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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형교회 무용론에 반대한다. 큰 교회나 작은 교회가 다 주님의 교회요, 각자의 역할이 있고, 서로 동역의 관계이지 경쟁 관계도 아니다. 그러나 대형교회가 고난의 십자가보다 기복만을 부추기고 종말에 깨어 있지 못하는 것으로 커간다면 점점 무력해질 듯싶다.
2
대형교회가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제자도를 강조하지 않고 사람의 종교성을 만족시키는 위안 차원의 가르침으로 커왔다면 마지막때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의 주역이다. 겉은 부요하나 속은 헐벗고 미지근한 교회에서 벗어날 길은 회개뿐이다(계 3:14-19).
3
아이들을 특히 예뻐하고 사람이 먼저라며 눈물로 공감해주는 대통령, 일상의 삶에서 몸에 밴 배려심이 공적인 자리에서도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지도자를 두었다는 건 큰 복이다. 문득 정치인 같지 않은 정치인, 목사 같지 않은 목사가 필요한 때인가 싶어진다.
4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눅 18:16). 유명 목사들 중 일부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울 만큼 카리스마가 쩐다. 무엇을 위한 카리스마인진 몰라도 어린 아이의 것이 아닌 건 분명해보인다.
5
"무단횡단의 종착지는 건너편이 아닙니다." "그깟 졸음에 목숨을 거시겠습니까?" 도로에 내걸린 현수막 구호들이다. 죽음 이후 무엇이 기다리는지를 안다면 이런 표현조차 너무 여유롭다. 빨리 죽는 것도 손해지만 그조차 사후의 영원한 손실에 비하면 약과다.
6
하나님이 일부러 길을 좁게 만들어 천국 길이 좁은 게 아니다. 사람들의 타락한 죄성이 그토록 완고하고 악해서일 뿐이다. 소수의 남은 자들만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해서 주님이 불공평하신 게 아니다. 공평하신 그분이 불의하게 비칠 만큼 사람이 악한 것이다.
7
"피와 같이 붉은 죄 없는 이가 없네. 십자가의 공로로 눈과 같이 되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예수님의 피, 십자가, 죄에 대해 수십 년 연구해도 실제로 그 피로 죄가 씻겨지는 역사가 없다면 구원은 없다.
8
하나님과 친밀하지 않은 것이 죄다. 사람끼리도 친밀하지 않으면 불편하고 말 섞기도 어색하다. 기도의 목적은 주님과의 친밀함이다. 요청의 기도 또한 친밀한 관계에서만 효력이 있다. 기도를 통해 주님과 친밀함을 지속해나가는 것이 거룩함의 최대 비결이다.
9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한 교회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죽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가 번듯해도 말씀이 죽어 있다면 그 교회는 살았어도 죽은 목숨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하트에 담겨 있는 최고의 보물인데, 말씀은 그 보물을 드러내는 유일한 빛이다.
10
초대교회 당시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전도의 컨텍스트에서 외국어로, 고린도전서 14장은 교회의 컨텍스트에서 알지 못하는 영의 언어로 언급된다. 그래서 그 두 종류의 방언은 동일한 외국어일 수 없다. 신자들만 있는 교회에서 외국어로 전도할 이유가 없다.
11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 방언이 시종일관 외국어였다면 알아 듣는 자가 있다. 성경을 교리주의로 재단하는 극단적 칼빈주의의 방언 중지론은 큰 오류다.
12
교회가 후원하는 인도 선교사님의 선교 보고에 주의 큰 은혜가 있었다. 수많은 영혼들이 우상을 섬기고도 태연하게 살아간다. 이렇게 좋은 여건에서 신앙을 가진 우리에게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10)는 주의 음성이 들렸다.
13
한국교회에도 이제 실력을 갖춘 합리적 중도 보수가 많아졌으면 한다. 대형교회 중심의 보수와 사회 참여적 진보가 너무 한 쪽으로 치우쳐 있는 듯한 현재의 지형이 개선되어야 한다. 기복주의 대신 종말을 경고하면서도 상식적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균형이 필요하다.
14
정치나 사회 문제에 관심 갖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러다가 영적인 기초도 없이 마냥 시류에 떠내려갈 영혼들을 양산하거나 방치할 수 있다. 개인 구원과 영성의 문제가 훨씬 더 복잡하고 절박한 영혼의 문제라는 걸 사회가 깨닫게 할 책임도 여전히 교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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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로 구하는 대로 다 응답된다면 오히려 나에게 해로울 수도 있다. 응답되지 않는 기도가 때로 나에게 가장 큰 응답인 이유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만이 응답된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기도의 가장 큰 목적은 주님과의 교제를 통한 나의 성숙이다.
16
"그깟 지옥 가는 게 무서워 벌벌 떨고 살아?" 이렇게 말하는 자는 거룩이 주는 기쁨과 자유를 모른다. 신앙의 참된 자유함은 거룩함을 통해서만 온다. 죄에 얽매여 있는 것보다 온전히 벗어나는 게 결국에는 더 쉽다. 죄에 미련이 많은 자는 죄의 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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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지옥의 엄중함을 모르는 자들은 이 말씀의 위대한 가치도 잘 모른다. 알고 나서도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요 15:5)이란 지속적인 순종의 조건 안에 거해야 한다.
18
내가 주를 위해 섬긴 사역들은 정말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거라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도중에 내게 전도용 책들을 쓴 것 자체가 큰 상급이라고 알게 해주셨다. 그 책들을 통해 구원받을 영혼들이 내 상급이라신다. 주님만 주실 수 있는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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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벧전 3:20, 4:18). 천국 갈 줄 착각하는 신자는 많아도 실제로 천국 가는 의인은 아주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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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생명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적고(마 7:14),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다고 경고한다(눅 13:24).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천국 길이 그럭저럭 넓고 쉽다고 믿고 산다. 지옥에 가서 아무리 목회자나 교리 탓 해봐야 소용없다.
21
지옥은 인간의 머리와 논리로는 도저히 다 이해되지 않는다. 지옥을 인간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곳으로 뜯어 고치려는 게 배교다. 지옥을 말하지 않고 이땅에서 하나님나라만 강조하는 자들도 비슷하게 위험하다. 그들은 지옥을 올바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22
지옥에 가는 사람들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다 안 믿고 자기 좋은 대로 믿는다. 성경에는 신자들도 지옥에 갈 수 있다고 경고하는 말씀들이 참 많은데 다 흘려 듣는다. 심판대에 가서야 그런 말씀들을 확인하게 될 사람들은 실은 성경을 하나도 모르는 것이다.
23
이땅에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절대로 지옥만은 가서는 안 된다. 이런 경계심을 가진 자와 안 가진 자의 삶의 태도는 180도 다르다. 여기서부터 시작되지 않는 경건이나 하나님나라 지식은 결국 자기 자랑이나 허세로 끝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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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 대해 충분히 경계하거나 미리 생각하기 싫어하는 걸 사탄이 아주 좋아한다. 하나님이 아주 강조하는 걸 사람이 제맘대로 경시해서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좇아 살다보면 자연히 지옥이 멀어진다. 이땅에서 지옥을 곁에 두고 사는 사람이 지옥에 안 간다.
25
죄인에게 영원한 지옥이 그토록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면 무한광대하신 하나님이 사람으로 이땅에 안 오셨을 것이다. 지옥을 심상히 여기는 건 실은 하나님의 성육신을 심상히 여기는 것이다. 지옥만 강조하는 건 과한 일이지만 지옥을 경시하는 건 엄청난 배신이다.
26
목회자로서 주께서 내게 맡긴 한 영혼이 지옥에 안 가도록 깨어 있게 하는 것보다 더 중대한 일이 없다. 그 일로부터 모든 사역이 우러나온다. 주님이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한 영혼을 실족시킨다면 천하를 다 얻는다 해도 주께 내놓을 자랑거리가 못 된다.
27
나를 포함해 이 시대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는지 모른다. 작은 한 영혼을 주께 대하듯 섬긴다는 것도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의 방편이다. 이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자기 스스로에게나 다른 영혼들에게 끊임없이 지옥을 경계시키는 길밖에 없다.
28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면서 천국 가려는 자들은 가짜다. 주님이 내 중심을 아는데 모르는 줄 아는 자들은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기에 딱 좋은 바보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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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라도 하나님이 싫어하는 모든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역사 이전에 개인에게는 종말이 언제든 찾아온다. 기독교 신앙의 진정성은 참된 회개에 있다. 회개하지 않으면 구속의 은혜를 욕되게 하며 하나님을 이용해 자기를 높이는 장사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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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성경은 생명을 얻게 해주는 책이다. 성경 교사들은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기보다 그에 대한 지식만 추구하다 말 수 있다. 생명 없이 배우거나 가르치는 걸로만 끝나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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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너무 착해 보여 사회의 여러 기득권층들에 휘둘릴까 염려된다. 착한 사람과 착한 대통령, 좋은 사람과 좋은 정치인은 다를 수 있다. 어쨌거나 지금은 대통령이 낮은 자의 모습으로 국민과 함께하려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부디 이 초심이 변함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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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하기보다 약한 자에게 자애롭고 강한 자에게 엄중한 대통령이 된다면 억울한 사람들이 줄어들 것 같다. 능력도 중요하지만 인품이 더 중요하다고 느끼는 건 사람들의 사정을 살피는 중심에서 좋은 정책들이 나올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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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미세먼지 좋음'이란 예보를 접하고 묘한 기분이다. 미세먼지가 좋을 리가 없는데 지금은 다들 무슨 뜻인지 안다. 딸이 미세먼지 농도는 달이 희뿌연지를 보면 금세 안다고 예보해준다. 문득 달이 핏빛같이 변한다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오버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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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은 조급함에 있지 않다. 충동적인 결정은 사탄의 장난이나 훼방에서 비롯된 것이기 쉽다. 하나님의 뜻은 오랫동안 인내하고 기도하며 심사숙고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버티고 밀고 당기는 일이 자연스러워져야 그분의 뜻에 익숙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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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교회에서 영적으로 안 채워지는데도 다른 목적으로 그 교회에 계속 머문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교회를 더 중시하는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다. 교회의 가치를 절대시하는 목회자는 각 신자가 하나님과 함께 누려야 할 자유를 본의 아니게 억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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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선은 완전한 나라, 온전한 왕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이 다 부족했던 건 진짜 왕으로 오실 메시아를 더욱 소망케 하는 일종의 무대장치였다. 모든 통치자와 국민의 이상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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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지하는 대선 후보와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유권자를 형편없는 사람이라도 되는 양 취급하는 성향이 클수록 진정한 민주 사회의 분위기와 거리가 멀다.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스스로 훼손하는, 나만 옳다 하는 독단이 점점 옅어져야 성숙한 민주 시민이다.
38
내일 종말이 와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 메시아 나라의 도래를 소망하는 종말적 신앙은 거룩한 삶을 위해 세상으로 더 들어가게 한다. 날마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회개의 삶 또한 게토화된 교회가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서 치러내야 할 영적 전쟁이다.
39
교회에서 주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맡은 설교자의 직분은 실로 특별한 축복이다. 무엇보다 설교자 자신이 말씀을 준비하며 연구하는 중에 받는 은혜가 크다.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에 은혜를 부어주시려고 먼저 설교자를 말씀의 지식과 지혜 안에서 자라게 하신다.
40
이번 대선을 거치며 기독교 좌파의 성향이 도드라졌다. 그들은 신자의 정치 참여를 강조하면서도 천국과 지옥엔 입을 다문다. 세상의 인본주의적 좌파의 눈치를 보느라 성경적 종말도 상징으로 일괄처리한다. 그들은 복음을 반밖에 안 믿는 세미 기독교인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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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추구하는 자연과학과 가치를 추구하는 인문과학이 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다. 피조세계를 관리하라는 문화 명령에는 정치 영역의 연구와 참여도 포함된다. 다만 내세는 기독교인만 제대로 탐구하고 대비할 수 있다. 타락 후에는 이 또한 중요한 문화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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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한국교회는 선교 명령에는 열심을 내왔지만 문화 명령에는 그닥 큰 관심을 두지 못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이 두 가지 명령이 균형있게 수행될 때 온전히 전파되고 부흥된다. 종교성만 강하고 사회성이 약한 토양에선 교회가 세상에서 고립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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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주의 재림시에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살후 2:1) 쉽게 동심하거나 두려워 말라고 했다. 교회가 환난 후 휴거된다면 두려워 말라는 권면이 불필요하다. 배교와 적그리스도의 등장이 진행중인 평화와 안전의 때에 홀연히 휴거가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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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환난 전에는 휴거가 없다거나 환난 자체가 없이 주의 재림시에 형식적인 마중 차원의 휴거가 있을 뿐이라고 믿는 무천년설자들은 휴거 이후 이땅에서 전도자의 사명을 맡은 것인지 모른다. 휴거를 기다리며 깨어 준비하는 다섯 처녀와 다른 길을 거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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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선에선 딱히 뽑을 사람이 없네." 연세 드신 장모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다. 그래도 하나님은 늘 뽑을 사람이 있으시다는 게 안심이다. 대통령은 딱 그 나라 국민의 수준만큼 뽑는다. 대통령이 자라는 만큼 그 나라의 국민과 역사도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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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도 무인 커피 제조기가 등장하는 4차산업혁명의 미래가 큰 관심사다. 성경을 아는 신자들만은 그 미래의 종말을 예측할 수 있다. 적그리스도의 전체주의 체제에서 매매활동이 표 하나로 통합될 것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이 미래의 성취에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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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들과 함께 섬긴 갓토크 콘서트 참석자들 중에는 과거에 교회를 다니다가 떠난 사람들, 자녀를 따라 교회의 전도집회에 나갔다가 어설픈 영접 분위기에 실망하고 맘을 돌린 사람도 있었다. 이전의 안 좋은 교회 경험이 전도의 큰 걸림돌이 되어버린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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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콘서트란 이름으로 전도집회가 열리니 이웃을 초대해오기가 더 쉬웠다." "카페라서 오히려 내용에 집중하기가 더 좋았다." 이런 피드백이 나오는 만큼 카페 콘서트라는 컨셉을 계속 살려 탈권위주의 시대에 맞는 쌍방향 소통 전도를 꾸려갈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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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주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영원한 구원을 정말 사모한다면 행함 있는 믿음에도 큰 관심을 품을 것이다. 이 거룩한 구원 외에 다른 뭔가에 마음이 가 있지 않다면 주의 가장 큰 관심사에 최우선적인 관심을 들일 것이고, 그분의 마음에 합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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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 있는 믿음의 중요성을 알게 된 이들은 주위에 적극적으로 이 진실을 알려야 한다. 이웃이 버젓이 사지로 끌려가는 걸 보면서도 자기만 살겠다고 침묵해선 안 된다. 그들의 핏값이 자신에게 돌아올지 모른다. 몰랐다면 몰라도 알고도 모른 체하면 큰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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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행함 있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건 또 다른 전도다. 특정 교리에 익숙해진 신자들은 아무리 말해도 성경 자체에 눈뜨려 하질 않는다. 애초부터 성화까지가 구원에 포함된다면 어떤 면에서 그들은 성경을 다 믿진 않으려 하는 비신자와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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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자가 사람들에게 존경받으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끝내는 주의 진실한 종이 못 된다. 주를 섬기는 듯하지만 결정적일 때는 자기애를 주님보다 더 앞세운다. 이런 경향은 성공을 거두게 되면 더 심해지는데, 서서히 자각 능력마저 둔해져서 더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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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보내는 문자에 물결 표시(~)가 있는가 없는가로 엄마 기분을 알아낼 수 있어요." 딸이 이렇게 말하길래 나도 맞장구를 쳤다. 너무 헤퍼도 실없어보여 우습지만 별 거 아닌 듯해도 작은 표시 하나의 여유가 갖는 커뮤니케이션 위력은 실로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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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의 맞수 경쟁 후보들이 훗날 어느 한 쪽의 손발이 되어 나라 살림을 분담하는 모습을 우리도 볼 수 있을까. 국민을 중시하고 국민을 위한 정부를 지향한다면 어려울 것도 없다. 자리가 없어도 국민을 위할 것 같은 후보가 대통령 자리에 앉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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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과 고난이 많고 손이 많이 가는 성도가 목회자에게는 큰 축복이다. 그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으로 돌보고 말씀으로 이끌면 설령 그가 제때 돌이키지 않는다 해도 주님께는 이미 가장 중대한 목양이다. 결과가 어떻든 곰처럼 그 자리만 끝까지 지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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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사람이 근심을 벗어나 평안해지는 것,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만이 기도의 목적은 아니다. 속사람이 강해져야 한다. 변화가 많고 통제되지 않는 환경은 기도의 불쏘시개다. 기도로 내가 강해지면 바로 그 나로 인해 환경이 달라지는 바로 그 응답을 누린다.
57
사람이 자기 의에 빠져 자신의 능력이나 업적에 우쭐해지기 시작하면 은혜의 생명과는 온데간데 없고 율법적인 선악과만 가득해진다. 이것이 저것보다 낫고 더 선하고 효과적이라는 논리에 차츰 숨이 막힌다. 나중에는 이래도 저래도 만족이 없고 자유함도 없다.
58
세상에서 믿음이 있다 하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다 하는 사람들은 가끔씩 은혜의 하나님이라며 적당히 하나님을 좋은 분인 양 달래놓고 사는 데 익숙하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걸 주시려는데 자기 것이 가장 좋다면서 늘상 하나님과 흥정하며 사는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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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매일 뭔가 계속 할 일이 있다는 게 감사하다. 하루도 짧고, 일주일, 한 달, 1년은 그 하루보다 더 짧은 듯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만만치 않지만 지나고 보면 힘들지만은 않다. 이 일들의 끝에 죽음이 아닌 영생의 시작이 있다는 걸 아니까.
60
"악인의 집에 아직도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미 6:10). 거짓으로 속여 쌓은 모든 부가 죄다. 겉은 멀쩡해도 그 부자들이 악인이다. 다들 검증이 있기 전에만 깨끗해 보인다. 자진 회개하면 압수수색만은 피할 수 있다.
61
일상에서 다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죄, 누구나 별 생각 없이 짓는 죄를 민감하게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회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참된 부흥이 임한다. 그 눈이 뜨이는 것부터가 평안의 시작이다. 이 주된 출처 말고 딴 데서 구하는 부흥은 사이비다.
62
기도하지 않으면 내 생각이 나를 주장해서 잠시도 쉬지 못하게 만든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생각과 그의 평강이 즉시 나를 주장한다. 기도하기 전과 기도한 후의 세상은 내 생각의 변화로 판이하게 달라진다. 기도로 내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세상도 안 바뀐다.
63
사람은 기도하지 않음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자기 의를 쌓아간다. 자기 의를 의도적으로 쌓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도하지 않으면 참된 구원의 확신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감각이 점점 무뎌져 나중에는 구원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으로 전락한다.
64
기도하지 않으면, 그것도 일방적으로 떼쓰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하고도 충분한 교제를 위한 기도에 마음을 쓰지 못하면 신자도 아주 건조한 무신론자처럼 살게 된다. 사람들이 보기에 온갖 능력을 다 갖춰도 일상에서 생명의 능력은 전혀 못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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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겉으로 보기엔 별 힘이 없고 실제로 세상 살아가는 데서도 딱히 별 용도가 없어보인다. 그러나 기도의 이런 특성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도를 사용하시는 이유다. 기도는 눈에 보이는 세상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정말 주님만 의지하는가를 재는 주된 척도다.
66
기도를 해도 기도가 잘 열리지 않고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이유는 내 생각과 욕심이 따로 있어서다. 기도 시간만큼은 하나님께 모든 걸 드리고 그분께만 집중해야 하는데, 그 시간에도 내 자아의 성취를 위해 기도마저 이용하려들면 기도를 해도 기도가 아니다.
67
요즘은 사람들마다 각양각색의 눌림을 당하고 산다. 비신자들은 그것이 영적인 공격인 줄 몰라 영적으로 풀 방법도 모른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도 왠지 마음이 무겁고 주눅들 때 기분 전환할 길을 찾으려 할 뿐 기도를 통해 먼저 영적으로 풀려 하진 않는다.
68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풀지 않으면 끝내 걷어지지 않는 마음의 침전물들이 많다. 상황따라 없어진 것 같고 더 이상 영향력이 없어보여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사탄은 기도로써만 해결될 것들이 많다는 걸 숨기려고 여러 고상한 대안들을 제안하는 데 명수다.
69
요즘 자전거로 한강을 건너 일터를 오가는데, 아침에 자전거를 거리에 그냥 세워놓고 잠깐 볼 일을 보고 나왔더니 할머니 한 분이 기다리고 계셨다. "자전거가 안 잠겨 있어 지키고 있었다"고 하신다. 각박한 인심 한가운데서 뜻밖의 선물 같은 한 마디였다.
70
그동안 진행된 대선 후보 토론회들을 자세히 보고 난 후의 느낌은 사람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의 어조와 표정, 태도도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한 사람의 분위기를 보여주고, 인품은 그 틈새로 새어 나오는 어떤 것이다. 인위적으로 숨기기 어려운.
71
교권주의와 교리적 바리새주의에 젖은 자들은 지금도 천국문 앞에서 자기도 안 들어가고 들어가려는 자도 막는다(마 23:13). 한 영혼의 영원한 구원에 행함 있는 믿음이 '오직 믿음'보다 훨씬 더 안전한데도 그 진짜 목양보다 자신들의 위상을 더 중시한다.
72
오늘날 허영심이 많은 목회자와 신자들은 참된 구원의 명예보다 세상에서 누리는 잠깐의 영화를 더 사랑한다.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고 천국에 무관심한 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건 거짓말이다. 위엣것을 구하는 삶이 우선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
73
이웃 사무실 사장님 한 분과 식사 교제를 했다. 내 허락도 안 받고 나한테 대뜸 "안 사장님!"이라고 하길래 '내 직업을 말해야지' 하다가 사업 이야기 듣느라 커밍아웃할 틈을 놓쳤다. 당분간 스파이처럼 신분을 숨긴 채 '친구부터 되어야지' 결심했다.
74
비신자들을 교회에 불러놓고 신자들이나 알아들을 말로 복음을 전하고는 예수님을 영접하라고만 하면 분위기에 이끌려 얼떨결에 신앙에 들어선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만나려면 내가 왜 죄인인지 알기 위해 나를 만든 창조의 하나님과 예수님이 누군지까지 알아야 한다.
75
사람들을 만나보면 내가 아무것도 없어도 대하기 편한 사람이 있고 뭔가 하나라도 갖고 있어야 할 것 같은 사람이 있다. 그가 정말 주님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면 내가 주님과 통하듯 그와도 통한다. 그런 사람과는 말이 안 많아도 금세 영혼의 친구가 된다.
76
각자가 지지하는 대선 후보가 누구냐에 따라 그를 검증하는 잣대도 느슨하거나 까다롭거나 한 것 같다. 대선 후보도, 그들의 지지자도 다 이런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신자들은 상대적인 차선을 뽑는 선거에 절대 신앙의 잣대를 함부로 들이대지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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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는다는 게 뭘까요? 다 안다는 생각. 권위를 따지는 습성." 기차에서 'ktx' 잡지를 읽다가 한 소설가의 말에 감동을 받았다. 좋은 소설가는 늘 헝그리 마인드를 가진 좋은 구도자와 통한다. 잠들어 있는 종교인들보다 훨씬 더 깨어 있고 총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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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자리는 시스템이 꾸려간다고 여긴 적이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인성에 더해 대통령 자신의 능력과 컨텐츠가 확실해야 그 시스템도 제대로 돌아가는데다 위기상황에서 큰 누수가 안 생긴다. 상징형 대통령 시대는 가고 실무형 대통령 시대가 오는 듯싶다.
79
김정은에게 서울은 보석이란 말이 있다. 그가 여전히 적화통일 야욕을 못 버리고 있다고 믿는 이들의 추측이다. 자신이 차지할 보석을 미리 망쳐버릴 만큼 어리석진 않으리란 이야기다. 북한의 무력 사용은 협박용이냐 실전용이냐에 따라 앞뒤 계산이 복잡할 듯.
80
중국과 북한 간에나 미국과 북한 간에 은밀한 협상이 진행되어 김정은 체제를 보호해주는 조건으로 북핵이 제거되는 수순을 밟는다면 그나마 차선이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구해야 할 것은 북한 주민들의 자유다. 이 일에도 공짜가 없다면 무엇을 지불해야 할까.
81
북핵 제거만을 위한 미국의 대북한 선제 타격이 성공한다면 북한이 한국을 보복 타격하기가 만만치 않을 수도 있다. 전면전은 그들로서도 체제의 운명을 거는 일이니까. 문제는 김정은 제거까지를 목적으로 한 선제 타격인데 그때는 큰 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82
한반도의 전면전이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가능성은 이스라엘과 아랍국들 간의 전면전이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될 가능성보다는 낮다. 중국이 지금처럼 북한보다 자국의 국익을 우선한다면, 국제사회의 묵인 아래 대북한 선제 타격의 후유증은 의외로 작을 수 있다.
83
대선 후보를 검증할 때 지금의 특별한 상황과 다른 이전의 평소 가치관이 어땠는지가 중요하다. 그에 따라 지지 후보가 중도에라도 달라질 수 있어야 정상이다. 한국의 특정 지역이나 진영처럼 어떤 일이 있어도 콘크리트 지지를 보내는 건 강박적인 비정상이다.
84
부익부빈익빈이 심각하지 않아 다 같이 잘 살고, 가난한 자들이 고생하지 않는 세상을 위하는 진보라면 지지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에서 진보 정권에 속한 이들은 진보의 가치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보수든 진보든 진짜가 되기가 쉽지 않다.
85
대통령은 그때그때의 시대정신이 무엇이냐에 따라 세워진 경우가 많았다. 이 시대가 변화나 혁신을 요구하는 분위기라면 그에 맞는 리더가 선호될 것이다. 당연시되는 분위기의 정권 교체로는 미약한 만큼 정치 교체의 혁신을 이룰 후보가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
86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눅 24:3). 세례는 나의 죄된 옛자아가 예수님과 함께 무덤에 묻히고 그의 새생명으로 다시 살아났다는 의미다. 신자의 죄는 자신의 시체가 이미 보이지 않는데도 여전히 시체를 끌어안고 살려는 고집 센 몸부림이다.
87
예수님의 역사적 부활의 효용성을 사회적 불의의 개선 여부로만 재려 하면 기독교 진리의 효용성에 회의감만 더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먼저 그 나라 백성에게 적용되는 새생명의 능력으로 드러난다. 영적 진리인 부활은 그 개인을 통과해야 효력이 난다.
88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눅 24:49). 신앙은 약속이 있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주님이 지정하신 자리에서 말씀 붙잡고 기다리는 것이 최선의 큰 믿음일 때가 많다.
89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는 계파, 패권 정치에 안주할 낡은 정치인 이미지가 있고, 안철수 후보는 개인 자질이 강점이지만 구태와 비슷한 독단적 이미지가 있다. 가만히 보면 그의 강점이 곧 약점이다. 누가 되든 국민과 더 소통하려는 자가 승자이길 바란다.
90
이번 대선에선 문재인, 안철수 후보 중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크게 염려되진 않는다. 그들의 장단점을 비교해볼수록 오히려 딱 부러지게 선택하기가 어렵지만, 둘 중 한 쪽은 절대로 안 된다며 기를 쓰고 말리는 것도 이상하고 신앙적인 모습도 아닌 듯싶다.
91
성경대로 옛자아가 정리되어가는 사람은 우선 착하다. 뭔가 이상해보이는 사람이 아니다. 그 내면에 연약한 것들로 인해 여전히 죄와 싸워야 할 것들이 있어도 그 지향점이 옛자아의 죽음에 있는 자들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도 겸손하고 착하며 또 그래야만 한다.
92
열심히 배우거나 섬기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형교회에 어중간하게 머물러 있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신앙생활이 교회생활만인 것도 아니고 문화적인 종교 소비자의 한 부류로 사는 것도 아니라면 대형교회 현상은 성경적으로 더 철저히 점검받아야 한다.
93
한국 사회를 좌파와 우파로 정치적 의도로 양분하여 어느 한 쪽을 기득권화시키면서 국민을 분열시키는 일은 이제 끝났으면 한다. 대통령은 이 부분에서 사회 통합을 이뤄낼 사람이어야 한다. 네거티브보다 생산적인 정책 대결로 대선이 치뤄지길 바라는 이유다.
94
목회자의 사역은 지성소에서 선포되는 설교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심방은 그 설교의 기조대로 성도들의 삶이 진행되는가를 확인하는 일이고, 양육과 훈련은 그 설교의 적용을 개인의 신앙에 구체적으로 확장시키는 일이다. 말씀사역의 권위와 효용이 목양의 기초다.
95
알러지 체질은 암에 잘 안 걸린다고 한다. 바깥의 이물질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곧바로 물리치는 체질이라서다. 죄악에 예민해 계속 죄의 길에서 돌이키고 돌이켜 주께로 날마다 가까이 가는 그가 곧 천국에 이를 자다. 죄는 몸 안에 쌓이는 해로운 이물질이다.
96
전 국민의 80퍼센트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찬성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의 절반 가량이 적폐 세력으로 취급된다. 정치인들의 필요에 따라 한때는 동지이던 사람들이 적으로 몰리는 격이다. 국민은 가만히 있는데 정치인들이 무작위로 이리저리 몰고 다닌다.
97
진보 기독교는 보수 기독교더러 한 쪽에 치우친다지만 그들 역시 세상에 치우치기는 마찬가지다. 교회 안에만 주로 집중하려는 거나, 내세와 종말은 경시한 채 교회 밖의 변혁만 지나치게 중시하는 거나 편중되긴 비슷하다. 두 길이 만나면서부터 좁은 길이다.
98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눅 23:33). 살이 칼에 살짝 베여도 큰 일인데,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십자가 사건에 대한 과장 없는 담담한 보도가 더 아프다. 그 길 말고 다른 길이 있었다면 담담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99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 여기서 나는 선택된 특정인만이 아니다. 자기 죄를 아는 죄인이면 다 이 나에 속한다. 죄 없는 자는 예수께 기억되지 않는다. 창조주는 모든 사람을 알지만 구주는 죄인만 기억한다.
100
대선 후보들에 대한 선호나 지지 양상에서 이른바 진보측이 보이는 편파적 시각이 도드라진다. 그들은 촛불집회가 자신들이 선호하는 특정 정당의 특정 후보만을 위한 것인 양 한 쪽으로 분위기를 몰아간다. 극보수 못지않은 또 다른 불통의 이면을 보는 듯하다.
101
전쟁이 나면 모든 생명 활동이 일시에 정지될 수 있다. 분단된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늘 죽음을 묵상하기에 좋은 지정학적 혜택을 한껏 누려야 마땅하다. 사람의 생명과 재산과 품위를 일시에 없이 할 전쟁을 늘 지척에 두고 더불어 사는 것도 큰 은혜다.
102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눅 23:31). 메시아를 거부하고 죽인 이스라엘이 당한 환난은 마지막때에 이방인이 당할 환난에 비하면 약과다. 전무후무한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현실을 무시하고 사는 것부터가 큰 환난이다.
103
부부싸움을 해봐야 진정으로 친밀한 관계가 뭔지도 경험한다. 부부의 친밀한 관계는 갈등이나 이견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차이에서 공통분모를 찾아가려는 의도적인 노력이다. 친밀함은 정적인 상태라기보다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에 끝까지 함께 깨어 있는 것이다.
104
작은 교회를 섬기는 목회를 감당하면서 짧은 시간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전까지 내가 배우고 경험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알게 해주신 듯싶다. 무엇보다 나의 부족함을 보았고 한 영혼의 소중함을 알았다. 그리고 이 둘을 보듬어주시는 주의 마음을 체감했다.
105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삶을 꺼려 해서다. 전적인 의탁의 강도나 양상은 처한 상황에 따라 개인별로 다 다르다. 그러나 신자라면 누구나 다 누릴 수 있는 특권이 흔하게 유실되고 있는 건 분명하다.
106
신자에게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섬김보다 더 가치있는 사역은 없다. 그것만이 세상을 이기는 유일한 길이다. 모두 다 한결같이 자기를 섬기려고 피땀을 흘리는 세상에서 신자가 자아를 내려놓는 일 없이는 하나님나라조차도 세상사람들만큼만 섬길 수 있을 뿐이다.
107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려놓는 일이 가장 큰 자유다. 그러기 전까지는 너무나 큰 굴레와 속박으로 보여 피하고만 싶은 그 일이 사실은 유일한 생명 길이다. 누구든 이 자기 부인의 십자가 제자도를 통과하지 않고는 적어도 진리가 주는 자유는 경험할 수 없다.
108
천국의 주 보좌 앞에서가 아니라 이땅에서 한없이 추한 나의 실체를 미리 알게 되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없다. 이땅의 보석을 구하는 자는 거기서 지푸라기만 남긴다. 내가 나로만 남으면 하늘에서 영원한 보석이 될 재료를 계속 엉뚱한 데로 빼돌리는 삶이다.
109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에 걸림이 되는 아주 작은 것 하나를 주께 드리면서부터 영원한 주의 생명이 내 안에 자라기 시작한다. 영적 세계에서 그렇게 작은 헌신의 과정 없이 엄벙덤벙 우연히 되는 일은 없다. 딴 거 욕심내지 말고 그것 하나만 보면 된다.
110
오늘 내게 주어지는 하루는 영원히 다시 맞을 수 없다. 그러나 천국에서든 지옥에서든 하나님 앞에서는 영원히 기억된다. 상이 되든 벌이 되든 그저 스쳐 지나가는 듯한 하루하루의 시간이 사실은 억만금보다 더한 무게로 날마다 차곡차곡 영원을 쌓아가고 있다.
111
자연 현상을 관찰하고 의문 가운데 문제 제기를 하며 여러 가정을 세워가며 추리해본 후 이론화하고 반복 실험을 거쳐 매번 동일한 결론을 얻을 때 비로소 과학 법칙이 된다. 무신론적, 유신론적 진화론은 이론까지만 있고 반복 실험은 불가능한 가설일 뿐이다.
112
10대는 철이 없고, 20대는 답이 없고, 30대는 집, 40대는 돈, 50대는 일, 60대는 낙, 70대는 이, 80대는 처, 90대는 시간이 없고, 100대는 '다 필요' 없단다. 인생이 계속 없다가 끝나는 이유는 인생의 진짜 주인을 못 만나서다.
113
"너희 반 친구들은 네가 어떤 과목을 제일 잘 한다고 하니?" "체육!" 이렇게 대답하면서 딸은 체육 시간에 애들이 자기랑 같은 팀이 되고 싶어 난리라며 자랑을 늘어놓는다. 체육 특기생이 될 것도 아닌데 싶다가도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CF를 찍는다.
114
하나님의 음성은 내 생각을 통해 들린다. 내 음성도, 사탄의 음성도 마찬가지다. 말씀과 기도에 더 많이 잠길수록 내 생각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더 많이, 더 선명하게 들린다. 그러나 주의 음성을 듣고 살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115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요 10:27). 내 안의 성령님을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하려는 거나, 주의 음성을 귀로 듣는 줄 아는 건 다 오해다. 온통 자아와 세상에 빠져 살아가느라 주의 음성을 못 듣는다면 주의 양으로 살아가길 포기하는 것과 같다.
116
요즘 같은 뉴스 과잉의 시대에는 주 앞에 맑고 깊은 영성을 지켜내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세상의 소리들이 아우성대듯 빗발칠 때 그 소리에 휩쓸리면 세상을 못 이긴다. 예나 지금이나 주의 음성은 똑같이 작고 세미한데 들을 귀는 점점 더 어두워진다.
117
인양된 세월호의 선체를 보면 왠지 모를 아픔이 목 언저리까지 올라오곤 한다. 박근혜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큰 잘못은 책임져야 할 부분에 대해 끝까지 반성하지 않고 진정으로 사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픔을 못 느끼는 정치는 더 이상 정치가 아니다.
118
목회자나 사역자들이 너무 자주 자기 상황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건 덕스럽지 않다. 힘들지 않을 줄 알고 사역에 뛰어든 게 아니라면 그 일을 맡기신 주께서 친히 해결해주실 기회를 사람들의 위로로 미리 막아버릴 이유가 없다. 사역자의 자존심은 주존심이다.
119
믿음의 열매가 없으면 처음 구원받을 때 경험한 믿음의 시작을 의심해봐야 한다는 말은 무책임하다. 자칫 맨날 구원의 시작만 확인하고 믿음이 깊어지는 단계로 더 못 나아가게 만들 수 있다. 구원을 이루는 삶으로 나아가게 하면 구원의 시작도 더 견고해진다.
120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회개다." 루터의 말이다. 진짜 회심은 진짜 회개의 열매가 입증한다. 구원의 시작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데 집착하는 이들은 회개의 삶으로 더 깊이 안 나아가고 늘 첫걸음만 잰다. 순전히 진짜로 회개하긴 싫어서다.
121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신자는 어떻든 교회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어야 한다. 교회를 안 나가는 가나안 성도들에게도 이는 신자의 최소한의 도리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을 무시하면 주님의 임재를 혼자서만 못 본 체하며 사는 것과 같다.
122
변증전도가 필요한 영혼들을 섬기려고 시작한 목회 역시 돌아보면 특수목회의 일종이다. 초기에 스스로 주제를 한정시킨 말씀사역만으로 보면 일반목회스럽지 않은 건 분명하다. 이런 교회도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지만 일반목회의 필요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123
대외적으로 글을 쓰고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일은 슬쩍 피해 가면서 만만한 이슈에만 무한정의 정의감을 들이대는 이들을 본다. 사람의 한계요 연약함이려니 하지만 자신들도 이 사정을 알고는 있어야 한다.
124
요즘 딸이 정말 중2병인지 말수가 부쩍 줄었다. 밥 먹을 때도 뭔 생각이 그리 많은지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며 별 말이 없다. 여전히 수다를 많이 떨 때도 있지만 어른이 이래라저래라 할 분위기가 아니다. 한 집 안에 무소불위의 권력이 점점 많아진다.
125
교도소에 갈 죄를 안 지어 평생 범죄의 심각성을 모르고 사느니 차라리 실수로라도 죄를 지어 '법대로'가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하는 게 나을지 모른다. 수의만 안 입고 감방에만 안 갇혔을 뿐 하나님 앞에선 모든 사람이 이미 사형 선고받을 미결수 죄인이다.
126
이번 대통령 선거에선 야권에서 누가 대통령 후보가 되든 정권 교체는 거의 기정 사실인 듯 보인다. 문제는 누가 진정한 정치 교체를 이룰 것인가, 누가 국민을 위한 인애의 정치를 펼칠 것인가다. 낡아빠진 좌우 진영 논리 역시 이제 정치 교체의 대상이다.
127
무언가가 옳다고 말하는 것과 그렇게 옳은 대로 사는 것은 다를 수 있다.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믿은 대로 행하는 것 역시 다를 수 있다. 둘 다 달라서는 안 될 일이지만 현실에선 상식처럼 통한다. 말만 하고 행함이 안 따르면 그 말은 없는 것과 같다.
128
"자연을 하나님의 더 큰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이정표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C. S. 루이스의 말이다. 아름다움은 피조물 안에 있지 않고 그것을 통해서 보일 뿐 본체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는 뜻이다. 피조물의 아름다움에만 빠지면 끝없는 갈증뿐이다.
129
막연히 시간이 좀 지나면 내 신앙도 좀 나아지겠지 하다가는 정말 시간만 간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별로 다를 바 없다면 내일이나 내년의 나도 그러할 것이다. 차이를 만드는 건 하루하루의 삶이다. 오늘 하루를 우습게 알면 더 나은 미래는 없다.
130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잠 15:22). 독재적 정치가 주변에 예스맨들만 모이듯 독재적 목회자 주변에도 거의 그러하다. 함께 의논하며 사람의 지혜를 모으는 것이 곧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지혜일 때가 많다.
131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눅 20:25). 이 말씀은 신자가 세상 일에 무관심해도 된다는 말씀으로 오용되기 쉽다. 그러나 가이사의 것만 가이사에게 바치기 위해, 그것도 잘 바치기 위해 세상을 더 잘 알아야 한다.
132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는 사람이 도저히 다 헤아릴 수 없다. 다 알 수 없다고만 말해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그 신비에 근접하는 것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간극을 메울 길은 그렇게 감탄하는 것뿐이다. 안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를 어리석게 여기는 바보가 된다.
133
너무도 흡사하게 서로 닮은 사람들은 그 둘을 지은 분이 한 분이란 사실을 열심히 선전하고 있는 셈이다. 엄마를 쏙 빼닮은 딸은 임신과 출산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철저한 관할 아래 진행되었다는 증거다. 우연히 닮기는 우연스런 창조보다 훨씬 더 어렵다.
134
"하나님이 나를 지옥에 떨어뜨리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리라." 로렌스 형제의 말을 이렇게 바꿔본다. "하나님이 나를 지옥에 버리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버리지 않습니다." 진짜 사랑 고백은 상대가 날 어떻게 대하든 거기에 좌우되지 않는 게 아닐까.
135
지옥에 안 가려고, 지옥 가는 게 두려워 하나님을 이용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을 마음 다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들을 계속 발견해나가는 게 신앙생활의 전부일지 모른다. 그 믿음의 여정에 하나님은 동행자이시지 방패막이가 아니시다.
136
작은 교회를 섬기며 자존심 상하는 일을 많이 경험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 일 자체가 내게 가장 중요한 목회였다. 이 사역으로 주님만이 높아져야 하는데 내가 높아지려 한 결과다. 목회는 이론이 아니고 늘 실전이다. 그 실전에서 승자는 주님뿐이어야 한다.
137
회개의 눈물이 말라버리면 말씀이 냉랭하고 십자가가 무덤덤해진다. 주께 대한 첫사랑이 식은 증거다. 티끌 만한 죄라도 눈을 부릅뜨고 직시하며 주 앞에 괴로워할 수 있는 자만이 큰 은혜를 받는다. 이것 없이 누리는 은혜는 가짜이거나 애매한 자기 최면이다.
138
나의 죄 문제가 실은 가장 심각한데도 타인들을 비방하는 것으로 나를 적당히 포장하고 넘어가려 하기 쉽다. 만만한 정치, 사회 문제들을 언급하며 나는 의인인 척 슬쩍 비껴간다. 하나님의 시선을 애써 피해 죄를 딴 데다 묻어가려 하면 성화의 희망이 전혀 없다.
139
각자의 삶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보다 더 중대한 일은 없다. 이 일을 가볍게 여기면 평생 진실한 예배가 무엇인지 모른다. 날마다 죄에 민감하고 회개의 삶에 깨어 있지 않으면 예배와 말씀에 많이 노출되어도 주님으로 인한 참된 평안과 기쁨은 없다.
140
세속주의의 영이 강한 요즘은 신자들도 세상이 구하는 좋은 것들이 좋은 것의 기준이다. 더 좋은 거 먹고 이왕이면 더 안락하게 살기를 원한다. 외적인 성취로 내면의 가난을 감추는 데 익숙하다. 자기 죄를 보는 만큼 더 보이는 십자가는 점점 더 흐릿하다.
141
하나님은 내게 돈을 벌라고도, 일에 성공하라고도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내게 그 무엇보다 거룩을 요구하신다. 작은 죄도 회개하여 하나님과의 연합을 방해하는 어떤 것도 다 걷어차버리라 하신다. 하나님께 나를 향한 이보다 더 큰 사랑 표현은 없다.
142
어떤 것이 참이라고만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전부라면 논리적인 변증만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격체로서의 하나님을 만나려면 올바른 지식과 함께 전인격적인 회개도 필요하다. 하나님은 논증의 대상이기만 한 무인격체가 아니시다.
143
믿음은 “하나님이 존재하며 예수님이 내 죄를 대속하셨다”는 사실을 단순히 믿거나 고백하는 것만이 아니다. 믿음은 인격체인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한 결과로 그분께 헌신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관계다. 그래서 믿음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삶이다.
144
“하나님을 믿는 진정한 믿음이란 하나의 존재방식에서 다른 존재방식으로 넘어가는 질적 도약이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이다. 신자가 과거의 삶에서 익숙했던 죄를 이기려면 죄보다 하나님을 택할 때 범죄로 누리는 쾌락보다 더 큰 기쁨이 있다는 걸 믿어야 한다.
145
짜증을 잘 내는 사람이 별 반성 없이 짜증을 잘 내며 사는 건 한마디로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이다. 믿음에는 신앙의 처음에 죄를 용서받기 위한 믿음도 있지만, 그 죄에서 벗어나기 위한 믿음도 있다. 하나님은 둘 다를 동일하게 보시고 똑같이 중시하신다.
146
죄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만 용서받는다. 어떤 사람도 선행으로 죄를 용서받을 순 없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만 죄에서 구원받는다. 그런데 이 구원은 구원의 시작이다.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은 순종의 삶을 통해 다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
147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신자로서 구원의 목적인 선한 일에는 무관심한 채 입으로만 신앙 고백하는 자는 사이비다.
148
“끝까지 믿음으로, 은혜로만 구원받지 않고 나의 행함도 요구된다면 기독교가 타종교와 다를 게 뭐냐?” 믿음 이후의 행함을 자력 구원의 행함과 혼동한 데서 나온 불평이다. 정말 죄를 회개하고 그 죄에서 건짐받은 신자는 행함으로 죄를 미워하며 살게 된다.
149
전도할 때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온 죄의 뿌리를 보게 하고 그 죄를 회개하도록 도와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 구원의 기본 도리다. 이렇게 구원의 길이 명확한 진리체계는 기독교뿐이며, 믿음 이후의 삶도 자력이 아닌 예수님의 인도로 진행된다.
150
성경은 신자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나서는 반드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한다. 열매를 못 맺는 가지는 불에 던져 사른다고 경고한다(요 15:6). 그러나 한 번 잘못 입력된 신앙관은 회개의 열매보다는 늘 회개 자체의 효력에만 기댄다.
151
믿음 이후에도 주께만 의지하는 믿음이 참된 순종의 삶을 이룬다. 무인격체인 특정 사실만을 믿는다면 인격체인 예수님을 계속 따라가며 의지하는 순종의 믿음이 필요없다. 구원받는 믿음은 인격체에 대한 전인격적 믿음이어서 반드시 인격적인 순종의 삶이 따른다.
152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신앙 고백만 일회성으로 진실하게 하고 나면 구원 문제는 거기서 영원히 일단락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구원의 효력이 있다는 건 그분을 내 삶의 주인으로 믿는 것을 전제로 한다.
153
진짜로 믿은 자는 진짜로 순종하게 되어 있다는 말은 옳다. 그런데 이 말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믿음 자체가 가짜로 여겨질 사람이 아주 많아진다. 그래서 진짜로 믿은 자도 순종에 깨어 있지 않으면 믿음이 무력화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진실에 더 가깝다.
154
교회가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교인들의 공동체라면 그들의 결정으로 지도자를 뽑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습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교회가 실제적인 세습을 강행한다면 주님의 교회로서 떳떳하지 않다. 세습이 온당치 않다는 걸 스스로 공언하는 일이 되니까.
155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눅 17:26). 주님은 재림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며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일에 몰두한다고 예언하셨다. 사람이 사는 데 이보다 더 필수적인 게 있다는 경고다.
15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약 3:6). 요즘 같은 SNS 시대에 가장 흔하게 짓는 죄가 말을 함부로 하는 죄다. 자기 노선과 맞지 않다고 험한 말을 쉽게 내뱉는 신자들은 철저히 마귀에게 이용당하는 것이다. 혀는 작아도 정말 몸 전체를 더럽힌다.
157
작은 죄가 잡혀야 큰 죄도 잡힌다. 먼저는 눈에 보이는 죄, 곧 불평하거나 화 내거나 거짓말, 도둑질, 음란의 죄가 있다면 제거해야 한다. 그 작은 죄를 회개하지 않고 지속하면서는 더 깊은 죄를 볼 수 없다. 작은 죄에 민감해야 큰 죄에도 민감하다.
158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 17:19). 나병을 치유받은 자가 주께 돌아와 감사함으로 구원받는 믿음까지 인정받았다. 내 문제를 해결받는 일만 보면 치유한 분이 안 보인다. 구원은 일회성 치유 자체가 아니라 치유자를 알아보고 따르는 데 있다.
159
주의 말씀을 진정으로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말씀이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기쁨을 맛보게 해주신다. 순종할 마음 없이 말씀을 지식으로만 대하는 이들은 쉽게 느낄 수 없는 위로다. 말씀을 내게 맞추는 사람이 있고 나를 말씀에 맞추는 사람이 있다.
160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은 나 한 사람과 관련이 있다. 내가 그 말씀의 뜻을 다 몰라도 끊임없이 나에 대해 말해준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고 넓게 연구하고 묵상해야 하는 이유는 그 말씀에서 진짜 나를 찾고 하나님의 형상을 본래대로 회복하기 위해서다.
161
성경의 하나님이 나를 친히 만드신 분이 아니라면 성경의 말씀도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지명과 인물과 상황이 다 나의 여러 면모와 문제들을 조명해주는 무대장치들이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 설정이 성경 읽기의 기본이다.
162
말씀으로 나를 만드신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나를 다스리길 원하신다. 온 우주가 법칙인 말씀으로 지어지고 지금도 말씀으로 운행되는 이치와 같다. 내 존재의 DNA가 말씀으로 이뤄져 있는데도 말씀을 거역하려는 교만과 그에 따른 무질서와 곤고함이 곧 죄다.
163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있었더라면"(눅 17:6). 신앙 연수나 지식이 많아도 살아 있는 말씀이 내 삶에 계속 체험되지 않으면 믿음은 여전히 바깥에 있다. 믿음의 가치나 생명력은 자라는 믿음인지, 한 자리에만 머무는 믿음인지로 가려진다.
164
말씀묵상을 통해 주께서 그날 내게 일용할 양식으로 주시는 특정한 말씀은 묵상하기에 좋거나 유명한 말씀이 아닐 수 있다. 그날따라 특별하게 내 마음을 잡아끄는 말씀이다. 말씀의 외모와 상관없이 묵상의 불씨는 먼저 이런 화학 작용에 민감한 데서 지펴진다.
165
뭔 일로 밖에 나가면서 아내가 나한테 세탁기에 넣어둔 빨래를 꺼내 베란다에 널어달란다. 빨래를 널면서 언뜻 드는 생각. 아내는 내가 밖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집에서 작은 일 도와주는 걸 더 좋아하는 듯싶다. 그 생각 속에 아내가 싱글싱글 웃는다.
166
기독교 변증은 세상사람들이 궁금해하거나 물어볼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질문들을 놓고 애써 답해주려는 몸짓처럼 비치기 쉽다. 그래서 변증은 답을 전하기 이전에 사람들이 삶과 죽음에 대해 마땅히 가져야 할 질문들을 먼저 갖게 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167
불교에서 추구하는 구원은 한마디로 '내가 없어지는 것' 또는 '내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내가 온전해지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아 실현에 목을 매지만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면 끝내 갈증만으로 끝난다.
168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 하나님을 모르면 자신이 하는 일로 사람 중에 높임받기 원한다. 하나님을 반쯤 아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 미움받는 줄 알면서도 이땅에서 우선 사람 중에 높임받기 원한다.
169
세상에 기도처럼 무력해보이는 게 없지만 이것이 기도의 가장 큰 효용이다. 눈에 보이는 내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기도만큼 큰 고역이 없지만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바로 그 나를 꺾기 원하신다. 이 의도를 모르면 기도의 삶도 한참 멀기만 하다.
170
교회에서 모든 세대가 먼저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예배드리고 주일학교와 청장년 소그룹으로 흩어진다. 그래서인지 요즘 내 설교가 중학생이 들어도 이해할 만한 수준에 자꾸 맞춰져가는 듯싶다. 청중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설교에 재미까지 곁들이기가 쉽지 않다.
171
"오늘 설교 몇 퍼센트나 알아들었냐?" 설교하고 나서 아이들에게 가끔 묻는다. 때에 따라 30퍼센트에서 70, 90퍼센트까지 다양하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맘이 많지만 그래도 물이 빠지면서 콩나물이 자라듯 주의 말씀이 하나둘씩 심겨져 자라가길 기도한다.
172
설교에서 한꺼번에 많은 내용을 전해주려다 보면 시간도 부족하고 마음도 급해진다. 오히려 그 많은 내용 중 하나를 더 잘게 쪼개어 충분히 묵상하고 예화와 그림언어들로 살을 붙이고 더 깊은 영감을 구하면 설교를 준비하기도 쉽고 청중도 알아듣기 쉬워진다.
173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요 5:24). 성경에 나오는 주의 말씀은 다 최후 심판날에 판결문이 된다. 토씨 하나도 허투루 들어선 안 된다. 그 말을 그대로 듣냐 안 듣냐가 영생을 좌우한다.
174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은 내가 이땅에서 바깥에 있는 뭔가를 새롭게 얻고 이뤄야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미 내 안에 주신 보물을 잘 드러내면 된다. 하나님과 충분히 교제하면 그 얼굴 빛에 반사되어서만 그 보물이 빛을 발한다.
175
"대통령을 못 지켜드려 맘 아프다."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법치국가에서 대통령은 한 개인이 지켜드리거나 끌어내릴 수 없다. 법이 지켜주고 법이 끌어내린다. 지금 극보수는 애매한 정치적 논리와 감정몰이로 위법 또는 준법을 교묘하게 희석시키고 있다.
176
"이전 대통령들도 다 비선실세나 부정이 있었는데 왜 이제 와서 탄핵까지 하냐?" 비정상을 정상으로 봐주던 한국적, 제왕적 관행의 종식이 이번 대통령 탄핵의 또 다른 한국사적 의미가 아닐까. 대다수 국민 여론과 법의 판단은 이 지점을 가리키는 듯하다.
177
헌법재판관들의 8대 0 대통령 탄핵이 무얼 말해주는 걸까. 순전히 형사상의 잘못만을 놓고 진행하는 심판이었다면 이런 식의 만장일치가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 이번 대통령 탄핵 심판의 핵심 관건은 대통령에게 헌법 수호 의지가 있는가였다.
178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결정이 법치를 세우기보다 법치를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극보수는 자신들도 감당 못할 무리수를 두고 있다. 애초부터 헌법재판소의 최종 판결 말고는 무엇을 기준으로 법치를 세울 것인가에 대한 합당한 국민적 대안이 없었다.
179
사람은 자신이 보려는 것만 본다. 탄핵된 대통령의 한 쪽 면만 보면 탄핵이 억울할지 몰라도 다른 한 쪽을 잘 보면 탄핵은 국민의 심판이지 좌파의 선동이 아니다. 국민 통합이 필요한 시점에 극보수의 진영 논리는 특정 정치 세력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된다.
180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사람이 왜 끌어내리느냐는 기독교인들은 대통령이 법 위에 있는 줄 안다. 하나님의 법대로 하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란 말로 복음을 전하는 신자들은 하나님이 합리적 상식 차원에서 허락하신 국가법과 질서도 존중해야 전도의 모양도 살린다.
181
극단적인 태도는 진리에 가깝지 않다. 촛불이든 태극기든 극단적인 사람들은 욕설을 함부로 내뱉거나 반대편 사람에게는 인간에 대한 기본예의도 안 지킨다. 특히 신자들이 죽고 살 일도 아닌데 좌우파 논리로 형제 관계마저 가볍게 여기는 건 정말 도를 넘었다.
182
어떤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삶의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한 영혼만으로 그를 주께 대하듯 사랑하고 주의 마음으로 섬길 수 있느냐가 목회자의 최대 관건이다. 이것이 어렵거나 이런 고민이 없거나 경험조차 없다면 목회도 없다.
183
대통령 탄핵 결정으로 주의 뜻이 드러났다. 하나님은 좌우파 대립 논리로 체제를 염려하며 대통령을 지키려던 이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다. 신령한 확신범처럼 자의적으로 하나님의 뜻 운운하는 일이 때로 얼마나 무모한가. 이런 불통은 법으로도 못 잡는다.
184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판결문은 탁월한 명문이다. 조금이라도 훗날 꼬투리잡힐 만한 소지는 조심스럽게 비껴가면서 확실한 것 딱 하나만 잡아 누가 뭐랄 새도 없이 파면 도장을 꾸욱 찍어버린 느낌이다. 최후 심판날 하나님의 법정에서도 그러지 않을까.
185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거나 무언가에 분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내 안에 사탄이 역사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는 것이다. 사탄은 나의 합력 없이는 결코 나를 훼방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원수와 협력하는 반역에 호의적인 것이다.
186
내가 아는 나의 일들을 기도로 주께 아뢰면 그 일은 더 이상 나의 일만이 아니다. 그분도 알고 친히 관여하는 특별한 일들이 된다. 하나님보다 나를 더 믿고 살면 기도로 내 일을 맡기는 게 성가시다. 기도할 때만 느끼는 평안과 기쁨도 별로 아쉽지 않다.
187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종말주의자로 몰릴까봐 주님이 재림할 때가 가까울수록 세상은 더 악해져갈 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신자의 사명을 끝까지 다하면서도 종말을 경고할 수 있다. 무천년설은 종말의식을 막연하게 현재화하면서 실제적인 종말을 없앴다.
188
성경에는 거짓말이 없다.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과 교훈들이 다 사실이다. 사람들이 잘 모르고 믿지 않는다 해서 사실이 거짓말로 가치절하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 믿는다 해서 그분이 정말 안 계시거나 사실이 아니거나 거짓일 수 없는 것과 같다.
189
"다른 거 안 하고 말씀에만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가 너무 좋고 감사하죠." 한 교우가 내게 카톡으로 격려해준 말이다. 기독교 신앙 안팎의 주제로 나누는 변증적인 말씀사역과 성도들의 일상에 깊고 넓게 뿌리내릴 말씀묵상의 삶만으로도 집중할 게 너무 많다.
190
말씀을 사모하는 교회 공동체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 귀하고 사랑스럽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올바로 순종하는 일 하나에만 집중해도 교회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누군가가 불필요한 교회 일을 줄이면 교회가 보인다고 한 말이 맞다.
191
내 사역의 주된 목적은 기독교변증과 말씀묵상의 실체를 사람들의 삶에 적용하고 심화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돕고, 그 이후에는 그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돕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이 있을까.
192
이땅에서 신자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으려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주시는 도전 중에 단 하나라도 끝을 볼 때까지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믿음도 자란다. 이것저것 듣기만 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같다.
193
요즘 사람들은 어떤 진리 체계가 참인가를 보기 이전에 자신들의 실제 삶에 유익한가, 효과가 있는가를 재보려 한다. 기독교가 진짜라면 각자의 삶에도 유익하고 효과도 만점일 것은 분명하다. 이게 아니라면 그 기독교는 처음부터 기독교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194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세상에 고통스런 일들이 일어나고,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해 혼돈스러울 때 최선의 방책은 흔들림없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이다. 이 신뢰 관계를 통해 이겨낸 고통만이 신앙의 성숙으로 연결된다.
195
한 나라의 지도자가 자기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면 백성들이 정확히 두 쪽으로 쫙 갈라진다. 지도자 한 사람만 자신의 부족함을 시인하고 결자해지하면 애꿎은 백성들이 서로 싸우지 않을 텐데, 교회 지도자와 교인들의 관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듯싶다.
196
오직 자유민주주의 체제 유지만이 지고하고 유일한 가치라도 되는 양 다른 건실한 법치주의의 가치들에는 애써 눈감아버린 한국형 보수의 실체를 보며 실망했다. 진짜 보수는 섣불리 이념을 우상화하지 않고 합리적 상식과 양심에 부단히 깨어 있으려 하지 않을까.
-안환균 목사의 트위터, 페이스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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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최근까지 변증전도와 신앙생활을 주제로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나눈 단상들과 사진들을 한데 모았습니다. 짧게 쓰는 데 익숙해지는 것이 좋은 일인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어떤 모양으로든 예수님과 그분의 진리가 증언되길 바랍니다~
잘 읽었습니다. '팡세' 같은 단상을 좋아하는 제겐 딱이지요....
'없다 시리즈'와 맞붙을 '있다 시리'즈 한번 작성해 보심이 어떨지요..ㅋ
샬롬!
이렇게 많은 글을 잘 읽으셨다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사모님의 '호평'에 힘입어 저의 단상 변증을 '팡세 변증'이라고 명명해볼까 하는 생각마저 드네요.^^ 격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