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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본문의 상황과 내용(본문 해설)
1. 본문의 역사적 상황과 구조 분석
본문은 사도행전 10장 전체를 아우르는 고넬료 에피소드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이 에피소드의 외곽에 배치된 본문들을 중심으로 사도행전 전체의 구조 안에서 이 본문의 위상을 점검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사도들의 선교 행전은 초반기 주로 베드로에 의해 선도된다. 이 지점에서 그의 선교 반경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 의해 주도된 선교의 과정은, 메시지의 선포와 실천(행 2:14-42, 3:11-26), 공회 앞에서의 변론(행 4:1-22), 합심기도(행 4:23-31), 핍박과 변론(행 5:17-42) 등을 통해 이어진다. 이후 베드로의 선교 사역이 잠시 잠복되는 것은 일곱 일꾼의 택정(행 6:1-7)과 스데반의 설교 및 순교 이야기(행 7:1-60)가 전면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다른 헬라파 선교사들이 예루살렘 외곽, 즉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함으로써(행 8:1-3) 선교 영역의 확대와 함께 새로운 서사적 국면이 전개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빌립의 에디오피아 내시 전도(행 8:26-40)와 사울의 회개 및 그 이후의 행로(행 9:1-31)에 대한 이야기이다.
선교의 담당 인물과 그 지리적 영역의 확대는, 자연스럽게 샌드위치의 구조로 편집되어 연이어 등장하는 베드로의 선교 활동 또한 예루살렘을 벗어나 룻다와 욥바 등으로 확산시킨다(행 9:32-43). 이와 같이 점점 확장, 고조되는 선교의 분위기에 따라 베드로는 마침내 10장의 고넬료 에피소드를 통해 복음의 대상이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이방인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신학적 당위성과 선교사적 필연성에 부대끼게 된다. 이 고넬료 에피소드는 결국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성령강림과 세례가 이방인들에게까지 확산되는 증거로 작용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되었고(행 11:1-18), 그 결과 간접적으로는 안디옥 교회를 통해 바나바와 바울을 이방인들에게 선교사로 파송하는 일에 영향을 주었다(행 11:25-26, 13:1-3).
그뿐 아니라,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경계선을 넘어간 고넬료 가정의 회심담은 추후 이방인들과 율법의 관계를 신학적 논쟁거리로 부각시켜 예루살렘에서 첫 사도회의를 소집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행 15:1-21). 요컨대, 사도행전 10장은 예루살렘 교회의 복음이 어떻게 예루살렘을 넘어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전파되었고, 나아가 이방인의 세계로 확산되어 갔는지와 어떻게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가 주의 복음으로 허물어졌는지 그 일련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고넬료 에피소드는 그 내적인 구조를 분석해 보면 고넬료의 환상(행 10:1-8), 베드로의 환상(행 10:9-16),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과 교제(행 10:17- 33), 베드로의 설교(행 10:34-43), 그리고 고넬료 가정의 회심과 세례(행 10:44- 48) 등의 단위로 짜여 있다. 그 가운데 우리가 택한 본문은 고넬료 앞에서 베드로가 선포한 메시지에 해당된다. 이 설교는 베드로가 전한 설교 가운데 다섯 번째 설교이자 마지막 설교이며 동시에 이방인에게 선포한 첫 번째 설교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내용과 주제에 있어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한 설교(행 13:16-41)와 유사하며, 헨첸(Haenchen)이 분석한 대로, 형식상으로는 1장에서 제시된 베드로의 첫번째 오순절 설교의 패턴을 따르고 있다. 그것은 곧 ① 주어진 상황과 연계된 모두 발언(행 10:34-35), ② 핵심 케리그마(행 10:36-41), ③ 성서적 증거(행 10:43a), ④ 회개의 요청(행 10:42, 43b)이다.
2. 본문의 석의와 해석
본문의 34-35절에서 베드로는 “입을 열어” 고넬료 일가에게 말씀을 선포한다. 입을 여는 제스처는 ‘결정적인 순간의 엄중함’(Haenchen)을 표현하는 상용 문구이다(행 8:35). 그 입에서 선포되는 말씀인즉 결과적으로 고넬료가 본 환상에 대한 계시적 응답이며 동시에 베드로가 황홀경 가운데 들은 예언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말씀에 의하면, 고넬료의 경우에 딱 들어맞듯이,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는 분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유대인이라는 혈통적 기준에 따라 자신의 구원을 한정하시지 않는다. 심판자로서 부당하게 특정한 쪽을 편애해서는 안 되듯,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시대에 새롭게 자신을 계시한 구원자로서 하나님은 특정한 민족이나 세속적 기준에 따라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을 편애하지 않고 두루 포용하신다(롬 2:11; 엡 6:9; 골 3:25; 벧전 1:17; dir 2:1, 9).
구원론적 기준으로서 하나님의 관심은 이와 같이 선천적인 혈통이나 외양이 아니라 그 국가와 민족의 배경을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을 두루 용납하는 보편적 방향으로 나타난다. 베드로의 이러한 표현은, 외교적 수사의 관점에서 보면, 고넬료의 평소 행적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드러낸다. 그는 비록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도행전의 선교 신학적 관점에 비추어 보면, 이 표현은 유대교로 회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부 이방인들(God-fearers)이 이방인 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수행했을 뿐 아니라 이방인 교회의 초석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혈통과 이 세상적 가치 기준에 따른 온갖 종류의 차별을 철폐하고 또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차별 없는 세상, 바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겨냥하는 중요한 목표이며, 하나님의 본래적 성정이 발현된 결과이다.
이어지는 구절 10장 36-41절은 베드로가 전한 복음의 핵심 메시지, 즉 케리그마(kerygma)에 해당된다. 그 메시지는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해진 “화평의 복음”으로 정의된다(행 10:36). 그 화평 또는 평화의 복음은 전쟁과 소요, 수탈과 억압, 혼돈과 절망의 한가운데서 신음하는 식민지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 모든 어둠의 시대를 접고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알리는 복된 소식으로 전파되었다. 그 복음의 예비 사역자로 세례자 요한이 먼저 활동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 사역은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 확립되기 이전의 단계로서 유대교의 말기적 유산이나 그리스도교의 예비적 징조에 해당된다. 세례자 요한의 활동 이후에 복음은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되었고, 그것은 웬만한 유대교도이면 다들 아는 바였다(행 10:37).
그때 전파된 것은 다름 아닌 ‘말씀’(rēma)이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의 복음 사역은 나사렛 등 특정한 곳에 안주하면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역은 각 지역을 두루 다니며 선한 일을 행하되, 특히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는 치유 활동에 집중되었다(행 10:38). 여기서 ‘선한 일’은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고치는 치유 활동을 포함하는 사역의 일반화된 범주이다. 이러한 예수의 치유 사역은, 동시대 여느 마법사들의 경우와 달리 단순히 병자를 치유하는 주술적 효능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신 결과로 나타난 메시아의 표징이었다. 즉,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신 결과(행 10:38), 이를테면 ‘임마누엘’의 표적이었던 셈이다. 베드로를 위시한 측근 제자들은 이 모든 예수의 행적을 곁에서 생생하게 목격한 산 증인이다(행 10:39). 그러므로 제3자를 경유하지 않고 그들의 입에서 직접 전파되는 그의 그러한 행적은 신뢰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그들의 증인 됨은 그러나 예수의 살아생전 행적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가 십자가 나무에 달려 죽은 것과 하나님이 그 예수를 다시 살리신 부활 사건에서도 동일한 증인들이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3일 만에 부활하였으며, 하나님은 부활한 그 예수를 제자들에게 나타냈다. 사도행전의 신앙고백적 해석에 따르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 하에 나타난 시나리오의 일부인 것이다. 이러한 일의 증인으로 자신과 동료 제자들을 제시하는 순간, 베드로의 음성에는 자부심과 함께 사명감이 넘쳐나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모든 구원의 사건들이 모든 백성들에게 나타나지 않고 자신을 포함한 일부 증인들에게 선택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행 10:41). 그 제자들은 예수가 부활한 뒤 그와 함께 음식을 먹었을 정도로 그의 부활에 대한 생생한 경험적 진정성을 지닌 자들이다. 이와 같이 예수로 말미암아 전파된 ‘화평의 복음’은 예수의 말씀 복음을 거쳐 치유 활동을 비롯한 그의 선한 행적과 십자가 죽음을 경유한 뒤 부활 사건에서 절정에 이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의 설교는 부활하신 주님의 지상명령으로 전도의 사명을 언급한다(행 10:42-43). 그 화평의 복음은 복된 소식으로 전파되며 증폭될 때 복음다워진다. 그리하여 그 사명은 제자들에게 명령의 어조로 전달되었다. 예수와 관련된 케리그마는 이제 선교적 과제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그 백성들의 구원과 관련된 케리그마로 드러난다. 부활하여 나타난 그 예수를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세워 마지막 날 심판을 주관하게 했다는 것이다. 심판의 교리는 예수를 재판장으로 전제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론적 교리이지만, 만민이 그 앞에서 구원 여부와 상벌 정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점에서 동시에 구원론적 교리이기도 하다. 그 구원론적 교리는 심판의 교리에 앞서 속죄의 교리를 요청하는데, 43절에 언급된 대로, “그[=예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약속이 그 요청에 부응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위상과 역할은 이미 구약성서를 통해 선지자들이 증언한 바와 같다. 다시 말해, 생소한 억설이 아니라 이미 예언된 말씀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3. 신학적 메시지 : 설교를 위한 제언
이 본문으로 설교를 구상할 때 다음의 몇 가지 방향을 타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부활주일의 설교를 위해 채택된 본문이기 때문에 본문에 내장된 메시지를 종합적으로 포괄하되, 그 초점이 부활의 메시지를 강조하는 쪽으로 모아지면 효율적이겠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해진 복음이 모든 만민에게 차별이 없는 ‘화평의 복음’임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평화의 주님으로 받들어 섬기면서도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팎에 적잖은 차별이 존재함을 비판적으로 직시해야 한다. 하나님은 외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분이심과 그것이 갈등과 분열로 들끓는 이 시대에 화평의 복음을 세우는 기초가 됨을 강조해야 한다. 인간 사회와 교회 공동체 내의 갈등과 분열은 대체로 그 뿌리에 내재된 인간의 탐욕에 기인하지만, 아울러 이 세상의 주류 가치에 편승한 탈선한 복음의 차별적 행태에도 적잖이 문제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퇴락한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차별 없는 화평의 복음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둘째, 이러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삶을 통해 나타난 구체적 근거가 있음을 선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저절로, 대가 없이 화평의 복음이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그 치열한 삶과 죽음이라는 값비싼 희생을 통해 성취된 열매이다. 본문의 케리그마대로, 그 예수는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유대 땅 구석구석에 말씀의 씨를 뿌렸고, 마귀에 눌린 자들을 치유하는 등 선한 일을 몸소 실천했다. 그 생명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다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났다. 그러므로 화평의 복음은 죽음의 세상에서 신음하는 이들에게 예수 부활이 나의 부활, 우리의 부활로 이어지리라는 소망을 통해 죽음의 실존 한가운데 평안을 선사한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이 죽임의 세상 속으로 평화의 에너지를 공급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삶과 죽음이 평화의 사건으로 결실되었듯, 우리의 삶과 죽음 또한 평화의 세상을 일구어내는 데 한 알의 썩는 밀알로 바쳐져야 한다.
셋째, 이러한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은 그의 명령을 받들어 복음을 전하는 이 시대의 담대한 증인들을 요구한다. 본문에서 그들은 예수와 더불어 먹고 마신 경험을 기억하며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충일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예수의 몸과 언약의 잔에 참여함으로써 그 부활의 주인공 안에서 더불어 먹고 마시는 택함 받은 존재들이다. 거듭 재현되는 그 특별한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담긴 의미를 묵상하며 그 대속적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용서받음을 고백한다. 모든 신자들은 그렇게 고백한 것을 이 세상에 전파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우리의 생명을 부활로 인도할 그 부활의 주님이 재판장이기에 우리는 장차 죽음 이후의 심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수의 부활은 죽음을 앞세워 우리를 협박하는 모든 영적 물리적 권세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균형을 갖춘 설교자는 인간이 한계상황으로 당면하는 죄와 죽음의 실존 앞에 무력한 존재임을 선포하는 것만큼, 같은 강도로 예수의 부활 안에서 누구든지 그 죽음의 고난을 넘어 다시 부활해야 하는, 또 부활할 수 있는 오뚝이 생명임을 밝히 드러내야 한다.
Ⅱ. 오늘의 상황과 본문 적용(설교 구성)
1. 설교의 도입 (서론)
기독교의 중심이 되는 기둥 두 가지는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 중에서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요,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며 뿌리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사신 부활이 있기에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이 의미가 있는 것이고, 우리가 구속의 은총을 노래하게 되는 것이며, 기독교가 생명과 영생의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신앙을 확실히 고백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부활의 신앙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고전 15:17-19). 오늘 본문의 말씀은 고넬료에게 선포한 베드로의 설교로서, 복음의 핵심인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설교의 전개(본론)
고넬료는 가이사랴의 로마 백부장입니다. 그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구제와 기도에 힘쓰는 경건한 생활을 했으며(2절), 유대 온 족속이 그를 칭찬했으며 그 종들도 자기 주인은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22절). 그런 고넬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여 욥바의 베드로를 초대하였습니다(33절). 그러자 고넬료의 초청을 받은 베드로는 며칠 전 자신이 체험한 환상을 통하여 배운 것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는 분이라는 것과(34절),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을 다 받으신다(35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화평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특이한 것은 베드로가 의도적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하지 않고 나무에 달려 죽었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신 21:23; 갈 3:13)라고 한 말씀대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나무에 달려 저주의 자리에까지 내려가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이것을 믿고 회개하는 자가 구원을 얻게 된다는 화평의 복음의 핵심을 설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특별히 부활주일에 읽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베드로는 하나님의 차별이 없으신 화평의 복음으로서의 부활과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강의 말씀과 부활의 증인인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의 증인으로서 전도자의 삶을 살아야 할 우리의 사명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담긴 세 가지의 교훈을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첫째, 예수님의 부활은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입니다(34-35)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당시 시대적 배경으로 볼 때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하는 것이 위법”(28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이방인인 고넬료를 만날 생각도 없었으며, 이방인의 초대도 반갑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이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시는”(롬 10:12)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환상을 보이심으로(10-16절) 그의 생각을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으며(신 10:17; 삼상 16:7; 롬 2:11; 엡 6:9; 골 3:25; 벧전 1:17),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는 차별이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3:22, 10:12). 유대인은 율법의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여 이방인을 멸시했지만,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로마인이나 차별 없이 모든 인생이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인류를 향한 구속의 은총으로 차별이 없는 ‘화평의 복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모두)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롬 5:8) 사건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고전 15:22) 하시려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이처럼 부활의 사건은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로서 차별이 없는(롬 3:22) 화평의 복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적인 기준이나 코드에 따라 편 가르기를 하거나 차별하지 말고 말씀 안에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엡 4:3).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오늘날 사회와 교회 안에 자행되고 있는 여러 가지 차별의 현장을 봅니다. 남녀 간의 차별, 학력에 의한 차별, 빈부 간의 차별, 인종 간의 차별,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 차이와 차별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만연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교회 안에도 이런 어리석은 차별이 있다는 것입니다. 직분에 따른 기능의 차이를 차별의 도구로 악용하고 있고, 가난한 자를 홀대하는 모습이나, 믿음의 연륜이 교회의 질서를 위해 필요하지만 도가 넘어서 차별의 구실로 삼는 모습 등이 만연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셨고(롬 2:11),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셨는데도(약 2:9) 불구하고 봉사의 직분을 가지고 주장하는 자세로 믿음이 약한 자들을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성경은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고후 10:7)라고 고발합니다. 주께서 우리의 외모를 보셨다면 절대 우리는 구원의 후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만유의 주 되신 예수는 차별의 장벽을 걷어내고 화평의 복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의 아침에 저와 여러분은 우리 안에 있는 차별의 악행을 그치고 “화목하게 하는 직책”(고후 5:18-19)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둘째,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 은혜의 사건입니다(36-41)
베드로는 복음의 핵심인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면서 모든 것이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화평의 복음”(36절)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부활은 구원의 복음이요, 화평의 복음이라 정의하면서 부활은 평강이 없는 이 땅에 위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며 문을 닫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친히 평강을 주신 주님은 우리에게도 부활의 기쁨을 통하여 참된 평강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라”(엡 2:14)고 선포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화평, 평강, 평화는 히브리어로는 ‘샬롬’이라 하고, 헬라어로는 ‘에이레네’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개인이든 단체이든, 가정 일이든 사업이든 신앙생활이든 화평한 삶과 평안의 날들을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불안한 사건의 연속일 뿐 평화는 전혀 보이지를 않습니다.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평화를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도처에 있는 것은 불안이요, 산적한 근심 걱정거리뿐입니다. 그럼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셨는데 왜 우리는 참된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며 부활의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2절의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는 말씀처럼 부활의 믿음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부패하고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이 세상의 삶이 끝이라고 생각함으로 부활 이후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어 인생을 아무렇게나 막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전 15:34)하며,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고 회개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벽입니다(사 59:2). 그 죄의 벽으로 인해 우리는 위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평강(샬롬)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참된 평강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과 방법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화평의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죄의 벽을 허물기 위하여 나무에 달려 저주 아래 있는 자가 되었다가(갈 3:13)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심으로 죄의 저주를 끊고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참된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입니다. 사죄의 은총으로 죄에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우리에게 참 평강을 주셨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평강의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지난날 우리들의 어둠의 행실(죄악, 불안, 걱정)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감사와 평강)을 입읍시다(롬 13:12).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줄로 믿습니다(빌 4:7).
(3) 셋째,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셨습니다(42-43)
고넬료에게 화평의 복음을 전하던 베드로는 “우리는 그의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이라”(39절)고 하며 부활의 사건을 증언하고,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심판자) 되시는 예수님을 전도함으로 사람들로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이야기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눅 24:48)고 하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고 하시면서 전도자로 파송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전도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바로 이 화평의 복음과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이 부활의 아침에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구원함을 얻는 이 진리를 전하는 복되고 아름다운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믿는 우리에게는 복되고 반가운 소식이지만, 불신자들에게는 두렵고 떨리는 소식입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은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만민의 구주가 되실 뿐만 아니라 다시 오셔서 심판하시는 재판장이십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고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도록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3. 설교의 마무리(결론)
부활하신 주님은 만나는 여인과 제자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셔서 파송하셨습니다. 우리도 부활의 신앙에 굳게 서서 차별이 없으신 화평의 복음으로서의 부활 사건과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정한 평강의 축복을 전하고, 심판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전함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증인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줄을 믿습니다(고전 1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