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 초여름 신영복의 형 "영대"씨 로 부터 전화가 왔다.어머님이 보고 싶다니 우이동 집에
좀 다녀 가라는 것이었다. 며칠후 그집에 방문 했더니 그의 어머님이 화투 패를 떼고 계셨다.
"무슨 좋은 소식을 점 치고 계십니까?" "영복이 언제 나오나 하고 해 보는 거네"
"나는 팔십이 넘었으니 지금 죽어도 나이가 억울 한것은 없지만 영복이가 나오는 것을
못 보고 죽으면 나도 안타깝지만 내가 없으면 자기는 얼마나 기가 막히겠나?""다행히
금년 여름 안에 출소 한다는 소식이 있어 영대가 우리 두 노인과 영복이가 살수 있도록 집은 적고
높은 지대에 있지만 백운대.인수봉이 잘 보이고 전망이 좋아 기분이 확 트이는 곳에 장만 해 주었네.
내가 소원이 있다면 영복이 친구의 신발 이 현관에 꽉 차도록 와서 그들의 웃음 소리가 넘쳐나면 20년의 한이 한번에 날라 갈것 같은데 자네가 역할을 좀 하겠는가" "어머님 걱정 마세요 나오면 날짜만 잡아 주세요."
그리고 몇 달 후에 출소해서 집안이 꽉 차도록 친구들이 모였다.
그의 어머님이 친구들 앞에서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라고 하셨다.
그후 그를 만나면 "나도 이제 제2의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데 집에서 백운대를 바라보면 희망과 용기가
생기는것 같고 "우이동"이 제2의 고향같은 푸근함도 있고 나의 일생 에서 특별한 곳 이라 생각된다."
라고 했다. 그의 이야기를 종합 해 보면
그런 이유로 아호를 "쇠귀(牛耳)"라고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추석이 오면 신영복이 더욱 생각 난다.대학생 때나 출소 후 에도 추석 다음날 그의 집에 모이는 것이
30년 가까이 되는데 이제는 없다니 쓸쓸 하기 그지 없다. 신교수 집에서. 신교수와 필자
첫댓글 이번 추석 다음날에 두 분의 만남을 기억하겠습니다.
ms산마루 선생님의 여력 되신다면 추석 담날에 작은 번개를 하거나
함께 자그마하게 산행을 해도 좋겠다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신영복 석좌교수님의 빈자리를 생각하는 이번 추석에....
김문식 선생님께서는 아프시지 않고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염원합니다.
자로님의 제안이 좋습니다."작은번개"를 한번 하죠.일시.17일.토. 저녁 6시 장소.종로2가 종각역 8번출구로 나오면 Y.M.C.A
에 우리은행이 있고 골목으로 들어오면 민속주점 "꽃피는산골"의 앞집 "두레"집이 라고 신교수와 잘 가던 작은집 입니다.
참석 자격은 신교수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되고 남녀노소 제한이 없습니다.
예!
저는 꼭 찾아뵐게요~
한때 저도 신영복 교수님의 글과 사유와 위트와 휘호 등등을 선생님보다 더 탐했던 적이 분명히 있어요. 하지만 어렵게 - 목숨을 건 도약에 비견될 정도로 - 모두 태워버리고 선생님만 남겼으니까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어요.
어제 저의 보스님께 17일 토요일에 "조퇴" 결재받았답니다!
제가 너무 늦게 이 글을 보았습니다. 꽃피는산골 주막에서 더불어숲마라톤 모임을 여러번 했었는데... 선생님은 그 앞집에서 만남을 가지셨네요.
댓글 고맙습니다."꽃피는산골"주막을 아시네요. 신교수와 원래는 귀천다방 있는 골목 식당에 갔었는데 그집 종업원이 나와서
식탁이 5개 밖에 없는 "두레국시"라는 집을 개업해서 좀 도와 달라는 요청에 몇번 밖에 가지 못하고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집 주인도 얼마나 안타까워 하는지 가끔 친구들과 간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