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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와 5.16
信天함석헌
4.19 고지
4.19 이후 오늘까지의 역사를 한 번 다시 씹어보기로 한다.
해방에서 4.19까지가 15년. 5.16에서 오늘까지가 17년.
무생물이나 생물이나 있기는 마찬가지지만 한번 생물이 나타나고 보면 생명은 목적이요 물질은 수단이다. 몸이나 정신이나 생명인 점에서는 마찬가지지만 일단 정신이 일어나고 보면 육체는 수단이요 정신이 목적이다.
1945년의 해방이란 것은 그러한 정신운동에서 36년 동안이나 물속으로 빠져들던 데서 다시 불끈 솟아올라 해 달 별 산천초목이 뵈는 수평선 위에 올라와 사람에 참여하게 된 날이다.
그후 15년은 올라가는 운동이다. 4.19란 하나의 전략적인 등성이다. 거기를 거점(據點)으로 삼고 더 높고 넓은 세계를 열어나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것을 기어오르기도 아주 극적으로 했고, 따라서 민족의 감격은 물위에 비로소 얼굴을 내밀고 새 천지를 보았던 해방의 날과 거의 못지않을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수증기와 공기의 압력으로 되는 폭풍우보다도 더 예측할 수 없고 웅크머리와 낭떠 러지의 뒤집힘 많은 것이 정신의 세계라, 손벽을 치고 만세를 부른지 제돐이 겨우 지나자 그 고지에서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5.16의 역사다…….
이런 연극 초안이라도 쓰는 듯한 생각을 해보는 것은 이 레비야단이 우리를 어떤 새 천지의 강변에 가져다 뱉겠는지는 모르나, 그때까지 잠을 자서는 아니 되겠으므로 하는, 갇힌 속에서 하는 정신 운동이다.
4.19와 5.16
4.19가 있은 지 불과 392일에 5.16이 왔지만 4.19와 5.16은 다르다. 다르지만 그것을 하나로 살려내야 한다. 살려내지 못하면 다 죽은 것이 돼버린다. 그러면 역사는 있을 수 없고, 역사가 없으면 사람은 없이 짐승만 남는다.
하나로 살려낸다는 것은 개개의 사건을 영원히 발전해 나가는 산 의미의 관련 속에 제 자리를 찾아 주는 일이다. 사람은 사건을 살기도 하지만 또 그 의미를 찾아내야만 정신적인 살림에 들 수 있다. 봄이 오면 따뜻해 살기 좋은 것을 만나고 겨울이 오면 추워 살기 어려운 것을 만나지만, 따뜻한 것만 따르고 추운 것은 싫어한다면 농사하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개의 사건의 성공 실패에만 집착하여 전체로서의 의미를 찾아내려 하지 않는 사람은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위대한 인류의 스승들이 진리 에 이르는 첫 단계로 일치해서 가르쳐 주는 말이 좋고 언짢고에 매달려서는 안된다고 한다.
노자는 그뜻을 이렇게 말했다. “성인(聖人)은 늘 잘 사람을 건져주므로 사람을 버리는 일이 없고, 늘 잘 물건을 건져주므로 물건을 버리는 일이 없다.”
또 더 분명하게는 이렇게도 말한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나라의 때(括)를 받아드리는 이가 나라의 주인이요, 나라의 궂은 것을 받아드리는 이가 천하의 임금이라 했으니, 바른 말은 뒤집힌 듯한 법이다.”
잘 하는 농부께는 봄이 좋듯이 겨울도 좋으며, 바로 사는 사람에게는 삶이 고맙듯이 죽음도 고마운 것같이, 역사를 능히 창조하는 사람에게는 성공이 의미가 있듯이 실패도 의미가 있고, 올라가는 길이 없어서는 아니 되듯이 내려가는 길도 없어서는 아니 된다. 그런 자리에 선 다음에야 역사를 말할 수가 있다. 선한 사람을 칭찬하고 선하지 못한 사람을 깔보는 마음이 없은 다음에야 사건을 공정히 판단 할 수가 있고, 사건을 바로 판단할 수 있어야 의미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4.19와 5.16을 말하기가 이렇기 때문에 어렵다. 4.19편에 서도 잘못이요 5.16편에 서도 잘못이다. 4.19도 우리가 한 일이요 5.16도 우리가 한 일이라는 자리에 서도록 하자는 것이 4.19가 있었고 5.16이 있었던 까닭이다.
역사는 연극이요, 사건은 소꼽이다. 연극은 연극인줄 첨부터 알고 하여야 연극이 되지, 그렇지 않고 그것을 진짜로 알면 싸움이 돼버리고 만다. 어린이들은 도리어 첨부터 소꼽을 소꼽으로 알고 놀고, 그러기 때문에 어른이 될 수 있는데, 왜 어른은 도리어 연극을 진짜나 되는 양 서로 싸우는 태세로 하려 들까? 영원한 종살이가 어디 있던가? 죽은 후에는 다 베껴지고 다만 역사를 메고 왔다는 자격만이 남지 않던가?
4.19는 이미 지나간 사건이므로 아직도 4.19 사람으로 주장하고 나서는 사람은 없다. 5. 16도 어느 때 가면 그렇게 될 것만은 뻔하지 않은가… … ?
4.19의 특색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다른 것과의 공통된 점과 거기만 있는 특수한 점을 분명히 파악하는 일이다. 사람의 사람됨 점은 다 같지만, 그 같은 사람됨을 세상에 둘도 없이 저만 독특으로 가지는 방식으로 나타내는 것이 사람이다. 독특한 살림으로 나타냄 없이는 삶이란 그저 죽은 하나의 추상뿐이다. 역사의 사건도 그렇다.
4.19의 특색은 그것은 순전히 젊은이, 젊은이 중에서도 학생이 한 운동이라는 데 있다. 그때 그들이 발표했던 선언문들을 보면 그 맥박을 아주 느낄 수 있게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그 운동에는 세대의 부르짖음, 시대의 명령이 막아 낼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나타나있다. 이것이 그 운동이 한번 터지자 감히 한 사람도 이러쿵 저러쿵 딴소리를 할 여지가 없이 전체 씨알이 호응하고 일어섰던 이유다.
거기 대조해 보면 5.16은 아주 다르다. 젊은이도 아니었고, 학생도 아니었다. 군인이었다……
둘째 특색은 비폭력이었던 점이다. 이점을 첫째 조건보다도 더 크게 평가되어야 한다. 아무리 학생이요 시대의 명령이 들어 있다 하더라도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면 씨알이 그렇게 감격으로 호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그 본성에서부터 평화적이다. 더구나도 그 씨알의 일어섬에 결정적인 자극을 주었던 교수들의 분기가 그것을 증거해준다. 이점에서는 5 .16은 새삼 비교할 필요조차 없다.
그리고 한가지 더, 처음부터 정치적이 아니었지만 나중 가서도 정치적이 아니었다. 진리감 정의감에서 부르짖은 부르짖음이었지, 정권을 쥐자는 의사나 정책적인 변경을 목적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강점이지만 또 약점이기도 하다. 엄정하게 말한다면 이것은 학생보다도 그 운동의 제2부를 맡았던 정치인이 했어야 할 것이지만,이점은 있다가 말할 대로 훨씬 더 깊은 까닭이 있다. 이점에서도 5.16은 처음부터 다르다.
4.19의 유래
4.19 운동은 어떻게 되어서 있게 됐던가?
첫째 해방 직후의 학생 운동에서 나왔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럼, 해방 후에 학생들은 왜 가만있지 않았던가? 그 운동은 무슨 운동이었나? 한마디로, 그것은 기성 정치인,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이요, 경고요, 호소였다. 해방 직후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다 같아 아깝게 생각하는 일이지만, 해방의 소식이 머리 위에 떨어졌을 때 민족 전체는 누가 시키고 가르킨 것 없이 한 큰 감격에 넘쳤다.
지난날의 모든 괴롬 슬픔을 다 잊어버리고, 자기와 남의 모든 잘 잘못을 다 생각할 겨를 없이, 전체가 한통치고 기쁨과 희망의 감격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그 이유는 그 물려 들어갔던 죽음의 턱아리가 너무 깊었었을 뿐 아니라,그 스스로 저지른 죄가 너무 깊어 도저히 살아나갈 용기가 없을 뿐 아니라 감히 살겠다할 염치조차 없는 줄을 잘 알고 있었던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해방의 소식은 정말 글자대로 천래(天來)의 복음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큰 역사적 사면이요, 민족적 회심이었다. 그런데 정부수립 문제가 나오자 그 모든 감격과 희망이 다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천거하는 사람 없이 저마다 나라일 하겠다고 자천하고 나서기에 믿고 내버려 두었더니 기대하던 통일정부는 종시 세우지 못하고 말고, 보기 싫은, 옛날의 당파싸움을 다시 생각나게 하는 난투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것을 보고 견딜 수 없어 일어선 것이 학생들이었다.
학생이 뭔가? 젊은이요, 왕성한 슬기(良識)이다. 그러므로 그런 때에, 기성세대가 제 역사적 의무를 올바르게 다하지 못할 때에, 학생이 일어서는 것은 자연한 일이요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 아니라, 바로 삶 그 자체가 가르키고 시대 그 스스로가 소리를 내기 때문에 되는 일이다. 지금도 이따금 학생의 데모를 비난하면서 공부하는 학생 자신의 본분을 잊고서 하는 망동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마치 연한 순의 왕성한 진액의 오르내림을 싫어함으로 점점 말라드는 가지의 꼴과 같은 논리다. 빳빳은 하지만 그것은 조만간 부러져 떨어질 징조밖에 되는 것 없다. 노자가 옳다. 堅剛表 死之徒요 柔弱者 生之徒다. 굳고 빳빳한 것은 죽음의 무리요, 부드럽고 연한 것은 삶의 무리다. 마른 가지는 꺾고 연한 순은 햇빛과 바람 속에 마음껏 춤추게 하여라.
본래 해방의 소식이 왔을 때 가장 먼저 했어야 할 일은 민족의 체질 개선이었다. 묵어서 창조력 없고 병과 버러지의 씨만 가지고 있는 묵은 가지를 잘라버리고 새 시대에 앞을 피우고 꽃을 피우는 새 가지를 내는 일이다. 우리 역사의 곁가지가 늙고 병들고 좀먹은 지는 벌써 오래다. 남들이 다 하는 근대화의 혁명을 못하고 식민지로 떨어져버리고 만 것은 이 늙음과 병과 해충 때문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봉건시대의 찌꺼기라 하자. 아니면〈양반살림〉버릇이라 하자. 이 맞는 해방이 민주주의의 해방인줄 알았다면, 우선 이놈의 저주받은 양반 기질, 되지못하게 젠 체, 아니꼽게 무슨 특권이나 있는 체, 모든 사람을 누르고, 깔보고, 짜먹고, 갉아 먹고,나중엔 저도 좀똥처럼 삭아 버리고 마는, 그 좁고, 옅고, 비뚤어지고, 고린내나고, 독실스런, 그런 사고방식, 행동방식, 살림버르장이를, 깨끗이 청산해 버렸어야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 양반의 버릇으로 씨 그 자체까지 병이 들었으니 어떻게 할까? 오래 눌리고 짜먹히우는 동안 체념하고, 게으르고, 비겁하고, 회피하고, 공공한 것이 무엇임을 모르고 내 발등만 보려는 약아빠진 생각을 하는 것이 버릇이 됐다.
그러므로 큰 눈으로 볼 때 소망이 있는 것은 젊은 세대 밖에 없었다. 그러니, 권력욕에 미쳐서 나 아닌 것은 다 아니라 하지 않는 한, 학생들이 일어섰던 것은 잘한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또 기성세대야 어찌 봤던 간 학생들의 눈에는 자기네의 선배가 한 일이 옳다고 보았을 것이 당연하다.
둘째,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히 그 뿌리가 3.1운동에까지 올라가야 한다. 4.19 학생들은 해방 직후의 학생운동을 아는 동시 또 3.1운동 때의 학생의 궐기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3.1운동은 그 일어난 시작도 학생에서요, 그 후 그 운동의 중심 세력이 된 것도 학생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새 술을 새 부대가 넣는 것은 당여한 일이다. 오늘의 학생과 그 저항운동을 생각할 때도 그 정신이 3.1에서 나오는 것임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신통히 늘 그 원줄기는 놓치고 그 가지만을 가지고 말가지를 따려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몰라서가 아니다. 반동자는 언제나 제 죄를 알고 있으며 또 의식적으로 씨을 속일 논리의 도망 길을 찾는 것이기 때문에 잘 알면서 일부러 하는 궤변이다. 그러므로 사함을 받을 기회가 없다. 역사를 말하는 데 있어서 개인적인 도덕적 결함을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그 서는 역사의 입장이 옳았을 때 그는 정의의 군대 속에 선 것이요, 정의의 눈에 가담했을 때 지난날의 모든 작은 도덕의 잘못은 다 사면을 받은 것이다.
또 혹은 3.1 때에는 우리를 지배 하려던 다른 민족에 대한 것이니 무조건 옳지만 해방 후는 우리 민족 안의 일이니 무조건 긍정할 수 없지 않으냐 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도 모르는 말이다. 일본 시대에 싸운 것은 일본인 때문에 싸운 것이 아니라 그 불의 때문에 싸운 것이다. 오늘 싸우지 않고 동족이라 다 허락해 두면 무조건 정의가 되느냐 하면 아니다. 민족이 정의 안에 있지, 정의가 민족 안에 있는 것 아니다. 예수 말씀하시기를 “누가 내 어머니요 내 형제냐?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이다.” 아무리 한 피에서 났더라도 형제의 인권을 짓밟으려는 자는 가차 없이 잘라버려라. 그것은 우리의 형제가 아니다.
셋째, 그러나 위의 둘보다도 더 큰 영향을 4.19에 끼친 것은 「사상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 위의 둘은 역사를 통해 주어진 것이지만 「사상계」는 받아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리고 잊어버리지 않도록 깨우쳐주고 부족한 것을 알아내어 배워 얻을 수 있게 하는 정신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이 근본이요, 근본이기 때문에 귀하지만, 사실은 사실의 의미를 깨달아서만 사실이 된다. 자연적으로 반응함에 의하여 이루어진 사실보다도 그 사실을 자료로 삼아가지고 분석하고 비판하여서 다시 구성한 정신적 사실이야 말로 역사의 다음 구절을 낳는 원동력이 된다. 거기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사상계가 우리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에 있어서 어떻게 큰 역할을 했느냐 하는 것은 오늘의 형편과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3.1운동의 기억도, 해방 직후의 기억도, 4.19의 기억도, 다 잊지 않고 가지고 있는데, 오늘도 그 지나간 때들과 마찬가지로 답답함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인데, 어째서 시원한 운동이 없느냐? 두말 할 것 없이 6.25 이후에 사상계지가 했던 사 명을 하는 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왜 오늘은 없느냐, 그것은 여기서는 아니고, 어느 때에 가서 할 과제지만 오늘에 사상계가 그때에 있어서 했던 사명을 능히 하는 기관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만은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상계가 그런 큰일을 했던 것은, 그것을 누가 창립 경영하고 누구누구가 글을 썼다는 것보다도 그 일어났던 시기와 그 활동이 이루어진 방식에 있다 해야 할 것이다. 그 잡지가 시작된 것이 6.25 전쟁 때 부산 한 구석에 몰려 있는 1953년이었다. 이것을 전쟁 전에 공비의 출몰이 심해 한때 아주 위험했던 것과,6.25를 체험하고 난후 누가 특별 지도함 없이 국민의 사상의 방향이 아주 분명히 민주주의 노선으로 결정이 되었다는 두 사실과 겸하여 생각하여 볼 때 자연 거기 알려지는 것이 있는 것을 알 것이다. 장준하는 제 때에 나와야 할 소리를 시작했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장준하가 했다기보다는 시대 자체가 한 것이요, 씨알 자체가 한 것이다.
그리고 한창 때 그를 중심으로 모여서 한때 낙양의 종이 값을 높였다 하던 때의 그 사람의 진영을 보면 과연 그때의 정설분자들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그 정설분자의 성격이 어떤 것이냐? 그중에도 가지가지의 온 인물들이 있었으니 하나로 묶어 말하기 는 어렵지만, 그들이 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한때 세계를 휩쓸었던 넓은 의미의 자유주의, 인도주의, 평화주의의 영향을 입은 지성인인 점에서는 일반일 것이다. 그러면 민주주의를 스스로 제 나갈 길로 택한 (분명히 알고 택한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택한 것만은 사실이다) 씨알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들어맞은 영양식이었을까? 한때 젊은이들이 사상계를 읽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라할 정도로 생각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다 같은 학문을 한 사람들도,다 반드시 자유를 생명으로 안 사람들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중에 지금 이 체제의 정권의 중요한 분자로 있는 사람을 나더러 꼽으라 해도 여럿을 꼽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들이 다 민주주의의 기수였다. 어디서 그것을 배웠나? 그들의 선생들은 대개가 일본제국주의 학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당시 사람들이 다 받는 세례를 원하거나 아니 원하거나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시대의 교육은 그렇게 무섭다.
허지만 또 자동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그 일본제국주의 밑에서 교육을 받았으면서도,3.1운동의 영향을 입지 않았다면 그 제국주의의 독소를 면치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사실 3.1정신의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당시에 받았던 제국주의식 사고방식을 지금도 면치 못하는 사람도 있다.
하여간, 일제 아래 있으면서도 시대를 통해서 받았던 그 자유주의적인 경향으로 인하여서 해방 후 그들이 자라나려는 민주주의의 지도 역할을 한동안 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그것이 사상계라는 거의 단 하나의 길을 통하여서 쏟아져 나갔다. 저도 모르게, 자기의 의식보다는 시대의식 혹은 종족적인 의식에 몰려 많은 젊은이가, 어린이가 본능적으로 젖꼭지를 찾듯이, 그 자유주의 사상의 물을 찾아 다투어 마신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치만 거기 아쉰 점도 없지 않다. 첫째는 그 수명이 길지 못했다. 장준하나 그밖에 그 경영에 나섰던 사람들의 부족이 어느 정도 있는지 그것은 모르지만, 그 아쉼의 대부분은 정치 흐름에 돌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죽은 아이의 나이를 세어보아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아니다, 죽은 이의 나이를 세어보는 것이야 말로 사람이다.
그러나 짧은 그 수명을 가지고도 반성해 볼 것은, 정말 수술의 칼을 깊이 넣었어야 할 데 칼을 넣지 못하고 말았다. 위에서 말한 봉건시대의 찌꺼기, 양반버르장이를 도려내려 하지 못한 점이다. 생각은 있었지 없지 않았던 줄 안다. 1963년 하던 여행을 중도에 끊고 허둥지둥 돌아왔을 때 내 입으로 장준하 보고 한 첫 말이 “정치 하려오,아니 하려오”했더니, 자기는 정치는 아니 한다고 그때는 그랬다. 그래 그거 대해 나는 “아니한다면 몰라도, 하려거든 어서 이제부터 제3의 새 힘을 기르시오” 했고, 어느 때는 월간보다는 주간 잡지를 하라고 권했던 일도 있다. 씨알(그때는 아직 씨알이란 말 쓰지 않았지만)을 기르려면 월간 보다는 주간이 나을거라는 생각에서 였는데, 그랬더니 대답이 “그래서 벌써 ᄋᄋᄋ씨를 전수히 그것 때문에 외국 보내어 연구중입니다.”했다. 물론 내가 생각한 주간은 오늘 길거리에 오줌처럼 흘러 나는 그런 따위 주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여간 민족의 고질에 한번 수술의 칼을 넣어주는 이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은 내게도 있었고 그에게도 있었다. 생각은 있으면서 못했으니 그 죄를 어디 도망할 수 있을까? 이것은 유산은 못 넘겨주고 빚만 넘겨주는 셈이지만 빚이라도 넘기면 같이 역사를 메자는 마음이 있는 줄은 알지 않을까?
4.19 실패의 원인
이절까지 쓸 작정이었으나 나와 게으름으로 인쇄 시간이 급해져 부득이 잘라 다음 기회로 넘기고, 이것도 4.19처럼 하다 채 못한 말이 되고 만다.
씨알의소리 1977년 4,5월 63호
저작집30; 5- 185
전집20; 17- 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