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성사, 어디까지 고백할까요?”
가톨릭 신자라면 12월 성탄과 연말을 맞이할 때마다 배달된 판공성사표를 붙잡고 한 번쯤은 고민 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일종의 영혼의 ‘연말정산’이자, 가톨릭 신자로서 최소한의 의무를 채워야하는 판공성사이고, 그 동안 개별적으로 본당 신부님께 보기 힘들었던 ‘고해성사’를 여러 신부님들께 볼 수 있는 연말 ‘바겐세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해성사’란 말이 신앙과 무관하게 일반인들에게도 꽤 알려져 있는 가톨릭의 유산이지만, 정작 적지 않은 천주교 신자들은 고해성사를 여전히 부담스럽게 여긴다. 성사를 보더라도 부활과 성탄 전의 판공성사는 행여 냉담자로 오인되지 않기 위해 치루는 ‘의무방어전’인 경우도 많다. 한 달에 한 번 고해성사를 보도록 되어 있는 신학생들이나, 수도자들, 그리고 열심한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는 ‘은총만땅’의 성사이긴 하지만, 주일미사에 겨우 참석하고, 신자로서 의무만을 지키는 대다수의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는 여전히 짐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고해성사를 자주 보는 이들에게도 여전히 고민거리는 있다. 고해성사를 볼라치면 내 죄를 어디까지 고백해야 하는가이다. 물론 전통적으로 교회는 대죄에 한하여 고해성사를 보도록 되어 있다. 일상의 습관적인 죄와 부덕함에서 나오는 소죄들은 개별적인 참회나 미사 전의 통회의 기도를 통해서도 용서가 되지만, 보다 깊은 영적 성숙을 위해서 정기적인 고해성사를 통해 영혼의 치유를 체험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문제는 무엇이 성사를 볼 대죄이고, 무엇이 굳이 성사 때 고백하지 않아도 되는 소죄인지 판단하기가 애매하다는 것이다. 특히 판공성사 때와 같이 짧은 시간에 많은 이들이 성사를 봐야하는 순간에는 깊은 내적 통회 없이 고백해도 무난한(?) 죄들을 먼저 고백하고, 정작 고백해야 할 대상들은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로 넣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성윤리와 관계되어 고백하기 껄끄러운 죄들과, 행여 신부님이 들으시면 충격(?)을 받을 내용들은 배려의 차원에서 고백하지 않기도 한다. 굳이 내가 고백하지 않아도 하느님은 내 죄를 알고 계시고, 용서해주실 것이란 믿음 때문일까? 자기 죄는 고백하지 않고, 남의 죄만 열심히 고백하는 이들도 있고, 자신은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면서, 남을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판공성사 때 술 한 잔 마시고 들어와 넋두리를 하거나, 다짜고짜 죄만 고백하고 사죄경도 듣지 않고 나가버리는 사람도 있다.
사제인 나도 고해성사에 대해 별로 평신도와 다를 것이 없다. “중이 제 머리 못 깍는다”는 속담처럼, 신부들도 고해성사를 볼 때 누구에게 봐야하는 지 고민스러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고해성사가 단순히 죄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고, 영혼의 정화를 위해 어느 정도 상담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신을 지속적으로 지도해줄 영적 지도자에게 성사를 보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확실한 영적 지도자를 찾지 못한 나로서는 사제 피정이나, 특별한 기회가 되어야 성사를 보는 경우가 많다. 차라리 유학 시절에 독일어로 보는 고해성사가 맘이 편하기도 했다. 왠지 우리 말이 아닌 다른 말로 성사를 보면 내 죄가 좀 더 객관적이 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일까? 어째든 구구절절 아무 신부에게 내 죄를 나열하기에 사제이기에 더 부끄러운 점들이 많기도 하다.
우리가 고백해야 하는 ‘죄’란 흔히 주일미사를 빠지거나 금육재를 지키지 못한 계명에 대한 위반보다는 훨씬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근본적으로 죄는 사랑이신 하느님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내가 그 분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삶의 형태와 행위들은 모두 죄에 속한다. 십계명과 윤리적 계명은 물론, 하느님 없이 자기애에 빠지는 것, 그 분과 대화할 시간을 마련하지 않는 것들도 죄에 속한다. 더 나아가 같은 피조물로서 이웃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행위 역시 사랑을 거스르는 죄이다. 이웃을 미워하고, 속이고, 소외된 자를 돌보지 않는 것도 사랑을 거스르는 죄가 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고백할 죄의 내용 자체가 아니다. 고백할 내용이 하느님과 맺은 사랑의 관계를 ‘얼만큼’ 단절시켰는가를 성찰하는 것이다. 물론 성찰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이어야 한다. 하느님의 눈으로 나를 볼 때 참된 양심성찰과 통회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해성사는 단순히 죄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로 인해 내가 하느님과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회심 없는 고해성사는 결코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래서 가톨릭 신앙에서 죄의 고백은 저지른 죄의 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무한하신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참으로 사랑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한다. 연인 사이에도, 부부 사이에도, 친한 교우 사이에도 반복되는 미움과 분노는 자신의 탓보다는 상대의 탓을 많이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역시 수 없이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깨닫는 것은 상대의 변함없는 사랑을 느낄 때이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는 참된 죄의 묵상은 오롯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 없이 가능하지 않다고 하였다. 죄는 본래 이기적 자기애와 자기 합리화로는 결코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행여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그것은 수치의 대상이지, 결코 용서의 대상은 못 된다.
고해성사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엄청난 사랑 때문에 내 죄와 부족함을 고백할 용기가 생기는 자리이다. 많은 이들이 고해성사 때 눈물을 흘리는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수치심 때문이 아니라, 나의 부끄러운 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나를 받아주시고, 용서해주신다는 기쁨 때문이다. 고해소에서 흘리는 눈물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눈물이다. 그 눈물의 맛을 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가톨릭 신자만이 누리는 고해성사의 대박을 누리지 못한다.
그래서 고해소를 찾아오는 신자들의 발길은 아름답다. 여전히 고해소를 찾는 일이 두렵고 떨리겠지만, 고해하기 위해 시간을 내고, 장시간 성당에서 기다리는 마음조차도 하느님께서 일으켜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물로 솔직한 고백을 하는 신자들을 만나면 먼저 하느님께 감사가 터져 나온다. 냉담의 기간이 긴 신자를 고해소에서 만나면 ‘대박’을 건진 느낌이다. 이유가 어째든 고해성사는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사제라면 누구나 고백을 듣는 고해소가 사제 스스로의 ‘양심 정화소’가 된다는 사실도 알 것이다.
올 해의 연말 정산을 위한 판공성사가 의무방어전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 때문에 흘리는 ‘눈물 체험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제인 나도 그런 체험이 그리워진다.
송용민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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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백성사에 대하여 참으로 아름다운 묵상을 해 주신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그런데 전 처음에 제목이 '고해성사, 한국에만 있는 판공성사제도'라는 말에 끌려서 왔는데 정작 내용에는 그런 말이 없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