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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노릇 나라노릇 마음대로 뜻대로
信天함석헌
이런 부끄럼 어디 있나?
지금 와서도, 땅덩이를 뛰어넘은 이 우주시대에 와서도, 아직도 자유니, 인권이니 하는 소리를 부르짖어야 하니 이런 부끄럼이 또 어디 있을까?
부끄러워 세계를 향해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생각해보라, 영국 민중이 일어나 임금의 모가지를 자른 것이 벌써 언제인가? 프랑스 노동자들이 일어나 귀족들의 대가리를 기요틴에 여물 쓸듯한 것이 벌써 몇 해 전인가? 그러나 무엇을 다 그만두고라도, 우리의 끊어지다 남 은 밸두시가 그래도 뻐치어서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고 했던 것인들 벌써 얼마나 오래 전인가? 그런데 왜 아직도 나가지를 못하고 있어? 왜 그 자리에만 서 있어?
성숙하는 데 있다
그러나 낙심할 것은 없다. 낙심해서는 안된다. 及其至之하야는 一也라(그 자리에 이르고 보면 한가지다). 진리에는 앞뒤가 없나. 그러기에 히브리서의 기자는 말하기를 “초보적 교리를 넘어서서 성숙한 경지로 나갑시다...... 기초적 교리를 다시 배우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6:1,2)”, “성숙한 사람은 훈련을 받아서 좋고 나쁜 것을 분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습니다(5:14)”했다. 초보적인 것은 기본적인 것, 원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한번 배우고 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서 끝까지 일관하여 지켜가는 것이다. 잘못은 그것을 익히지 않는 데 있다. 배우고 늘 익혀야하는 것이다. 學而時習之다. 그러면 不亦悅乎아. 아주 기쁜 지경에 간다. 성숙한 사람이란 곧 익숙한 사람이다. 익숙은 익혀야 얻게 된다. 그 익은 지경을 自行 自止라 한다. 스스로 가고 스스로 멎는다. 스스로란 제가 한다는 뜻도 있고 저절로 한다는 뜻도 있다. 저절로 하게 되어야 정말 제가 하는 것이요, 제가 스스로 해야 정말 한 것이다. “不知手之舞之足蹈之 (손이 춤을 추고 다리가 들렸다 놓였다 하는 것을 모른다)는 것은 그런 지경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음악을 두고 하는 말인데, 속에 무슨 느낌이 있으면 말을 하게 되고, 말이 한층 더해지면 노래도 길게 빼고, 노래가 한층 더 홍분하게 되면 감탄으로 나오게 되고, 감탄을 하다가도 더해지면 그때는 손이 놀고 다리가 노는 것을 모르게 춤이 나간다는 말인데, 孟子가 이것을 인용한 것은 도덕도 그렇다는 뜻에서다. 즉 처음에는 힘써 하지만 그것을 늘 잊지 않고 익히면 나중에는 춤을 추듯이 저절로 하는 줄 모르게 즐거움으로 하게 된다. 그것이 정말 德이라는 것이다 하는 그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하지 못하는 것은, 자유를 익히지 않기 때문이다. 몸이 사는 것은 먹고 마심을 익혀서 익혀서 나중에는 스스로 될 수 있는 지경에 갔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정신이 사는 것도 정신적 양식 곧 진리를 실천하고 실천에 의해서 스스로 되는 지경에 이르러야한다. 알기는 하나 행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모르는 말이다. 늘 익히지 않는 그것이 곧 모르는 일이다. 어린이라도 한번 젖 맛을 안 다음에는 어떤 독재자의 명령을 가지고도 그것을 멈출 수는 없다. 옳은 일의 맛도 한번하고 두번하고 늘해서 그 맛을 알면 어떤 압박자가 그것을 중지시키려 해도 중지시키지 못한다. 심하면 그 사람을 죽일 수 있겠지만 그것은 살인을 한 것이지 능히 남의 자유를 빼앗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지키면서 죽은 사람은, 죽었다고 (남들은) 그러지만, 스스로는 결코 죽은 것이 아니다. 왜? 죽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지키기 위해 즐거움으로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가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말씀하시기률 “누가 내게서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입니다. 나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명령입니다”했다(요한 10:18).
사람노릇
자유란 말을 하게 되면 흔히들 하는 소리가 자유에는 여려가지가 있다고 하며 생명의 자유니, 직업의 자유니, 신앙의 자유니, 정치적 자유니 하지만 그것은 한가한 토론이다. 그러기 때문에 스스로 자유를 내버리고 짐승노릇을 하는 것들이 많다.
자유는 하나다. 스스로 하는 한 자유가 있을 뿐이다. 생명이요 정신이기 때문에 하나다. 그 그늘 밑에 천 마리 소를 세워둘 수 있는 큰 나무가 스스로 살았을 때는 그 천백 개의 가지가 서로서로 치우침도 없이 흐트러짐도 없이 다 제 자리를 지키고 버티어 있으며, 거기 돋은 억만 잎파리가 하나 빠짐없이 빳빳이 손을 펴서 햇빛이 그 위에서 춤을 추고 바람이 그사이사이에서 음악을 아뢸 수 있으되, 한번 뿌리가 끊어지고 진액이 오르내리기를 그치면 그 순간 곧 쭈그러져 잎은 잎에 짐이 되고 가지는 가지에 눌림이 되어 꺼꾸러져 썩게 되고 눈에 뵈지 않는 버러지조차도 마음대로 파먹게 된다. 사람의 생명과 자유도 그와 마찬가지 다. 스스로 하는 기운이 뻐쳐 있으면 발꿈치에도 무거움이 없고 터럭 끝에도 허전함이 없지만, 그 기운이 죽으면 먹은 밥이 독이 되고 마신 물이 도리어 썩히는 고통이 된다.
사람노릇 하는 것이 자유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고 싶어서 한다. 옳고 끓고를 생각할 여지가 없다. 되고 안되고를 살필 겨를도 없다. 그러므로 참이다. 참이기 때문에 죽음도 없고 빼앗김도 없다. 죽지 도 않고 뺏기지도 않는 것이 생명이요 사람이다. 죽고 뺏김은 스스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그릇된 생각이다. 그릇됐다는 것은 삶과 생각함이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자연계에 자유가 있나 없나? 있다면 아주 완전한 자유요 없다면 아주 없다. 그것은 거기는 생각한다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구름이나 바위도 생명의 한 나타남이겠지만, 거기는 생각함은 없다. 그러기 때문에 바위의 바위 됨을 뺏을 놈도 없고 구름의 구름 됨을 막을 놈도 없다. 그것들은 영원히 스스로다. 그러므로 자연이다. 스스로 그런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생명은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자라는 것이다. 거기 대하여는 누가 물을 권리도 없고 의심할 자격도 없다. 그저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하여간 생명은 자라는 것인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자란다는 것은 전의 하나 됨을 깨치고 보다 높은 데로 올라가는 일이다. 바위와 구름에 영원불변의 스스로 함이 있지만, 생명에는 거기만 있지 못하고 올라가려는 생각이 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풀이요 나무요 동물이다. 거기는 어느 정도의 생각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 생각은 아주 단순한 것이어서 그 변천은 억만년을 단위로 서서히 돼가는 것이므로, 거의 하나 됨의 깨어짐을 느끼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큰 나무 그늘 때문에 작은 나무가 자라지 못해도 거기 압박이란 생각이 없고, 강한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어도 생존 경쟁이란 생각이 없다. 그렇게 본 것은 사람이 제 생활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보고 그렇게 해석한 것뿐이다.
그 잃어진 자연의 하나 됨을 보다 높은 정도에서 도로 찾아 세우는 것이 사람노릇이다. 우리 중에서 잘한 이는 벌써 그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이 정말 스스로 하는, 자유 하는 인간이다. 다른 말로해서, 해방됐다, 구원받았다, 영원한 생명에 들었다 하는 이들이다. 인간 중 의 어떤 이는 벌써 거기 올라갔다는데 인류의 구원, 다른 말로해서 자유 하는 인격이 있다. 왜냐하면 생명은 하나요 정신은 하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유함에 이르지 않으면 안되는 의무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여기 있다. 낱 사람은 사람의 다가 아니다.
왜 생각하는 인간은 자유함에 이르기가 어려운가? 다시 말해서 사람노릇의 문제점은 어디 있는가? 생각함에 있다. 참은 한 점이다. 그 한 점에 이르자는 것이 천만가지 생각의 원인이지만, 그 한 점으로 압축되지 못하면, 망상 곧 그릇된 생각이다. 압축이라기보다는, 모든 깨달은 이들이 말해준대로, 사라진다 해야 옳을 것이다. 천만 가지 생각이 다 사라져야 그것이 옳은 생각이다. 생각 없음이, 생각을 잊음이, 생각하지 않음으로 하는 생각이 정말 참 생각이다. 자유의 신비가 거기 있다.
모든 생각이 다 망상이란 무슨 말이냐? 그것은 다〈내〉가 만든 생각이란 말이다. 생각을 만들고 해낼 수 있는 듯이 생각하기 때문에 망상이다. 그 몹쓸 생각을 누가 하느냐〈나〉란 것이 한다.〈나〉란 내가 만든 것이다. 스스로 있는 것이 못된다. 그러기 때문에 나에게는 자유가 있을 수 없다. 내가 나를 깊이 생각할수록 나는 나의 나가 아니란 생각을 아니할 사람이 누구일까? 그것이 참의 근처에 간 생각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거기서 겁을 집어먹고 물러나서 스스로 제가 만들었던〈나〉로 만족(철저치 못한 줄을 알면서도)하려는 데서 잘못이 생긴다.
내가 내가 아니다. 나처럼 직접적이요 분명한 것이 없건만, 그 나는 결코 궁극의 참 나는 아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를 알 수 없이 궁극적인 것을 파지 않고는 못 견디는 것이 또 사람이다. 이점에서 인간은 모순이다. 그 모순을 푼 사람이야만 자유다.
그런데 사람 중에는 궁극의 참 나를 찾아 스스로 함에 이를 생각은 하지 않고 이 망상의 욕심의 나를 절대화하여 가지고 남의 자유를 뺏음으로 자기 자유를 넓히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 때문에 문제지만 사실은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왜냐?〈나〉는 누구를 뺏는 것도, 뉘게 뺏기는 것도, 아니요 따라서 자유는 뺏을 수도 뺏길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참 사람이 될 가능성은 가지고 있지만 되려다가 못된 사람이다. 사람이 되려다가 되기를 스스로 포기했으면 그것은 짐승도 아니요, 무생물도 아니다. 사람도 아니요, 짐승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기 때문에 악마나 사탄이라 한다. 그 사람은 사람이 될 가능성은 가지고 있으나 스스로 자기를 부정함에 의하여 영원한 지옥을 향하고 있다. 자유 억 압은 곧 자기 속에 자유를 부정함이다. 자유를 부정함은 사람됨을 부정함이다. 그러므로 그의 있을 곳은 지옥이라는 곳 밖에 우주 간에 있을 곳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공포와 시기와 미워함과 불안 속에 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노릇할 것을 자기의무로 아는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 하는 말이다. 자유함은 공포와 시기와 미워함과 불안함으로는 얻지 못한다. 그런 감정을 품으면 내가 바로 그 대적의 포로가 되기 때문이다. 사탄은 다른 것 아니고 부정이다. 실재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사탄이다. 도깨비가 있다 생각하면 도깨비 들린 사람이다. 도깨비를 물리치는 단 하나의 길은 없다고 부정함이요, “물러가라!” 명령함이다, 그것이 자유다. 도깨비 보고 능히 “물러가라”하는 순간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요, 죽고 삶을 초월한 것이다. 거기가 하늘나라요, 니르바나요, 자유다.
이것은 나의 어느 정도의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노릇하려 애쓰면 이미 사람이요, 자기 자유가 있다. 뺏을 자가 없다. 준 자가 없는데 뺏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영원히 자유하려는 생명이요 정신이다.
나라노릇
그러나 사람은 낱 사람으로 다는 것이 아니다. 낱 사람으로서 하나의 완결된 사람인 동시 에 또 그 모든 낱 사람이 하나를 이루어서 되는 전체의 사람이 있다. 그것을 나라라고 한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존재해 있는 하나의 한층 더 높은 인간 살림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자연히 사람노릇인 동시에 또 나라노릇일 수밖에 없다.
생각하는 주체는 낱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 중에는 낱 사람만을 참으로 알고 천체의 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이 아직 깊지 못한데서 오는 잘못이다. 우리 자신의 살림을 반성해 보면 곧 알 수 있다. 아주 거칠게 보는 생각으로 하면 우리 몸은 여러 가지 기관을 가지고 있고 뇌란 것이 있어 생각을 하며 각 기관에 명령함으로 생활을 해간다고 할 수 있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생각은 전체 몸으로 하는 것이지 결코 뇌만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는 우리 몸이 한없이 많은 세포로 조직되어 있는 줄을 몰랐지만 지금은 누구든지 그것을 다 알고 있고, 그 세포의 생활을 살펴보면 그것은 우리 몸이라는 전체에 속하여 있기는 하지만 결코 벽돌 한 개가 큰집에 속해 있듯이 그렇게 기계적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세포 하나하나가 모두 저로서는 완결된 개체여서 저로서의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세포 그 자체도 그 나름의 무슨 생각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의식(意識)이란 것에 잡혀 그것만이 생각인줄 알지만, 사실 생각은 의식보다는 훨씬 더 깊고 넓고 복잡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의식은 모르지만 우리 몸은 훨씬 더 복잡하고 신비로운 가지가지 생각이 한 큰 조화를 이루어 생활을 영위하여 나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 지식으로 알 수 있는,처음에는 전체 개체의 대립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소박한 공동체의 살림이 있었다. 그러다가 그 공동체 안에서의 낱개의 관계가 점점 더 긴밀한 것이 되어감에 따라 자연히 낱 사람으로서의 자각이 시작됐다. 그리하여 전체와 낱 개, 낱개와 낱개사이의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됨에 따라 낱 사람은 전체의 자각 없는 구속에서 해방되기를 힘쓰게 됐다. 최근 3,4 천년의 역사는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개인의 해방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봉건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일관해온 역사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서 기술문명의 급속한 발달로 사회관계는 기계적이라던 데서 한 걸음 넘어가서 유기적인 데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낱 사람의 절대적인 독립을 생각할 수 없는 단계에 들어감으로 다시 전체적인 나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옛날 개인의 자유를 모르던 때의 전체에 되돌아감이 아니다. 그것을 충분히 인정함으로 이루어지는 보다 높은 단계의 전체주의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로서 어려운 것은 우리는 지나간 역사의 이유로 봉건시대의 껍질은 아직 채 벗지 못한 때에, 즉 다시 말해서 개인의 자유를 완전히 얻지 못하고서 갑자기 새로 오는 전체주의의 물결에 들이닥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단히 말해서 잘못했다가는 다시 봉건주의적인 옛 껍질 속으로 물러가게 될 염려가 있다. 누구나 우리사회상을 잘 살펴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로 그런 주장이 있기까지 하다. 삼강오륜 사상이다.
그러나 또 다시 더 곤란한 것은 역사는 결코 후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설사 봉건시대에 돌아가려 해도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 전체도 모르고 개인의 완전한 자유도 모르는 뒤떨어진 우리 현실임으로 얼핏 옅은, 옛 버릇을 청산 못한 생각으로 할 때 다시 봉건제도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처럼 착각을 하기 쉽고, 실지로 그런 사람들이 지금 있기도 하지만, 인류 역사는 절대로 그것을 허락 아니 한다. 현대적인 도시 속에서 내가 아 무리 전원취미를 고집해 초가삼간 속에 살려 해도 이 도시 살림 자체가 그것을 허락 안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 우리의 이중삼중의 어려움이 있다. 간단히 말한다면 역사에 월반이란 없기 때문에 잠을 못자고 밥을 못 먹으면서라도 속성으로 남이 2,3백 년 전에 통과한 그 자유성장의 과정을 단시일 내에라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이제 그것을 능히 견디고 나는 것 이 나라노릇이다.
죽을 힘을 다해서라도 나가서 세계사의 행렬에 참여함으로만 살 길이 있지, 내 고집으로 물러가서는 아니 된다. 멸망이 있을 뿐이다. 왜 그러냐? 역사의 나가는 방향을 네가 하는 것도, 내가 하는 것도, 이 나라가 하는 것도, 저 나라가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종교적인 말로 한다면,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고 거기 순종하는 것이 지혜다.
그 내용을 말하면 무엇이냐? 간단히 말해서 위에서 사람노릇에서 말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다만 다른 것은 거기서는 개인이 그것을 하는 것이고 여기서는 전체로서 그것을 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만큼 어렵다.
나를 철저히 부정함이다. 나라란 뭐냐? 이상을 말한다면 나라는 전체지만, 실지에 있어서 정말 전체를 대표한 나라는 하나도 없다. 나라는 우상이다. 대표자가 자기가 곧 그이로라고 주장하는데 우상 된 까닭이 있다. 이때까지 모든 나라가 자기가 곧 전체로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국민의 복종을 강요했다. 참 전체는 그런 것 아니다. 체제와 개체의 관계는 세포와 몸 전체와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사랑으로 화(和)로 되는 것이지 법으로 묶음으로 강제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국가는 속이는 자였다. 이때까지 문명이 발달해 온 것은 보리가 자람에 따라 거기 보이지 않게 붙은 깜부기균도 같이 자란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삭이 나올 때 그 깝부기인 것을 감출 수가 없다. 오늘날 인류의 고민은 여기 있다. 실지에 있어 모든 국가는 전체라는 가면을 쓴 집단주의였다. 집단은 크거나 작거나 말할 것 없이 개인주의, 이기주의의 확대된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보리가 다 자란 때에 깜부기가 나오듯이 국가주의가 그 자랄 수 있는 데까지 자라고 보니 이제 그 속에 있던 모순 이 폭로되게 되었다. 현대의 인간의 할 일은 이것을 극복하는 일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나? 원리는 간단하다. 낱 사람이 참 자기를 깨닫고 자유하는 지경에 이르려 할 때에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 자기 부정이었던 것같이, 나라가 참 나라 됨에 이르려하면 스스로 자기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이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불행을 행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고 믿고 주장해오는 사람이다. 길 떨어진 것은 불행이었지만 앞선 부대가 자랑하던 그 길이 앞이 막힌 길일 경우 우리의 떨어진 것은 도리어 우리게 이익이 될 수 있다. 다만 새 지름길을 발견해 내는 수고를 겁내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다. 목숨을 걸고 참의 길을 찾아내는 그것이 자유의 길이다.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남을 살리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다. 그러므로 대적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생명은 하나요, 정신도 하나요, 진리도 하나요, 하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 지극히 못생긴 것 하나도 버리지 않을 생각을 함으로만, 무사한 99마리를 놓고 헤매는 한 마리를 찾을 생각을 함으로만, 전체는 살아날 수 있다. 낱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라의 경우도 남을 나의 수단으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남을 살리는데 내가 저절로 살아나는 길이 있다. 이때까지 자기희생을 개인도덕에서는 지극히 높은 것으로 찬양하면서도 국가도덕에서는 그러려하지 않고 제 나라를 위해 남의 나라를 희생시키는 것을 조금도 잘못으로 알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하고는 나라가 서갈 수 없는 시대에 왔다. 그것을 바로 잡는 것이 오늘 인간의 의무다. 그점에서 우리는 지름길을 발견하기 쉬운 자리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왜? 이때까지 우리는 가난한 자요, 그리고 목마른 자요 슬퍼하는 자요 억눌림을 당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마음대로, 뜻대로
나라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지만, 나라에만, 집착하는 것도 사람 아니다. 사람은 육체적인 존재지만 또 정신의 세계에 이미 머리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뵈지 않는 것이 먼저 있어서 뵈는 것이 나왔다.
나라노릇 못하고는 사람노릇 할 수 없듯이 마음대로 할 줄 모르고는 나라할 수 없다. 한동안 물질적인 생각이 왕성 했을 때 국가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지배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했던 일이 있지만 그것은 어리석고 거만한 생각이다. 도리어 반대로 스스로 겸손히 하여 자기는 감히 사람의 마음의 세계에는 관계할 자격이 없고, 오직 사회의 안녕질서를 유지해 가는 것을 자기 책임으로 하는 것이 정말 자격 있는 정치가라 할 수 있다. 사람노릇 할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면 감히 남의 양심까지를 건드릴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대로 라는 말은 누구나 쉽게 하지만 그런 사람들일수록 마음이 무엇임을 모른다. 이른바 마음대로가 정말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처럼 쉽게 하는 것이 없지만 옛로부터 모든 어진이가 보여주는 것은 마음은 참 알 수 없다.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良心眞心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풀이 다 곡식이 아니듯이 모든 생각이 다 참 생각이 아니다. 참 마음이란 모든 생각을 다 꺾어 버린 마음에야 알게 되는 것이다. 양심을 양심이라고 하는 이유는 良知良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마음도 아니요 네 마음도 아니다. 가르쳐서 얻은 것도 아니요 하자해서 되는 마음도 아니다. 良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해서 나은 생각이 아니라 그 마음이 있어서 내가 생겼다. 스스로 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사람을 따라 충돌이 되는 일도 없고 시대를 따라 변함도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 한다. 그것 은 쓰면 쓸수록 밝아지고 닦으면 닦을수록 맑아진다. 거기서 초월의 세계가 열린다. 누구도 다 그렇지만 특히 정치에 손을 대려는 사람은 그 세계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곡식을 가꾼다고 하다가 그 중요한 싹을 잘라 버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피 묻은 내손을 가지고 남의 손을 깨끗이 하자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면 내가 스스로 억제하지 못해 바람결에 흔들리는 터럭같이 푸르락 붉으락 이리 눕고 저리 뒤집히는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다스리겠다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죄악이다. 그러나 지배자만이 지배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근본에서 남을 지배하려는 마음이다. 정치가 지배적이 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지배하려는 심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국민이 양심에 복종할 줄은 안다면 지배 정치가 있을 여지가 없다. 복종할 줄 모르기 때문에 강제로 복종시킴을 당한다.
능히 참 마음대로 하는 자유의 지경에 가면 뜻을 알게 된다. 뜻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절대의 뜻이다. 이것을 알기 위하여서는 예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싶다.
“당신들이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당신들은 참으로 내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당신들에게 자유를 줄 것입니다”(요한 8:3,32)
진리란 참뜻이다.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모르기 때문이요, 그 세상을 이기고 나갈 힘이 우리에게 없는 것은 모르기 때문이다. 뜻은 절대의 명령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만나기만 하면 어기어 설 수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가 자유를 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절대의 뜻에 접하는 길이 어디 있느냐하면 예수는 자기가 하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사는데 있다고 했다. 간단히 말해서 절대 자유는 절대 복종에서 온다 그말이다.
나는 이 말을 읽으면서 다시금 생각했다. 씨알은 제각기 여무진 씨알 이어야하지만, 세상을 이기는 힘이 나려면 절대의 진리의 임금에게 절대 복종할 줄 알아야 한다고. 예수는 우리를 대표해 이미 말씀하셨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 뜻대로 하옵소서!”
모든 용감한 믿음의 씨알들은 이 말씀을 외우며 죄악의 권력에 용감히 대항하여 죽었고 기쁨으로 스스로 죽었으므로 다시 살아날 수 있었고 그러므로 지금도 말하며 역사를 건져주고 있다.
씨알의소리 1977년 2월 61호
저작집30; 7- 183
전집20; 5- 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