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돈 카를로'가 누구인지 확인해 보도록 합시다.
절대주의가 유럽 왕궁들을 휩쓸던 시대, 우리에게는 '무적함대'로 잘 알려진,
스페인의 국왕이 있었죠. 바로 펠리페 2세...
오페라에서는 '필리포'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그 '필리포의 아들'이 바로 '돈 카를로'입니다.
그는 아버지에 의해 투옥되어 감옥에서 병사한 비운의 왕자라는 점에서,
조선의 사도세자가 연상되는 비극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자신이 사랑하는 약혼녀였던 프랑스의 공주,
엘리자베타가 정치적인 이유로 자신의 아버지인 필리포와 결혼하면서 시작되죠.
베르디는 극소수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평생 비극에 천착해 온 인물입니다.
일생의 상당 기간 동안 우울증을 앓았으며, 괴로움과 고통의 깊이를 너무 잘 알았기에
그의 탁월한 재능은 희극보다는 비극에서 더욱 빛을 발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의 모든 오페라 가운데서도 정말 감당하기 힘든 비극성을 갖춘 작품이 <돈 카를로>인데요.
모든 등장인물들이 하나 같이 괴로워하고, 증오하고, 갈등하고, 죽음을 맞기도 하는 장엄한 비극,
이 작품은 스페인의 궁정에서 벌어졌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사극 오페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실존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요.
우선, 5명의 주요 등장인물들을 살펴봅시다.
1. 필리포(베이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포르투갈의 이사벨 공주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스페인 왕국과 해외 식민지를 물려받은 펠리페 2세는
그의 통치기에 최상의 국력과 영토확장으로 스페인 제국의 전성기를 이룬다.
후에 외가로부터도 포르투갈 왕국을 물려받아 포르투갈 국왕을 겸하게 된다.
영국의 메리 여왕과 혼인하여 나폴리와 시칠리아, 네덜란드까지 지배하게 된다.
철저한 로마 가톨릭의 신봉자로서 신교도들을 탄압했으며,
후에 프로테스탄트인 엘리자베스 1세가 지배하던
영국 침략을 감행하다 '무적함대'가 격멸된다.
평생 4번의 결혼을 했는데 모두 유럽 경영을 위한 정략 결혼이었다.
첫 번째 부인은 포르투갈의 마리아 공주, 두 번째는 잉글랜드의 메리 여왕,
세 번째는 프랑스의 엘리자베타 공주, 네 번째는 오스트리아의 안나 공주였다.
이 중, 세 번째 부인 엘리자베타는 이 오페라의 주요인물로 등장한다.
대제국을 건설한 군주였지만,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평생을 고독 속에 살다 간 제왕이자 외로운 남자였다.
펠리페 2세의 초상화
2. 돈 카를로(테너)
필리포의 첫 부인인 포르투갈 공주 마리아가 낳은 아들이다.
그는 자신을 낳다가 어머니가 죽자 태어나면서부터 모성박탈을 경험하였다.
잉글랜드의 여왕 메리가 새어머니가 되었지만, 그녀가 런던에서 왕위를 수행하는 바람에
카를로에게는 영원히 어머니가 없었다.
게다가 약혼녀인 엘리자베타가 새어머니로 들어온 것은 그에게 심리적 충격을 주었다.
이후로 그가 보인 정신이상적인 행동들은
그에게 왕위를 주지 않으려는 아버지 측근들의 모함이었든지
아니면 부모의 근친결혼에 의한 태생적으로 유약한 신경 때문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비정상적인 심리를 가진 불행한 남자였다.
어머니(생모는 아니지만)를 껴안으려 하고 아버지에게 칼을 빼어드는 등의 행동들은
영원히 불행에서 달아날 수 없는 오이디푸스의 모습이다.
3. 엘리자베타(소프라노)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딸로서 14세에 자신의 약혼자의 아버지인 스페인 왕과 결혼했는데,
이로써 30년간 전쟁을 하던 스페인과 프랑스는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평화를 맞게 되었다.
그녀가 왕자 돈 카를로와 어느 정도의 관계에 이르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신적 고통을 입었음에는 틀림없다.
돈 카를로가 비운의 죽음을 당한 후에도 엘리자베타는 친정의 가르침을 성실히 수행하여
품위와 온화함을 지킨 진정한 왕비였다.
돈 카를로가 죽은 후 그녀는 필리포의 두 딸을 낳았고
작은 아이가 태어난 후 얼마 되지 않아 20대의 젊은 나이에 병사했다.
4. 에볼리(메조소프라노)
스페인 대귀족가의 딸로 여자로서는 여왕 다음으로 높은 지위인 공녀에 올랐다.
필리포 왕은 영국 여왕 메리와 결혼했지만
부부가 각기 자신들의 나라에서 국가를 통치해야 하는 관계로,
에볼리는 자연스럽게 필리포의 정부가 되었다.
그러나 메리가 죽고 왕이 재혼하여 엘리자베타가 왕궁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왕과의 관계를 드러낼 수 없는 불행에 빠진다.
에볼리의 미모는 대단했다는데, 그것은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초상화가 증명해주며
아리아 <내 미모를 저주한다>에서 묘사된다.
에볼리는 외눈박이였다.
한쪽 눈이 먼 그녀는 타인은 잘 볼 수 있으나 자신을 보는 시야는 좁았으며,
수도원에서 일생을 마쳤다.
5. 로드리고(바리톤)
위의 네 사람이 실제 인물임에 반하여, 로드리고는 가상의 인물이다.
네 명의 갈등구조 속에 그들 사이를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네 사람은 서로 질투하고 증오하면서도 모두 로드리고만은 신뢰한다.
로드리고는 종교적 맹신과 탄압정치로 어두웠던 16세기에서도
인간에 대한 형제애를 강조하는 이상적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절망적인 오페라의 희망이다.
베르디는 그를 죽임으로써 이 오페라를 영원한 비극으로 만든다.
<<아리아와 2중창>>
우정의 2중창(카를로, 로드리고)
'Dio, che nell'alma infondere' <함께 살고 함께 죽는다>
"어머니가 된 왕비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 는 카를로의 고민을 듣고
"그런 일은 잊어버리고, 함께 박해받고 있는 플랑드르 지방의 백성들을 구하는데 힘을 모으자" 고
로드리고가 카를로를 설득하는 장면
모자의 2중창(엘리자베타, 카를로)
'Io vengo a domandar' <자비를 구하러 왔네>
사랑의 마음을 가슴 속에 감추고 모자(母子)로 변장한 두 사람의 처절한 2중창.
마음속 깊은 곳의 열정을 누르지 못하고 격렬하게 왕비에게 달려들어 포옹하려는 카를로에게
"네가 진정 나를 안겠다면, 네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그 피 묻은 손으로 날 왕좌로 데려가라" 고
처절하게 외치고 절규하는 장면
필리포의 아리아
'Ella giammai m'amo' <그녀는 날 사랑한 적이 없다>
젊은 아내에게 한 번도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고 아들로부터도 배신당하는 자신을 생각하면서,
왕으로서 또한 남자로서 절대적으로 고독한 자신의 처지를 노래하는 장면
에볼리의 아리아
'O don fatale' <내 미모를 저주한다>
자신의 미모 때문에 이런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며 부르는 격정적인 노래.
로드리고의 아리아
'Per me giunto e il di supremo' <나의 최후의 날>
저격수가 쏜 총탄에 맞은 로드리고가 죽으면서 부르는 노래.
대본만으로는 누가 저격한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많은 공연에서 저격수들은 수도승 복장을 하고 있어 교회가 그를 제거했음을 암시해준다.
엘리자베타의 아리아
'Tu, che le vanita conoscesti' <세상의 허무함을 아시는 신이여>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노래하는 대형 소프라노 아리아.
퐁텐블로 숲에서의 즐거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현재의 삶을 탄식한다.
"나의 고통은 무덤에 가서야 평화를 찾을 것임을 안다" 고 비통하게 노래.
(인물분석 참고: 박종호의 '불멸의 오페라')
첫댓글 아..저런 말도 안되는 비극이 실제였다니. 두번째 영상을 보니까 정말..제 가슴도 찢어지는 것 같네요. 소프라노의 표정 연기가 대단해요. 나머지 영상도 얼른 인코딩 돼서 볼 수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