나치게 근엄한 독재자로 만들었거나다. 아니면 하나님이 내 삶에 관심이 없다고 확신하면서 그 확신을 기도로 확인하는 게 마땅치 못했거나다.
54
내 기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기도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기도를 종교로 만드는 가장 빠른 지름길, 그 의무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모르면 스스로 만든 기도의 올무에서 끝내 못 벗어난다.
55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 철저히 솔직한 기도를 드리게 되면 삶에서 한 번도 회개한 적 없는, 회개할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죄를 발견하게 된다. 기도의 절정은 회개다. 진실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나아가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통로가 기도다.
56
매월 한 번씩 갖는 갓토크 모임에 나오는 비신자들 가운데 개근상을 탈 만큼 꾸준히 나오는 이도 있다. 매번 다음엔 안 나올 것처럼 하면서도, 가끔 밉지 않은 비아냥을 부려가면서도 의미있는 자기 질문들을 고수하며 하나씩 풀어간다. 기적이 따로 없다.
57
주위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보면 절로 감탄이 나온다. '어쩌면 저런 마음을 가질까. 그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이 동일하게 내게도 역사하신 그분이구나.'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라면 서로 딴판인 사람들이 이렇게 똑같은 신앙을 가질 수가 없다.
58
기본적으로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목회자는 목회자의 자질이나 은사가 없는 게 아닐까. 사람 자체보다 그가 가진 것, 행하는 것에 가치를 두면 비즈니스가 된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못해도 사람이란 이유만으로 존중하고 섬길 수 있는 목회자가 되고 싶다.
59
이리저리 치여 자살로 생을 끝내려는 신자의 이야기를 온라인에서 들었다. 누구도 그 상황에 처해보지 않고는 함부로 말 못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든 살아내고 견뎌내는 게 가장 큰 순종이다. 누구도 가장 억울한 죽음을 당하신 분보다는 아직 덜 억울하다.
60
성도들의 삶이 이도저도 아니고 오히려 세상사람들과도 별 차이가 없는 이유가 있다. 말씀에 순종하되 철저히 순종하는 삶을 결단하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아서다. 어중간한 순종에 익숙한 사람들일수록 스스로 만든 시험의 올무에 곧잘 빠지고는 하나님을 원망한다.
61
말씀에 한 번 순종했는데 아무 표가 안 난다. 한 번 더, 또 한 번 더 순종해도 아무 일이 없다. 많은 이들이 여기까지 순종하고는 원상복귀한다. 그래서 끝까지 별 일이 없다. 순종은 끝까지다. 그러고 나면 주님이 전적으로 책임지시는 기적이 일어난다.
62
참된 회개는 순종으로 귀결된다. 지금은 참된 회개는 물론 형식적인 회개마저 드물어져간다. 순종이 어려운 이유는 깊은 회개가 없어서다. 회개하고도 다시 같은 죄를 반복하면 순종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회개하고 그대로 순종하면 순종이 점점 더 쉬워진다.
63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다들 천국에 들어가길 구한다. 그러나 이땅에서 말씀에 순종하고 희생하는 좁은 문의 삶은 구하지 않아 스스로 입구를 더욱 좁혀버린다.
64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 6:46). 행함이 없는 믿음은 모래성과 같다고 주께서 거듭 말씀하셔도 남의 일처럼 여긴다. 산상수훈은 지키지 못할 걸 알고 주신 거라며 아예 한 술 더 뜬다.
65
지옥에 가서야 자신이 속았다는 걸 알게 될 사람들이 가장 억울할 것이다. 이땅에서 구원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힘써 구하는 것은 그만큼 영원히 중차대하다.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밭을 살 마음이 없는 자들은 이미 스스로를 꽤 많이 속이고 있다.
66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 예수님이 곧 오신다고 아무리 말해도 무관심, 무반응인 이들이 대다수다. 노아가 방주를 짓는 동안 사람들의 반응이 그랬다. 지금 눈에 보이는 징조의 시간들도 방주를 짓는 기간과 비슷할 듯.
67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계 3:10). 빌라델비아 교회에 속한 모든 신자들은 큰 환난 전에 휴거될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이 휴거된 것처럼 이제도 휴거의 요건은 하나님과의 동행이다.
68
재림이나 종말, 휴거에 대해 말하면 이상하게 여기는 분위기는 확실히 마지막때에 영적 혼돈을 부추기려는 사탄의 전략이 제대로 먹혀들고 있다는 증거다. 목회자들부터 자신들의 입지를 우선해서인지 성도들을 깨우지 않는다. 그들은 주님보다 자기를 더 섬긴다.
69
고구마, 보리 강정, 두유와 시리얼, 누룽지, 방울 토마토 같은 과일. 이런 음식을 이리저리 순열조합해서 아침식사로 먹는다. 차려먹는 밥보다 더 나은 듯한데 아내는 이게 밥보다 더 비싸단다. 그럴 리가... 먹기 쉬워 가사노동이 안 드는 건 어쩌고.
70
"하나님은 태양과 같다. 우리는 그것을 똑바로 보지 못하지만 그것이 없다면 당신은 다른 어떤 것도 보지 못한다." 체스터튼의 말이다. 비신자들도 이 세상에서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로 느끼고 보고 누리며 산다. 은혜는 차별없이 공평한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71
신자는 영생을 소망하며 살지만 이땅의 삶을 소홀히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영혼이 잘되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다는 게 성경의 약속이다(요삼 1:2). 번영신학의 문제는 영혼이 잘되는 삶의 철저함 없이 어설프게 복을 풀어낸 데 있다.
72
"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욥 38:33). 우주를 만드시고 때마다 일일이 통솔하시는 하나님은 너무도 위대하셔서 사람들이 잘 못 알아본다. 쉽게 알아보면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위대하지 않다. 하나님은 경외할 분이지 쉽게 알아볼 분이 아니다.
73
나타난 과정의 현상만 아는 과학은 우주의 처음도 모르지만 끝도 모른다. 아니, 처음을 몰라 끝도 모른다. 처음이요 나중이며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만 그 둘 다를 아신다. 물론 그분의 음성을 알아듣는 데 깨어 있는 자들 또한 그 둘 다를 안다.
74
이땅에서 너무도 사랑하는 연인과 한없이 같이 있고 싶은 행복하고 정신없이 들뜬 마음에 천만 배를 곱해보라. 그조차도 예수님과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할 때의 행복만 못하다. 예수님이 좋아야 천국도 좋다. 천국이 주는 것은 온통 예수님 외에 아무것도 없다.
75
이땅에 사는 각 개인은 영생이라는 엄청난 가능성을 다 갖고 있다. 그런데 그 영원한 세계를 등한시하고 맨날 이땅의 일들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면 누가 봐도 바보다. 신자가 바라는 게 이생뿐이면 가장 불쌍한데(고전 15:19) 요즘은 가장 처세가 좋다.
76
죄는 영원하다. 오늘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위는 영원하다. 형벌받거나 용서받거나 간에 그 행위와 면죄의 효력은 영원하다. 사실 내가 이땅에 태어나면서부터 뭐 하나 영원하지 않은 게 없었다. 영원은 죽은 후부터이겠거니 하다가 영원할 기회만 다 놓친다.
77
가게에서 신용카드로 계산하면 어떤 주인은 나 대신 사인을 해준다. 일 자를 쭉 긋거나 입 벌어진 동그라미를 휙 돌린다. 내 사인이 아닌데 어쩌라는 건지 내 보는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다. 때로 나도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사인을 되는 대로 막 그렸지싶다.
78
시리즈 변증설교를 할 때는 테마에 따라 많은 책들을 참조한다. 특정 주제는 그 많은 책들을 하나의 관심사로 꿰뚫어내는 생명력이 있다. 사람만 부활하는 게 아니다. 주제 하나가 바로 서면 그 주위에 없는 듯 죽어 있던 책들이 연쇄적으로 쭉 부활한다.
79
목회자는 성도들과 주고받는 사랑으로 큰 기쁨과 위로를 얻는다. 진리와 주의 사랑 안에서 나누는 사랑보다 더 순수한 사랑은 없다. 세상에서 앞뒤를 재고 계산하고 이해타산에 얽힌 사랑에 익숙하던 이들도 교회 안에선 흉내로라도 순수한 사랑에 목말라한다.
80
하나님께 섭섭하다고 기도하면 큰일나는 줄 아는 이들이 많다. 기도에서조차 폼잡고 말을 조심하니 마음이 안 열리고 기도가 막힌다. 내가 싫고 힘들고 속상하고 안 좋게 여기는 걸 죄다 아뢰어보라. 그러고 나서야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걸 나도 좋아하게 된다.
81
신앙생활에서 가장 두려운 것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내 삶에 침묵하시는 것이다. 내가 기도하지 않거나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아서 생기는 침묵도 있다. 그러나 오래 묵은 죄나 나쁜 습관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막혀 있기도 하다. 후자가 훨씬 더 위험하다.
82
요즘 신자들은 죄책감이 드는 데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목회자도 교인에게 죄책감을 심어줄까봐 꺼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죄책감은 성령님이 참된 회개로 이끄실 때 사용하는 고전적인 은혜의 한 방편이다. 죄책감은 얼마든 긍정적인 에너지가 될 수 있다.
83
돌아보면 기도해서 주의 응답을 받지 않은 적은 없다. 기도하면서 마음에 위로와 지혜를 얻고 균형감을 회복하게 되는 것도 응답이다. 기도하지 않았다면 그런 만큼 내 마음대로 내질렀을 일상의 모든 결정과 언행이 기도로 한 번 쉬어간 것만도 좋은 응답이다.
84
말씀 묵상과 통독과 기도와 찬양으로 아침마다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면 내 심령이 천국의 힘과 은혜로 채워진다. 일상사로 너무 바빠 이런 시간을 못 가진다는 사람들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는 아낌없이 시간과 정력을 쏟는다. 하나님이 자기보다 덜 중요하다.
85
세상에서 신과 상관없는 듯 자유롭게 즐기며 살아도 좋다. 생의 의미나 목적 따윈 쓰레기통에 집어던져도 좋다. 그러나 죽음의 소환 명령을 피치 못하는 한 어떤 생도 그저 한 순간 불꽃의 파편에 불과하다. 영원하지 않은 쾌락에는 참된 자유나 행복이 없다.
86
어느 날 우연이 자신을 가리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선포했다. 누구도 이 말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모두들 진짜 삶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과 게으름을 적당히 무마시켜줄 무소불위의 권력자를 원했다. 우연은 "내가 곧 그니라"라고 답해왔다.
87
"우주를 탄생시킨 건 신이 아니라 중력의 자연법칙에 의한 빅뱅이다."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말이다. 다윈주의 생물학에 이어 물리학에서도 무신론이 분명하게 공표되는 순간이다. 물론 중력도 이미 피조물이란 걸 놓치며 무지 큰 틈새도 동시에 공표했다.
88
무신론적 과학자들은 과학이 사람이 관찰할 수 있는 것, 곧 사실과 경험적 증거에 관련된 거라 말하면서도 자신들은 자주 증거가 미비한 가설을 일방적으로 전제하거나 주입시키려 한다. 과학만능주의에 세뇌된 대중들은 그들을 교만한 권위자로 기꺼이 옹위해준다.
89
유신진화론은 성경의 첫 책 창세기를, 무천년설 종말론은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을 상징화시킨 주범이다. 두 흐름이 다 성경 자체보다 지식주의와 손잡은 신학 성향에서 나왔다. 지식은 진리를 통찰하는 데 매우 유용한 도구지만 지식주의는 때로 상식을 뒤엎는다.
90
전능하시고 지혜가 한없으신 하나님의 마음에 든다는 게 얼마나 황홀하고 귀한 일인가. 그런데 많은 신자들조차 이땅에서 사람들의 마음에 들려고 아우성이다. 그것이 얼마나 중대하고 어리석은 배반인지는 이땅에선 다 모른다. 죽고 나면 일시에 다 드러난다.
91
찬양에 감동받지 못하면 믿음의 감성지수가 많이 가라앉아 있다는 증거다. 주의 이름을 하루 종일 찬양하는 것만으로도 전혀 시간이 아깝지 않은 마음이 천국의 마음이다. 찬양만으로 족한 사람이 일상의 삶의 예배로도 하루 종일 주를 진심으로 찬양할 수 있다.
92
개척 목회를 하기 전에는 은연중 '내가 할 수 있다'는 마음이 있었다. 지금은 '하나님이 하시는구나'를 어느 때보다 체감한다. 직접 현장에서 체험하지 않고는 배울 수 없는 하나님이 있고 신앙이 있다. 이론과 실제, 안과 밖은 글자 모양만큼이나 다르다.
93
참된 회심은 전적인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특별한 예외의 경우를 제외하고 사람의 의지에 반해서 일어나진 않는다. 회심의 과정에서 사람의 의지적이고도 인격적인 결단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 결단의 지점조차도 이미 성령의 역사에 속하기 때문이다.
94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는 동사다. "나는 있다"(I AM)라는 뜻을 가진 1인칭 be 동사다. 하나님은 있는 분이지 없는 분이 아니다. 그분의 임재를 무시하면 그분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함을 명사나 형용사로 여기면 동행의 기쁨을 모른다.
95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신앙의 힘은 하나님을 분석하고 탐구하는 데서 나오기보다 그분을 기뻐하는 감정적인 데서 나온다. 주께 대한 지식에만 머물고 적극적인 기도와 찬양과 예배로 못 나아가면 신앙이 무력해진다.
96
순전히 하나님으로 인해 가슴이 촉촉해지지 않고는 하루를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일상의 팍팍한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이 늘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는 삶이 불가능하다고 당연시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실제로는 가슴으로 만나는 하나님 없이 그냥 살아서다.
97
지식이 많아 사회나 교계를 놓고 비판을 일삼는 이들은 마음이 메마르고 의분이 쌓여 자기의도 쌓이기 쉽다. 그래서 대체로 찬양이나 기도, 예배에 건조해지기도 쉽다. 지식 추구의 갈망이 예배자 의식을 압도한다. 지성인일수록 예배에 뜨겁게 몰입해야 살아남는다.
98
신자가 삶의 자리에서 이땅에 정의와 공평이 이뤄지도록 힘쓰는 일은 복음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다. 믿음의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다. 믿음의 결국은 세상의 변화가 아니라 영혼의 구원이다(벧전 1:9). 개인 구원과 내세 복음을 경시하는 이들을 경계할 것.
99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딤후 3:7). 배우기는 열심히 하는데 끝내 진리에는 못 이르는 풍조가 기독교 지식주의일 수 있다. 거기선 주님의 재림이나 천국, 지옥은 너무 원시적이어서 지적 사유를 즐겁게 해줄 사변에 밀려난다.
100
성경이 신자는 이렇게 살 수 있다는데 신자들은 지금은 그렇게 사는 이가 없다고 한다. 아브라함이나 다윗, 바울 같은 사람은 성경 밖에선 없다고 한다. 연약함을 늘 인정하는 건 좋지만 신자들의 하향평준화를 당연시하는 듯한 리더들의 언행은 비성경적이다.
101
개혁주의자들의 가르침에는 사람을 나태하게 만드는 은혜만능주의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이래도 나를 이뻐하시고 저래도 나를 이뻐하신다. 만사가 주의 절대주권에 속하니 나는 웬만큼만 해도 그분이 척척 알아서 챙겨주신다. 아니라 해도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다.
102
내가 개혁주의 신학의 틀을 비판하는 건 단순히 그 신학이 싫거나 해서가 아니다. 전도자의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다 발견한 전도자의 마땅한 의무여서다. 오해의 소지가 많은 신학대로 가르침받은 이들이 구원에 대해 오해하면 최대한 막아서는 것이 전도자의 일이다.
103
신학적 문제든 신앙생활의 문제든 오류나 오해에 대해 주께서 알게 해주시는 만큼은 나름껏 순종해야 그분의 종이다. 사역자는 파수꾼이기도 하다. 파수꾼들이 입을 닫고 있으면 수많은 사람들을 잃어버릴 수 있다(겔 33:6). 그 피값을 누구에게서 찾으실까.
104
바울은 구원을 일생일대의 가장 큰 영예요 상으로 여겼다. 칼빈주의 구원론을 믿는 자들은 구원이 떼놓은 당상이다. 성화는 잘하면 좋고 못해도 최소한 천국이니 긴장감이 없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히 2:3).
105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성경은 두려움이 믿음의 증거라 하는데, 교리는 두려워하면 믿음이 없는 거라며 안심하란다. 어디를 따라야 성경적인가?
106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딤전 6:5)은 자신의 생존과 영광을 더 중시하고도 그것을 자기 신학 노선이라며 포장하기 쉽다. 나를 포함해 누구도 이런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다만 그걸 합리화시키며 고민하지도, 회개하지도 않는 건 죄다.
107
초반에 균형있게 잘 시작하다가 나중에 치우치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특히 성령사역자나 성령운동이 그렇게 되는 경우가 꽤 있다. 그래서 누구든 무슨 운동이든 내가 중시하는 건 구원이다. 이걸 등한시하게 만드는 어떤 것에도 성도들을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108
"목사님이세요?" 기업체 신우회 예배로 회사 정문을 통과할 때 경비실로부터 자주 받는 질문이다. 그렇게 묻는 이의 얼굴에 어중간한 미소가 흐른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목회자가 갖는 이미지와 위상이 그 주변에 어른거린다. 단지 내 지레짐작의 잔영이길.
109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들어주시는 데 일가견이 있다. 섭섭하지만 다 들어주시면 내가 이만큼도 하나님 앞에 안 엎드릴 것도 사실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나를 위해 자주 안 전능한 척하신다. 사랑과 믿음의 부자 관계로만 더 깊이 교제하자 하신다.
110
행복한 사람이 믿음 좋은 사람이다. 지금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행복을 하나님 외의 것에서 찾으려 해서다. 믿음으로 행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웃을 섬기려는 것, 행복하지 않은데 행복한 척하는 것이 다 하나님과 친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종교적 율법주의다.
111
작은 교회의 목회자나 예배를 큰 교회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작게 여긴다면 교회나 예배의 절대가치에 무지한 것이다. 세상에 익숙해지는 만큼 참복음에 무감각해진다. 큰 교회 지향의 세태가 위험해지는 건 절대가치를 너무 무심하게 상대화시키려는 경향 탓이다.
112
"내 흉측한 몰골을 봐! 너도 이렇게 죽어!" 귀신을 죽은 사람의 넋이라 오해하는 세인들에게 귀신은 죽음을 환기시키는 전령이다. 귀신이 없다고 큰소리치는 이들도 한밤중 공동묘지행은 꺼린다. 죽음이 없는 듯 큰소리치며 살다 마지못해 죽는 것과 빼닮았다.
113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유 1:5). 개혁주의자들은 신자들의 심판에 대한 성경의 경고를 무시한다. 그들이 믿는 절대 주권자 하나님의 경고인데도 자기 신조를 믿는 믿음 또한 워낙 절대적이어서다.
114
성경은 자신이 선호하고 보고 싶어하는 대로만 보고자 하면 제 나름의 신학을 완성하는 데 완벽한 재료들을 풀서비스로 제공한다. 그런 신학은 성경을 그 자체로 살아숨쉬는 유기적인 생명체로 여기기보다 자기 공식에 맞는 부속품들의 나열로 짜깁기하기에 바쁘다.
115
유신진화론자들이 한국의 창조과학회 활동을 안식교 교리에 근거한다고 공격하는 건 사실이더라도 흑색선전에 가깝다. 창조과학 활동에 비과학적인 부분이 있다면 그것만 따지면 된다. 자칫 본질적인 논쟁을 호도할 수 있는 공격은 교회 안팎으로 덕스럽지 못하다.
116
하나님께서 원숭이로부터 진화시키는 방식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유신진화론자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성경의 기록은 미심쩍은 신화나 넌센스가 되고 만다. 갈비뼈에 담긴 과학적 개연성과 신학적 의미를 탐색하는 일은 정당하다.
117
"죽은 후 천국과 지옥이 왜 있어야 하나?" 교회 새가족반에 새로 온 초신자가 물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곳과 분리되는 곳으로 나뉘어져야 해서라고 답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 사랑과 증오, 생명과 죽음이 아직은 공존하기에 기회가 있다.
118
금욕주의, 행동주의, 열정주의, 묵상주의, 지성주의... 개인의 성격과 기질에 따라 정말 영성에도 색깔이 있나보다. 각자의 은사나 소명도 다를 법한데, 시류에 따라 종종 획일화시키려 든다. 인기 있는 소명이란 없다. 인기를 좇는 소명자가 있을 뿐이다.
119
지성주의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은 대체로 무천년설자에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를 잘 모르는 이들이 많다. 그들의 운동이 성경 자체보다는 학문에 치우쳐 있어서인 듯싶다. 지적이면서도 어린아이처럼 은사나 종말, 기적에도 깨어 있는 신앙은 성경적으로 가능하다.
120
마지막때의 큰 환난 전에 휴거될 자들은 매우 적을 것 같다. 세상이 좇는 걸 함께 좇아가는 듯한 현재의 교회 분위기로 봐선 많은 목회자들부터 환난에 남게 될 듯싶다. 그들은 종말에 대한 주의 말씀을 섬기기보다 교단을 섬기며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본다.
121
신학을 많이 공부하고도 영적으로 교만해질 경우 똑바로 눈만 뜨면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일조차 못 보게 된다. 일례로, 로마서 11장을 읽고도 마지막때 이스라엘의 회복을 도외시한다면 거의 확신범 수준이다. 진리보다 학문주의를 우상시하며 좇아온 결과다.
122
주님의 사랑은 나를 놓지 않는다. 주님이 나를 버릴까봐 염려할 일은 전혀 없다. 문제는 내가 그분의 사랑을 놓는다는 것이다. 그분의 호의를 지속적으로 배반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억지로 나를 돌이키고 강제로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그분의 사랑이 아니다.
123
하나님께서 사람은 이래야 한다고 하시는데 사람은 하나님이 그래선 안 된다고 한다. 하나님이 행함 있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고 하시는데 사람은 은혜로만 구원을 안 줄 거면 그 구원은 별로라고 한다. 사람이 구원의 주체가 되고도 그 교만을 못 알아차린다.
-안환균 목사의 트위터, 페이스북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