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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회개만 하면 천당 가냐? 무논리 개신교." 한 유명 청소년 사역자의 성적 탈선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본회퍼가 염려한 자기 부인의 십자가 없는 값싼 회개와 은혜, 값싼 복음이 한국 개신교의 현주소다. 칼빈주의 견인론을 버려야 한국교회가 산다.
2
하나님께서 어떤 사역자의 숨은 죄를 이땅에서 공개적으로 드러내시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종을 사랑해서 진정으로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다. 그러나 수많은 종들이 주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숨고 자기 합리화에 숨다가 끝내 지옥을 자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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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한 번 예수를 믿었기에 깡패가 되더라도 반드시 천국에 갑니다." 한 장로교 목회자의 말이다. 성경에 없는 말인데 교리화된 성경을 믿고 있어 대담하기까지 하다. 이런 가르침이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와 신자들의 대담한 타락을 부추기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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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여 다시는 죄에 거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되 그 진실한 믿음의 증거를 선한 행실의 열매로 보이는 것까지다(요 15:5-6). 이제는 교회 바깥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도 전도받아야 할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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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십자가를 뒤따라 순종하면 짐이 점점 가벼워진다. 호시탐탐 피할 기회만 노리면 기독교는 가장 무겁고 교묘한 율법주의 종교가 된다. 순종없이 제맘대로 살 바에야, 그래서 천국에도 못 이를 바에야 이름뿐인 기독교인으로 사는 건 잘 사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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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목회자들이 그동안 성도들에게 교회에 충성하는 식의 행함을 주로 강조하면서 왜곡된 율법주의를 조장해왔다. 진정한 행함은 일상에서 말씀에 순종함으로 성품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제라도 율법주의적 행함을 버리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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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이 지나치게 교권화되면 총체적으로 부패한 신앙으로 전락하기 쉽다. 그 종교 권력을 중심으로 자기 명예와 이득을 꾀하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꼬이고 거대한 위선의 카르텔을 형성하면서 진리의 숨통을 조인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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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가 가르치는 성도의 견인은 사실 더 까다롭고 차원이 높다. 믿음 이후 성화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믿음 자체가 가짜라고 판단한다. 문제는 진실로 믿은 자는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주장인데, 성경은 진실로 믿었어도 곁길로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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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교회의 총체적 타락상은 "믿기만 하면 구원,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가르친 칼빈주의 신학의 열매다.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 신학의 틀은 성경에서 빗나갔다. 성경 자체보다 교리화된 성경은 결국 교리화된 사람의 열매를 맺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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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는 성도 각자가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회복하며 지속적으로 유지해나가는 과정을 돕는 종이다. 목회자 자신이 그 사이의 중재자가 아니다. 성도 각자가 만인 제사장으로 하나님과 직접 만나 교제하도록 돕는 데서 더 나아가면 독재자로 전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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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말고 다른 일에 미련두지 않아야 사역에만 전념할 수 있다. '이거 말고도 다른 할 일이 많은데'라는 생각에 여지를 두기 시작하면 목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이 아니라 자기 일이 된다. 소명에 충실하면 일이나 성과가 보이지 않고 한 영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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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욕은 명예욕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작동되기 쉽다. 명예욕이 동기가 된 지식욕은 열매가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고 자기에게로 향한다.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평안과 기쁨이 없고 곧잘 경쟁심이나 성과주의에 치우친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아까워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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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무슨 요행으로 받으려는 이들이 있다.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지식을 통하면 필연적으로 그분을 만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에 필연적으로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다. 구원은 그렇게 빼도박도 못할 현실적 필연성 가운데 이뤄져야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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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창세기는 우주와 인류, 죄, 계시, 문화, 종족, 언어의 기원을 다룬다. 인류의 시조 아담, 민족의 시조 노아, 믿음의 시조 아브라함도 소개한다. 온 우주에 있는 것들의 족보로 손색이 없다.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들에는 이런 역사적 밑그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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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람도 아시지만 작은 곤충과 잡풀들까지 다 아신다. 창조자 몰래 그저 제맘대로 생겨난 건 없으니까. 제 맘이라고 하는 그 맘까지 하나님의 가시권 아래 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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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에 대한 주의 경고에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는 이들을 보면 너무 안타깝다. 그들은 잘못된 교사들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도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그들도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면에서는 자기 교사들과 다름없는 한 통속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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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알수록 점점 더 좋아지는 사람, 점점 더 별로인 사람이 있는 듯싶다. 후자는 자기 안에 자기를 두려는 사람이고, 전자는 하나님께 매여 그분 안에 자기를 끊임없이 맡기려는 사람이어서다. 자기 없이 하나님만을 중심에 두려는 사람은 그래서 늘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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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우면 차라리 추운 게 낫지, 추우면 차라리 더운 게 낫지 하다가 매번 사계절을 고스란히 당한다. 더우면 더운 대로 시원한 맛, 추우면 추운 대로 따듯한 맛이 있다고 여기면 그때부터 사계절을 당당히 누린다. 계절도 파도 타듯 타고 오르면 지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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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봐더 장군, 비만해결작전의 사령관", "소크라빼스, 네 지방을 알라." 같은 지하철 광고도 유머가 담기면 눈길이 더 간다. 지성과 감정, 의지라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만 유머를 구사한다. 동물은 그저 생긴 대로 우습게는 보여도 웃음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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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마음만 먹으면 휴가를 내서라도 하루 날 잡아 기도만 하는 시간을 낼 수 있다. 뭐가 그리 바쁜지 노는 것조차 일처럼 분주하게 놀고 지나가니 하나님은 늘 저만치 감감하다. 하나님께 시간을 드려 감쪽같이 일이 잘 풀리는 그런 기적에도 늘 감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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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일상이 되지 않고 일이 되면 거추장스러워진다. 하나님이 나의 가장 중요한 일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다. 기도를 통해 모든 일이 이뤄진다는 믿음보다는 내 힘과 지식으로 만사가 이뤄진다고 믿으면 하나님은 기도할 때만 겨우 하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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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시간을 안 드리면서 말로만 사랑한다 하면 거짓말이다. 시간을 어디 쓰느냐가 내 마음이 어디 있느냐의 주소다. 마음은 몸을 어디 쓰느냐로 드러난다. 몸을 안 들이면 맨날 신앙생활해도 삶에 열매가 없다. 시간과 몸을 써야 진정한 마음의 예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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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적으로는 늘 하나님을 마음의 뒷전에 두고 살면서도 여전히 신자로 자처한다면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하나님을 내 삶의 전부요 중심으로 삼지 않는 신자는 자신의 삶에 도움이 안 되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도 마땅치 않다고 여긴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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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량 못할 은혜로 채우시며 늘 성령의 감화 주사 큰 기쁨 중 주님을 찬양토록 내 생활을 도우시네." 가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은혜롭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하늘에서 은혜가 쏟아부어지면 말로 형용 못할 만큼 아름답다. 이땅이 천국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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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찬양이나 기도나 말씀의 은혜를 특별하게 부어주실 때 인위적으로 끊지 말고 충분히 누리는 게 좋다. 일상의 은혜도 좋지만 개인에게 특별히 부어주시는 부흥의 은혜는 더 좋다. 때로는 때와 장소, 체면을 가리지 말고 하나님께만 흠뻑 젖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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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개인에게 특별한 은혜와 부흥의 때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것을 계기로 이전과 다른 차원의 신앙으로 도약시키시려 해서다. 점프의 기회가 주어져도 늘 제 맘대로 패스시키고는 더 달라고만 하는 이들이 많다. 마음이 없으니 모든 게 그냥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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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존엄함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놀라움을 깨워야 할 그들의 의무를 다하는 데 있다." 딸의 방학숙제라 해서 가족이 함께 샤갈, 달리, 뷔페 전시회에 갔다가 만난 체스터튼의 말이다. 나 역시 세계에 존재하는 놀라움에 무지한 '놀맹' 중 1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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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문명이 화려하고 번듯해보여도 위기에 얼마나 취약한지 모른다. 정전만 되어도 갑자기 세상은 생지옥으로 변한다. 인터넷망 하나만 끊어져도 세상의 불통은 무지막지하다. 문명이 빠르게 발전해갈수록 종말의 강도와 범위도 전방위적으로 빠르게 확장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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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힘이나 의지로는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 성령으로 충만해지지 않고는 성화 자체가 불가능하다. 성령충만은 거룩함의 분위기이기도 하다. 찬양과 기도와 말씀으로 주의 사랑과 은혜에 흠뻑 잠기는 건 자기 힘으로 죄를 이기려는 노력보다 훨씬 수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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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씀은 다 사실이고 역사이기에 모든 말씀이 다 나와 관련이 있다. 애초에 하나님 없이 내가 존재할 수 없었다. 이 관계가 역사적이지 않다면 내 존재도 역사적이지 않고, 성경도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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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아니고는 사람의 어떤 죄도 용서되지 않는다. 사람이 짓는 아주 작고 미세한 죄도 그냥은 용서되지 않는다. 영혼과 몸에 한 번 새겨진 죄는 영원히 형벌받는 것으로 끝까지 유효하다. 지옥에는 예수님의 대속의 피가 한 방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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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내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 늘 살아 있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늘 견고하게 살아 있다. 나중에라도 그 말씀이 주께 내놓을 확실한 물증이 된다. 주님도 그 말씀 앞에선 다른 말씀 못하신다. 성경에 알알이 기록된 말씀은 그래서 내 목숨과 맞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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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이 한국말을 배우려고 애쓰며 고생하는 이야기를 다룬 광고가 있다. 나는 단 한 번도 한국어를 외국어로 대한 적이 없다는 걸 이 광고를 보고서야 실감했다. 한국말이 배우기 어렵다는 걸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영적 세계도 세인들에게는 그만큼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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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에서 많이 안 올라갈 경우 웬만하면 엘리베이터보다 계단을 이용한다. 워낙 걷기를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왠지 빠른 것 같기도 해서다. 세무서에 갔다가 역시나 계단으로 빠졌는데 후끈하게 덥다. 계단에도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있는 곳은 천국뿐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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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거울에 모기 한 마리가 앉아 있길래 손바닥으로 때려잡았다. 수돗물로 모기의 시체를 털고 시원하게 쓸어내렸다. 문득 모기도 정교한 창조물인데 너무 심하게 대했나 싶다. 그도 한 목숨 살아보려고 태어났는데 나는 못 죽여 안달이다. 그래도 모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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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누군가를 용서할 때 "여기까지만 용서할 수 있어. 그 다음은 나도 못 참아!"가 없다. 그러면 그 다음엔 자신이 하나님이 되겠단 소리다. 용서의 한계나 분량은 따로 없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두 팔을 벌리신 동과 서의 거리만큼이 용서의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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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적인 데 한 발, 영적인 데 한 발씩 딛고 사는 신자가 많다. 말씀이 우선되지 않고 늘 자기 기분, 감정, 상황이 중요한 사람이다. 늘 하나님과 자아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자아가 하나님이 되느냐, 주님이 내 자아가 되느냐가 성령의 열매를 좌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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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께 할 말이 별로 없으면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면 할 말이 어디선가 막 우러나온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나님께서 아주 좋아하시는 게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이 말에 아주 약하신 게 틀림없다. 이런 말을 아끼는 사람은 하나님의 민낯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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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없다. 사람들이 자꾸 이래저래 토를 다는 이유는 하나님을 몰라서다. 사람들이 이게 좋다, 저게 좋다고 떠들고 자랑하고 부러움을 사려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알면 다른 걸 원하지 않는다는 게 뭔지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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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심령에 주의 지혜가 통한다. 돌이켜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정말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다(마 18:3). 마음에 주님 외에 딴 걸 품고 있으면 몸도 마음도 어른처럼 무거워진다. 천국의 존재 방식은 어렵지 않다. 어른들이 자꾸 어렵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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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나를 외면해도 나는 주님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기도 중에 전혀 예기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난 주님을 외면할 권리가 없는데 무슨 말인가. 주님이 나를 잘 봐줘야만 사랑하겠다는 게 미안해서 나온 내 신앙 양심의 소리다. 그런 사랑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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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안에서 진심으로 드린 기도는 그냥 땅에 안 떨어진다. 나는 까맣게 잊어버린 기도를 하나님은 기억하신다. 내 기억력에만 의지하면 내 기도는 보잘것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억력으로 보면 내 기도의 양과 내용은 내 어림짐작보다 훨씬 더 많고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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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중심으로 리더십을 세워 교회를 잘 꾸려가는데 굳이 성도들을 깨워 질문하게 할 일이 뭐가 있나?" 변증전도의 필요성을 전하다 보면 이런 반응를 보이는 목회자들이 있다. 교회 유지가 목적인지, 한 영혼 한 영혼의 참된 일깨움과 구원이 목적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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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전도의 대상은 길거리에 오가는 불특정 다수가 아니다. 한두 번쯤 복음을 접해봤지만 그들 각자만의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채 방치된 내 주변의 이웃이다. 나와 인간적인 관계는 있는데 영적인 유대는 없는 이들 중에 이런 영혼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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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전도는 양육전도에 가까워 밭을 기경하듯 먼저 걸림돌을 제하고 씨를 뿌리는 과정을 중시한다. 열매를 단시간에 보기 어렵다. 초대교회는 3년의 공동체생활로 새신자의 신앙을 확인한 후 세례를 주었다. 이제도 성장주의보다 더디더라도 그리 에둘러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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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빨리 교인부터 만든다고 해서 그들이 교회에 오래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급하고 어슬프게 들은 복음에 면역이 되어 더 깊은 회심의 복음에 귀가 닫힌다. 교회에 몸담았다가 떠난 사람이 천만 명을 넘어선 시대에 뻔한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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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교회는 초신자들에게 말씀을 계속 들려줘야 한다. 말씀 듣는 동안 그들이 어떤 강요를 느끼거나 판단을 당하지 않고 자유롭고 넉넉한 분위기를 누리도록 겸손히 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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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그거 알아요?" 딸이 새로운 이야기를 꺼낼 때 먼저 하는 말이다. 대답을 들으려고 던지는 말이 아니라 "나 지금 할 말 있다"는 의미다. 근데 나는 늘 장난삼아 "응!" 하고 먼저 대답한다. 물론 딸도 아랑곳않고 그냥 진행하기에 부질없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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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딸을 사랑하는 이 마음이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이라면 그분은 더 보여주실 게 없을 것 같다. 아버지라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 못하겠다며 떨떠름해질 자격이 이미 없다. 내가 아는 하나님의 한 부분이 이러하다면 내가 모르는 부분도 이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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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사랑의 말씀으로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내 영혼을 친히 만지시는 걸 경험하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 거짓없는 사실로 다가온다. 마치 내 영혼에 말씀의 생생한 흔적이 남겨진 것처럼 내 영혼이 그 말씀이 흘러가는 데마다 섬세하게 반응하는 듯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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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변증이 맡은 우선적인 역할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를 다각도로 제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존재하심을 실제적으로 깨달아 아는 만큼만 사실이 된다. 그 과정 없이는 아무리 말씀을 읽어도 와닿지 않는다. 성경은 존재가 통해야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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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드 배치 결정으로 이제 한국도 시리아나 우크라이나처럼 본국인은 원치 않는 강대국들의 전쟁터가 될 확률이 높아졌다. 나토와 러시아, 아랍과 이스라엘, 아시아에선 중국, 러시아와 미국, 일본의 대치 속에 남북한이 종말적인 방아쇠를 당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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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효성에 미비점들이 있는 걸로 지적되는 사드가 정략적인 목적으로 한국에 배치되는 거 아니냐를 놓고 논란이 많다. 한국은 무엇이든 좌우 이념 대결처럼 몰아가다보니 정확한 사실 파악이 괜히 어지럽다. 정치가 본래의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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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야후는 3차세계대전의 발화점이 될 지역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북한을 꼽고, 이어 남중국해, 중동 등을 꼽았다. 주님은 이미 마지막때에는 전쟁과 지진과 기근, 전염병으로 전무후무한 환난이 온다고 보도하셨건만, 신자들조차 세상 뉴스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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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인류사에 또 한 번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이전 두 번의 전쟁과는 판이하게 다를 것이다. 핵이나 화학전으로 피해 규모가 상상을 초월하고 회생하기도 어려울 듯하다. 전쟁이 주님께 속한 만큼 3차세계대전은 본격적인 마지막때 환난의 전주곡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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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만 의지하게 하시려고 때로 하나님은 내가 의뢰하던 것들을 끊어버리신다. 그때도 눈치를 못 채고 여전히 사람들을 기웃거리면 고생만 더 한다.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고 나를 내려놓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친히 일하신다. 그것이 나의 축복의 통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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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들은 타인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그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지만 그들에게 집착하진 않는다. "이것 아니면, 이 사람들 아니면 안 된다"는 것도 없다. 사람들을 의식하고 그들과 두루 잘 지내려는 사람은 그들을 포기하지 못해 진리를 포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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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신자들이 그분을 함부로 무시한다. 세상 권력과 교회의 권력, 사람의 권력에 기대고도 주 앞에서 시치미를 딱 뗀다. 비신자들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보다 더 마음 아프시게 한다. 이것이 부끄러운 줄만 알아도 즉시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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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정작 각자의 삶에선 아주 멀리 계실 수 있다. 우주의 수 억 광년 거리는 처음부터 그 거리를 가리키려고 존재하는 건지 모른다. 사람의 수단으로 주의 은혜를 대신하려는 자들은 매번 그 먼 길을 혼자 가보겠다고 무리한 행장을 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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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세포수 1등급, 세균수 1A..." 딸이 아침에 먹는 우유 제조사의 카피다. 사람은 음식을 먹을 때 세균도 함께 먹는다. 몸이 정교한 체계에 잡혀 있듯 영혼도 주의 법에 꽉 잠겨 있다. 몸 안에 있을 때만 그 영혼의 해방을 위한 협상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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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음식 쓰레기장에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가 가끔 도저히 이 세상에서 나는 냄새라고 하기 어려운 초자연적인 악취를 경험한다. 냄새도 스스로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단연 최상의 실력이 발휘된 현장 같다. 이것조차도 지옥의 악취에 비하면 향내와도 같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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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을 존경했는데 더 이상 존경하지 않게 되었다면 그 마음을 못 전해줄 것 같다. 그가 스스로 그 이유를 알게 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예의일 것 같다. 그가 그 이유를 끝내 모른다면 내가 존경했던 그의 모습은 처음부터 나의 오해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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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와 친밀해지려면 그를 대할 때 나 아닌 다른 나가 되어선 안 된다. 그에게 맞추려고 일부러 다른 사람이 될 부담이 없어야 한다. 서로 간에 친밀함의 재료는 각자 있는 모습 그대로다. 다른 사람이 되면 나중에야 탄로나서 친밀함을 거꾸로 다 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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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교회나 기독교 단체에서는 은연중 엘리트주의 분위기가 많다. 세상에서 높게 보는 학벌이나 명예, 부가 교회에서도 그대로 통한다. 자연히 한 사람의 가치는 사회적 지위나 얼마나 똑똑하고 부유한지로 측정된다. 세상에 중독되면 교회조차 영혼을 못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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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한 사람을 전도하려고 우리 교회가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한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내가 곧잘 건네는 말이다. 교회가 세상 단체처럼 사람 끌어모으는 데 관심이 많아지면 차츰 한 사람을 놓친다. 한 사람이 교회이기에 결국 교회를 점점 놓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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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면 지옥 갑니다. 그래선 안 되죠." 이렇게 말하면 "지옥 가는 게 내겐 그리 큰 탈이 아닌데요"라고 대답할 듯한 이들이 많다. 죄인을 지옥에서 건지려고 그 크신 하나님이 벌레처럼 작은 나와 같은 몸을 입고 오셨는데도 별로 대수롭지 않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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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빌 2:21). 요즘은 이런 말씀들이 폐부를 찌른다. 자기 일을 구하면 자기를 위해 건드릴 것과 말 것을 잘 피해간다. 하나님의 일은 생명과 관련 있고 자기 일은 생존과 관련 있다.
68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마 11:17). 주님이 어떤 심정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이제는 조금 이해가 된다. 세상의 매력과 마력이 얼마나 강한지 다들 거기에 마음이 팔려 영원한 가치는 늘상 부차적인 걸로 돌린다.
69
"인생에서 끝까지 안 떨어지고 마음을 붙잡는 것이 명예욕인 것 같다." 한 목회자의 고백이다. 사탄은 명예를 추구하도록 만들어 순진한 사람들을 타락시키는 미끼로 삼는다. 천국에 가면 이름 없는 자들이 큰 자가 된다는 걸 내내 눈치 못 채도록 속인다.
70
주님은 내 마음의 깊은 동기를 보신다.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그 일을 왜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나를 위해, 내 영광을 위해 일할 때 나는 눈물나지도 않고 감동도 못 느낀다. 정말 하나님나라와 영혼들의 안위를 위하려면 왜 일하는지를 늘 점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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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 해이해진 이들에게 위로만 남발하면 역효과가 난다. 세상살이가 힘든 건 말씀대로 살아서가 아니라 말씀대로 안 살아서다. 그 삶의 고통을 놓고 말씀으로 위로만 하면 반창고만 바르는 격이다. 죄 짓기 쉬운 사람들에게 성경은 자주 책망함으로 사랑한다.
72
개인적으로 맨정신으로는 칼빈주의의 절대 이중예정론을 믿기 어렵다고 느낀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아무 이유 없이 어떤 사람은 천국, 어떤 사람은 지옥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면 그분은 그 결정을 이루기 위해 죄와 타락을 조장한 정말 요상한 신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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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신자가 되고 나서도 행함이 있는 믿음 여부에 따라 최종 구원 여부가 달라진다고 가르친다면 칼빈주의 5대 교리의 전 체계는 수정이 불가피하다. 점진적인 계시의 혜택을 누리는 교회가 5백년 전 교리를 그대로 견지하는 것이 정상적인지도 의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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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선물이지만 믿음을 지켜나가는 성화에는 각자의 대가 지불이 따른다. 신자는 자기 몸을 쳐 복종해야 하고 불로 연단한 금을 사야 하며 의로운 행실의 예복을 입어야 한다. 그러나 대중들은 이런 요구를 하는 교회 대신 야들야들한 교회로 빠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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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때에는 예수님의 몸인 교회에 참여해 있는 것이 영적 생명에 아주 중요하다. 가나안 성도들은 다시 한 공동체를 이뤄야 영적으로 산다. 그들이 어느 교회에 속하느냐가 중차대한 줄 알았다면 스스로 그런 공동체를 이뤄야 한다. 흩어져 있으면 다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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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여정에는 "이만하면 됐지" 하는 게 없다. 끝까지 가야 한다. 끝까지 충성하며 갈 마음이 있는 사람만이 중도의 고난에도 안 흔들린다. 그 고난도 끝이 아니란 걸 알아서다. 끝까지 갈 마음이 없으면 중도의 고난이 전부가 되어 그쯤에서 엎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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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구, 미워 죽겠어, 정말!" "어이구, 너무 이뻐, 진짜!" 서로 모순되는 말 같지만 둘 다 정말인 게 부부 사이다. 근데 그리 미워 죽겠는 그것이 한 번만 뒤집으면 이뻐 죽겠는 것이다. 내가 결혼생활을 해오며 늘 신기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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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무원의 경솔한 말 한마디로 온 나라 민중이 들썩인다. 행동도 중요하지만 말이 훨씬 더 중요하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거나 살린다. 말 한마디로 정말 천 냥 빚도 갚는다. 사람살이가 먼저는 다 말로 이뤄진다. 생각과 말과 삶은 결국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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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교회 목회자의 가장 큰 덕목은 위신이나 자존심을 내세워선 안 된다는 것이다. 진리에 대해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권리를 갖는 대신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자주 낮아지고 깎여지고 자기가 없어야 한다. 하나님은 공평하셔서 둘 다를 동시에 주시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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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교회 목회를 해보니 삶에서 웬만한 건 넘어설 여력이 생기는 듯싶다. 작은 목회인데도 있을 건 다 있고 겪을 건 다 겪는다. 지나갈 때는 힘겨웠는데 지나고보니 그게 다 은혜다. 영적 근력은 그냥 생기지 않고 이렇게 무언가를 통과하면서야 생기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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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신자는 대인관계에서 나이가 따로 없다. 연세 드신 어르신이 믿음 안에서 어린아이처럼 한없이 소박하고 겸손한 성품과 태도를 보이시던 경우를 많이 경험했다. 하나님 앞에서 두 손 번쩍 들고 항복하며 사는 모습이다. 그런 이들밖에 없는 곳이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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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너무 느리게나 빠르게 읽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파스칼의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책이 너무 많아져서 빠른 속도로 읽지 않으면 정말 내내 나무토막으로 끝날 책들이 꽤 많다. 땔감이 필요없어진 시대에 읽히지 않는 책들은 겹으로 무용해지고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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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관심사는 죄와 구원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는 듯 보인다. 그 일을 위해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복음을 전하신다. 그런데 오늘날 그 성경을 해석한 책들은 광의의 복음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예수님이 오히려 그 해석을 낯설어하실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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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죄를 깨닫고 돌이키는 회개와 믿음으로 이뤄진다. 지식은 이 회심의 과정을 돕는 데 꼭 필요하다. 그러나 지식이 진실한 회개로 이끌지 못한다면 너무 멀리 나갔거나 도리어 구원에 해가 된다. 지식을 추구하고 쌓을수록 참구원에서 멀어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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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이후에도 회개의 삶은 여전히 중요하다. 신자를 위해 예수님은 영원한 속죄(히 9:12)를 이루셨다. 그 은혜로 인해 믿음 이후 죄를 지어도 자백하고 회개하면 죄 씻음의 효력이 지속된다(요일 1:9). 이 은혜를 방종의 기회로 삼는 자는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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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아는 것이 구원의 기초다. 회개도 믿음도 순종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거룩하심과 존엄을 알아야 가능하다. 성경에서 하나님이란 이름을 대할 때 그 실존적인 확고한 존재감이 내 가슴에 확 들어와 박혀야 한다. 그래야 내 하나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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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걸 모른다. 하나님을 안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 없고 그렇게 살 수 없다. 비신자보다 더 가망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기독교인들이다. 돌이킬 기회를 내내 스스로 막고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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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전기를 읽으며 한 가지 발견한 사실은 그 당시에도 세속적인 신자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빌라델비아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항상 있었다. 다만 빌라델비아교회 시대는 실제로 부흥이 대세였던 교회사의 복된 정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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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디게아는 '사람들의 의견, 정의'란 뜻이다. 마지막때의 라오디게아교회 시대에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교회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교회로 선명하게 나뉜다. 종말에 깨어 있고 행함 있는 믿음을 중시하여 삶의 거룩을 추구하는 이들의 모임이 후자다.
-안환균 목사의 트위터, 페이스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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