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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본문의 상황과 내용(본문 해설)
1. 본문의 역사적 상황과 문학 형식
요한복음 12장 1-8절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을 다루는 요한복음 1장 19장-12장 50절에 나오는 한 부분이다. 요한복음 1장 19절-12장 50절에서도 12장 1-8절은 죽음을 통해 승리하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는 11장 55절-12장 50절의 한 부분으로서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는 기사로 등장한다.
이 기사는 앞에 나오는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11:1-44)과의 연관 속에 놓여 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렸을 때(11:38-44)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민다(11:45-57).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린 이 사건은 직접적으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그런데 앞에서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박해할 여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0장 22-42절에서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배척을 받는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선한 목자(10:11, 14)와 양의 문(10:7, 9)이라고 했다. 그리고 10장 27-28절에 오면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것이요”라고 했다. 더욱이나 예수님은 10장 30절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한다. 이러한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 한다(10:32).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그 말이 하나님을 모독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러한 대결 구조 속에서 나사로를 살린 사건이 전개된다. 이 나사로 소생 사건은 예수님의 가장 위대한 표적으로(레이몬드 E. 브라운, 《신약개론》, 기독교문서선교회, 2003, p. 501) 나타난다. 이 나사로 부활 사건을 전해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여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민다. 이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도록 그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러면 로마 사람이 와서 유대 민족 전체를 해칠까 두려워한다는 것이다(11:48). 그때 대제사장 가야바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11:50) 하고 예언한다. 가야바의 이 예언은 그 해의 대제사장으로서 예언한 것이라고 요한은 해석하고 있다(11:51a). 그 뜻은 예수님이 민족을 위해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11:51b). 11장 55-57절은 예수의 사역의 마지막 유월절이 임박해 있음에 대해 말하므로, 예수의 다가온 죽음과 관계가 있는 12장의 행위들과 강화들에 대한 배경을 제공한다.
이제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워졌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이 베다니에 갔을 때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값진 나드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는다. 이 일은 예수님의 죽음을 지시하는 사건으로 해석이 된다(요 12:7). 요한복음의 이 기사는 마태복음 26장 6-13절과 마가복음 14장 3-9절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데,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의 기사는 예수님이 베다니에 사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있을 때에 한 이름 모를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 요한복음 12장 1-8절의 기사와는 좀 색다르게 누가복음에도 이와 비슷한 기사가 실렸는데, 누가는 7장 36-50절에서 한 죄 많은 여인이 울며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붓고 참회하는 장면이 나온다.
요한복음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나드 향유를 부어 드리는 사건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는 일로 제시된다(12:7). 이 12장 1-8절 뒤에는 9-19절에 걸쳐서 예수님이 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9-11절에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린 일에 대한 반응이 나타난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베다니를 찾아온다. 그들은 다시 살아난 나사로도 함께 보기를 원했다. 결과적으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11절에서 말한다. 이러한 반응과 함께 대제사장들이 나사로를 죽일 모의를 하는(12:10) 정반대의 반응도 아울러 나타난다. 예수님의 표적을 행한 사건 뒤에 요한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기사를 두고 있는데, 요한은 다른 복음서들과는 다르게 나사로 소생 사건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관련지어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이렇게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나드 향유를 부어 드린 사건은 나사로 소생 사건(11:44)과 예수님이 왕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사건(12:9-19) 중간에 위치한다. 12장 12-19절에는 나사로 소생의 표적을 경험한 무리들이 전한 증거를 통해 예수님의 위대한 표적 사건을 전해들은 순례자 무리들(이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순례자 무리들)의 환영을 받으며 예수님은 왕으로 환영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한다.
2. 본문의 석의(주석)와 해석
요한복음 12장 1-8절의 예수의 발에 값진 나드 향유를 바르는 기사는 마가복음 14장 3-9절과 누가복음 7장 36-38절의 기사들과 비교된다. 마가복음에 보면 무명의 한 여인이 한 옥합의 나드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붓는 것으로 나온다. 누가복음은 한 여인이 한 옥합의 향유를 가지고 와서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고 그 발에 향유를 붓는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마리아가 지극히 값 비싼 나드 향유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는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값진 나드 향유를 붓는 사실을 묘사하고 있는 요한복음 12장 1-8절은 아래와 같이 분류되고 있다.
(1) 도입부(1-2절)
(2) 마리아의 헌신(3절)
(3) 이 사건에 대한 유다의 이해와 반응(4-5절)
(4) 복음서 저자의 해설(6절)
(5) 이 사건에 대한 예수님의 이해와 선언(7-8절)
(1) 도입부(1-2절)
1절에 보면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사건이 유월절 엿새 전에 일어났다고 이야기한다. 그 장소도 아울러 언급이 되는데, 베다니이고 그곳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고 밝히고 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3km 가량 떨어져 있고 감람산의 동쪽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2절에서 누가 식사를 대접했는지는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요한복음 12장 1-8절과 평행되는 마가복음 14장 3절과 마태복음 26장 6절에 따르면 이 식사가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마르다는 누가복음 10장 40절에서처럼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일을 한다.
(2) 마리아의 헌신(3절)
향유를 부은 사람에 관해 마태복음 26장 6-13절과 마가복음 14장 3-9절은 아무 이름도 언급되지 않는데 요한복음에는 ‘마리아’란 이름이 언급된다. 요한복음은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나드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는다고 묘사하는 데 비해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것으로 보도한다.
나드 향유는 인도에서 자라는 ‘나드’란 이름의 식물 뿌리와 이삭에서 추출된 기름이다. 이 나드 향유를 피스티케스(pistikh/j)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 말은 ‘신실한’이라는 의미이며, 이곳에서는 ‘순전한’ 또는 ‘순수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머리가 아닌 발에 흠이 없는 순전한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는 행위를 통해 예수님의 가장 숭고한 봉사를 위한, 즉 온 인류의 구원을 이룰 대속 사업을 위한, 죽음을 예비한다. 마리아의 이 봉사는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봉사이었으므로 거룩한 봉사이다. 이처럼 매우 값진 향유를 바치는 행위와 아울러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는 행동을 통해 마리아는 예수님의 존귀함을 알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리아는 죽음을 향해 가는 분의 위대함과 그 죽음의 의미와 이 죽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선포한다. 마가복음은 한 여인의 봉사 사건 뒤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막 14:9)는 예수님의 선언이 단락의 마무리 말로 나타난다.
(3) 이 사건에 대한 유다의 이해와 반응(4-5절)
이 거룩한 봉사를 하는 마리아를 보고 가룟 유다는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12:5)고 말한다. 이 나드 향유는 5절에 따르면 300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향유이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므로 일주일에 안식일 빼고 6일 일하는 한 노동자가 1년 동안 일하여 쓰지 않고 꼬박꼬박 모아야 이 향유를 비로소 살 수 있는 매우 값진 향유이다.
(4) 복음서 저자의 해설(6절)
가룟 유다의 이 말 뒤에 복음서 저자의 해설이 뒤따른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12:6).
(5) 이 사건에 대한 예수님의 이해와 선언(7-8절)
가룟 유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이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은 “그녀가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그 향유를] 간수하도록 그녀를 가만 놔두어라”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런데 3절과 5절의 문맥에서 볼 때 마리아가 그 향유를 이미 예수님의 발에 붓고 사용했음을 암시하므로 7절의 히나(i[na)절이 동격을 나타내어 “그녀를 가만 놔두어라. (그녀는)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향유를] 간직하기 위하여 [이 일을 했다]”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마리아의 헌신은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는 거룩한 헌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이미 자기의 향유를 모두 예수님의 발에 부었지만 그 헌신은 예수님의 장사할 날을 위해 향유를 간직하는(보존하는, 지키는)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히나……테레세”(i[na…thrh,sh|)절을 통해 요한은 마리아가 나중에 예수님의 죽음 뒤에 향유를 바르도록 잘 보존한다는 의미에서 이 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이 구절이 마리아가 이미 수행한 행위와 관련짓고 있다. 즉 마리아는 자기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예수의 시체를 보존하기 위하여 그 향료를 보관했으며,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 그 향유를 예수의 몸에 부어 주는 행동을 한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 이전에 향유를 준비했고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 줌으로써 그 향유를 간직하는 일을 성취했다. 이와 같이 마리아는 그 자신이 생각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중요하고 심원한 의미를 가지는 일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하게 된 것이다.
12장 8절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 행동 속에서 마리아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의지를 보았음을 암시한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3. 본문의 신학적 메시지와 설교 주제 : 설교 구성을 위한 제언
요한복음 12장 1-8절은 사순절 절기에 설교하기에 알맞은 성경 본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귀한 희생으로 인하여 구원과 은혜와 함께 예수님이 높이 평가하신 마리아의 헌신과 봉사를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마리아의 믿음과 사랑은 그녀가 예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값비싼 선물에서 표현되고 있다. 주님에 대한 마리아의 헌신은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제시된다. 그래서 이 설교의 제목을 마리아의 헌신과 사랑을 보신 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고 잡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 제목은 선뜻 이해되는 것 같으면서도 이해에 온전히 다가서기가 쉽지 않는 것에서 매력적이다.
(1) 도입부(1-2절)
설교의 도입부는 향유를 붓기까지의 전(前) 과정을 설명한다. 나사로 부활과 무리들의 반응을 이야기해 주고 다른 복음서와의 비교도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 후에 일어나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수난 사건을 설명하여 이 향유 붓는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는 사건임을 간단하게 설명한다.
(2) 제1 대지: 마리아의 헌신(3절)
마리아의 헌신과 사랑이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 드리는 것을 통해 나타난다. 그녀가 얼마나 예수님께 대한 헌신이 지극했는지는 이러한 행동을 통해 나타난다. 옹색한 살림살이에 오래도록 모은 자신의 인생이나 다름없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도 아닌 발에 부어 드리고 자신의 가장 존귀한 부분인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리는 모습에서 거룩한 성도의 삶의 모범을 볼 수 있다. 마리아는 자기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그 헌신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한 것이다.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 드리므로 마리아는 예수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그 향료를 간직한 것이 되었다. 이처럼 마리아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 한 행동이지만 그 자신이 생각보다 더 중요하고 더 심원하고 거룩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3) 제2 대지: 이 사건에 대한 유다의 이해와 반응(4-5절)
여기서는 이 사건을 지켜본 유다가 이 사건을 이해하고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말하면서 인간의 삶에는 이렇게 큰 간격이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예수 사건을 똑같이 경험한 마리아와 유다의 생각과 행동이 이렇게 다르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없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만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고난당하심을 말하면서 십자가의 의미와 관련지어 설명해야 할 것이다.
(4) 제3 대지: 이 사건에 대한 예수님의 이해와 선언(7-8절)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12:5)고 말하는 유다는 아주 이성적이고 인간적이다. 그의 말이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맞는지도 모른다. 거의 1년 동안 일해야 살 수 있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는 것이 낭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다. 마리아의 헌신은 온 세상보다도 더 존귀하신 예수님이 구원 사업을 완성하도록 예비하는 일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헌신을 고귀한 헌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이 선언에서 어떤 인간애보다도 어떤 사역보다도 예수님 그분이 더 존귀하고 더 우선시되어야 함을 읽어야 할 것이다. 이 12장 8절은 마리아의 헌신 속에서 예수님이 마리아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뜨거운 사랑을 보았음을 암시한다.
결론적으로 우리 구세주 예수님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우리는 그분을 위해 무엇을 간직하고 있고 무엇을 간직할 것인가? 질문을 던져 보는 것도 중요하리라고 본다.
Ⅱ. 오늘의 상황과 본문 적용(설교 구성)
경기도에 있는 남한산성에 영락여자신학교가 있습니다. 충성스러운 여전도사님들을 많이 배출하여 한국 교회에 크게 공헌하고 있는 학교입니다. 이 신학교를 이야기할 때마다 ‘지장단’이라는 이름 석자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지장단’이라고 하면 무슨 제단이 생각나고 약간 이상한 지명 같습니다만 사람 이름입니다.
지장단 씨가 영락교회에 출석하며 은혜를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에 신앙의 참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이분이 어느 날 고 한경직 목사님을 찾아가 이야기합니다. “제 고향인 남한산성에 땅이 얼마 있는데 거기 교회를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에 한경직 목사님이 “그 동네에 교회가 없습니까?” 하니 그분이 “조그만 성결교회가 하나 있는데 장로교회를 크게 하나 세우고 싶습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에 한경직 목사님이 “동네에 성결교회가 있으니 그 교회를 새로 짓지요.” 하며 권면하여 성결교회를 새로 짓게 했습니다. 장로교인이 지은 성결교회라 해서 성결 교단에서도 아주 기념비적인 교회라 합니다. 어느 날 또 이분이 “앞으로 남한산성이 관광지가 된다는데 간접 전도를 위해 십자가를 크게 하나 세우고 싶습니다.”고 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좋은 일이라고 하자 십자가를 크게 세우고 그 이름을 ‘십자가 동산’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 언덕에 ‘영락여자신학교’가 세워져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영락여자신학교를 이야기할 때 꼭 이분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다고 합니다. 고 한경직 목사님은 이분을 ‘남한산성의 향기’라고 불렀으며 이런 내용을 아는 사람들은 그분을 기념하여 영락여자신학교를 일명 ‘지장단 신학교’라 부른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 가정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동생인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지극히 비싼 나드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준 이야기입니다. 신앙의 향유 냄새가 가득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저를 칭찬하시며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마 26:13)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념하라고 하시며 칭찬한 이 이야기를 통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예수를 위해 잔치할새(1-2절)
본문을 보면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이 나사로 집을 찾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오셨습니까? 나사로의 가정이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이 잔치는 특별히 나사로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은혜에 감사하기 위한 잔치였습니다. 2절에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라고 하였으니 거기는 나사로의 집이요, 거기는 예수의 은혜가 있는 곳이요, 거기는 예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 모여 잔치하는 즐거움이 있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여기에 귀중한 신앙적 교훈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가정, 그리고 교회는 한마디로 ‘예수를 위한, 예수와 함께’ 잔치하는 심령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신 예수님을 위한 잔치는 오늘 우리의 잔치로 계속되어야 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에서 구원하여 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오늘 우리에게 있습니다. 지옥 갈 인생들을 천국 가는 영생의 삶으로 품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가정은 그리고 교회는 예수를 위한 잔치 축제적인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 속에 살면서 이런 저런 일들로 힘들고 어려움이 있어도 죄의 값인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구원의 감격을 노래하며 잔치하는 심령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충만한 나사로의 가정은 예수님을 위한 잔치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하였습니다. 우리 삶에도, 가정에도, 교회에도, 이 나라, 이 민족 위에도 우리 예수님의 은혜가 충만하여 잔치하는 즐거움이 가득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2. 향유 냄새로 가득하더라(3-5절)
예수를 위한 이 잔치 자리에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씻는 장면입니다. 놀랍고도 충격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사회적 풍습으로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유대 여인들은 결혼을 위해 혼수로 향유를 준비하는데 마리아는 그것을 예수님에게 부어 드린 것입니다. 그 가격이 300데나리온이라 했으니 경제적으로 엄청난 가격입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은 근로자들의 하루 품삯이니 300데나리온은 1년 연봉에 해당하는 가격입니다. 지금 우리 돈으로 계산하여도 천오백만 원이 넘는 엄청난 가격의 물건입니다.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었다”고 했습니다. 이 시대 여성들은 머리털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특히 당시 유대인의 여성들은 더욱 그리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4-15절에는 “여자의 긴 머리는 자기에게 영광”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여인의 신체 중에 가장 영광스런 머리털로 사람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발, 그래서 종들이 씻겨 주는 그 발을 눈물과 함께 씻는 모습입니다. 마리아의 이 눈물과 예수님을 향한 섬김은 온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아름다운 헌신입니다.
이 아름다운 헌신의 열매가 어디로부터 왔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무엇이 저로 하여금 이렇게 기억될 만한 아름다운 삶으로 열매 맺도록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 헌신의 열매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그 뿌리는 바로 은혜입니다. 마리아의 헌신은 마리아가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 삶에 예수님에 대한 감사가 넘쳤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아야, 신앙의 체험이 있어야 헌신도, 봉사도, 사랑도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앙의 유형에 마리아의 유형이 있고, 마르다의 유형이 있습니다. 2절에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했습니다. 또 다른 말씀인 누가복음 10장에서도 마르다는 일을 하고 마리아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았습니다. 일도 중요하고 예수님의 대접도 귀합니다만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깨닫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마르다는 일 중심의 삶이었고, 마리아는 말씀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말씀 중심의 신앙, 여기에서 건강한 신앙이 출발합니다. 여러분!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마리아는 오라비 나사로의 일로 인해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것입니다. 죽은 오라비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과 부활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이 은혜가 풍성할 때 마리아는 예수님을 향하여 아까운 것이 없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아픔인 죽음을 부활의 은혜로, 가장 큰 슬픔을 가장 큰 기쁨으로 변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 삶에도 가정에도 문제가 있고 아픔이 있을 때 이런 주님의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의 삶은 변화됩니다. 은혜에 대한 감사의 샘물이 솟아납니다. 은혜에 뿌리박은 헌신의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습니다. ‘지장단’이라는 분이 큰 은혜를 받게 되었을 때 큰 섬김과 헌신을 베풀었듯이 말입니다.
반대로 여러분!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이 사건을 시종일관 지켜보는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상합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누구보다 많은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받던 가룟 유다였지만 그는 말씀을 깨닫는 은혜가 없었습니다. 놀라운 예수님의 기적과 은혜의 사건을 그토록 많이 체험했지만 그 마음에 은혜로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했고, 요한복음 13장 27절에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하였습니다. 무엇입니까? 가룟 유다는 그 마음이 딴 생각으로 채워져 있어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열심당 출신으로 인간적인 계산이 가득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마음에 딴 생각이 가득하면 주님의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말씀에 은혜 많이 받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바탕으로 주님의 뜻을 깨닫고 신앙의 은혜를 바탕으로 많은 봉사, 헌신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예수께서 가라사대(7-8절)
가룟 유다의 비난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7-8절). 신앙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평가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마리아의 한 일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해 주십니다.
온 인류 역사에 한 번뿐인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한 분뿐인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요, 온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을 위한 향유의 헌신만큼 귀한 것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헌신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섬김을 했다고 예수님은 평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여인의 혼수보다 예수의 장례가 귀합니다. 사람보다 예수님의 평가가 우선입니다. 세상보다 하늘의 헤아림이 더 값어치 있습니다.
오늘 나사로 있는 곳은 바로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입은 내가 있는 곳입니다. 무덤 문을 열고 나온 나사로의 부활은 부활 신앙을 가진 오늘 우리의 부활의 열매가 될 것입니다. 나사로에게 은혜를 주시고 마리아에게 은혜를 주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주십니다. 이 예수님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잔치하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하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감사가 넘치고, 찬양이 넘치고, 사랑이 넘치는 우리 삶이 되기 원합니다. 향유를 드리는 마리아의 헌신을 우리가 배우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우리라면 우리의 인생 또한 가장 소중한 것, 귀한 것을 드릴 줄 아는 신앙이 되기 원합니다. 훗날 우리 영혼이 주님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로다. 기념될 만한 향기로운 삶이로다.” 칭찬 받는 삶을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