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강 기슭에서/고정희
위로받고 싶은 사람에게서
위로받지 못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의 두 눈에서는
북한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서로 등을 기대고 싶은 사람에게서
등을 기대지 못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의 두 눈에서는
북한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건너지 못할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미루나무 잎새처럼 안타까이 손 흔드는 두 눈에서는
북한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상에 안식이 깃드는 황혼녘이면
두 눈에 흐르는 강물들 모여
구만히 아득한 뱃길을 트고
깊으나 깊은 수심을 만들어
그리운 이름들 별빛으로 흔들리게 하고
끝끝내 못한 이야기들
자욱한 물안개로 피워올리는 북한강 기슭에서,
사랑하는 이여
내 생애 적셔줄 가장 큰 강물 또한
당신 두 눈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연가(戀歌)/고정희
아픈 머리에 열이 가라앉고
창마다 환하게 불빛 고이는 저녁
겨울 난롯불에 내 혼을 쬐며 고린도전서 13장을 펴면
내 진실의 계단 어디쯤서 너는 오고 있는가
어둠을 쓰러뜨리며 난롯불은 조금씩 내 피를 덥히고
꿈틀이며 꿈틀이며 타고 있는 글자들
구름이 가는 곳을 묻고 싶은 황혼쯤
엉겅퀴 울타리를 밟고 가는 바람처럼
내 안에 서걱이는 한무더기 공허
한무더기 공허로도 비칠 수 없는 얼굴
불심지 휘감아도 살속 캄캄한 어둠 목구멍을 채우네
지구 가득 부신 햇빛 부려놓고
노을을 물들이는 태양이여,
산마루 넘어가는 태양이여,
눈은 눈으로 구름은 구름으로 떠나고 있을 때
나무들 우쭐대는 진종일 바람은 바람으로 만나고 있을 때
내 깊은 눈물샘 어디쯤서 물그르매
물그르매 번쩍이는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