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파선이 되어 버린 나의 분신>
2005년 3월 15일, 나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서울고등검찰청에 항고했다. 항고를 하려면 처음 고소를 맡았던 원청인 서울중앙지검 사건과에 접수한다. 이런 절차를 두는 것은 서울고등검찰청에 수사관련 기록을 넘기기 전에 서울중앙지검의 항고사건을 담당하는 검사가 한 번 더 수사기록을 살펴봐서 피해자의 억울함을 구제하는데 있다. 그래서 수사가 잘못됐거나 담당 검사가 법리적으로 착오를 했다고 발견되면 자체적으로 재수사하는 제도이다.
그래서 나는 삼성SDS의 사기혐의를 입증하는데 충분했던 증거는 모두 배제하고 우리은행과 삼성SDS의 엇갈리는 진술만으로 무혐의 처분한 과오를 바로 잡아주길 간절히 기도했다. 어느 조직이나 그렇듯, 한두 명의 부패한 검사는 있을 수는 있겠지만 전체 검사가 부패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토록 간절했던 나의 희망은 이틀 만에 짓밟히게 되었다. 서울지검의 항고 담당 검사는 서울고등검찰청으로 수사기록을 곧바로 송부했기 때문이다. 이래서 ‘검사동일체’ 라고 하는 말인가 싶었다.
그래도 나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려는 절박한 심정으로 서울고등검찰청 담당 검사실로 일주일에 두세 번씩 전화를 했다. 피눈물 나는 사건이니 제발 좀 공정하게 수사해 달라고 간청했다. 전화를 받는 여직원은 매번 메모만 남겨 달라고 했다. 담당 검사와 직접 통화는 불가능했다. 그렇게 절박한 전화를 계속하자 언제 하루는 서울고검으로 출두하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계세경 상무에게 사건을 최대한 쉽게 요약해서 함께 가자고 했다. 계 상무는 명문 공대를 수석으로 졸업 후 농협에 일등으로 입행한 엘리트 출신으로 사건진행에 대하여 꼼꼼한 기록과 함께 내가 못 챙기는 부분을 대신했다. 이번 서울고검의 담당 검사는 박철 검사였다.
나와 계 소장이 사무실에 들어서자 여직원은 선약을 확인한 후 담당 검사실로 안내했다. 난생 처음 들어가 보는 검사실이었다. 나와 계 상무가 검사실에 들어서자 박철 검사는 손가락질을 하면서 무슨 죄인을 대하 듯 폭언을 퍼붓기 시작했다.
“내가 삼성SDS 변호사 만나봤는데, 당신 148억 원 민사소송을 냈다면서? 당신 미쳤어?”
“삼성은 검사 열 명이 달라붙어도 기소 못해!”
나는 속으로, 내가 죄인도 아닌데 민사소송과 항고한 형사사건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무지막지한 폭언을 대놓고 하는지 기가 막히면서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러면서 박 검사는 본인도 너무 심했다는 것을 아는 듯,
“그런데 말이야, 내가 기록을 쭉 살펴보니까, 삼성이 해도 너무하긴 했네. 야, 정말 너무 심하게 가격을 후려쳤다. 이거 민사소송하면 돈은 좀 되겠는데, 민사나 하고 형사는 관두지?” 라며 빈정거렸다. 이 내용은 2005년 9월 27일 <민중의 소리>에서 "당신 미쳤어? 검사 10명 붙어도 삼성 기소 못해" 제목으로 보도 함.
검사의 본분을 망각한 박철 검사의 폭언과 괴변을 듣고 있자니 그동안 참고 참았던 울화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그래, 차라리 여기 있는 집기들 다 부숴버리고 유리창도 다 박살내버릴까?” 하면서 뭔가 일을 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야 세상이 나의 억울한 사연에 귀 기울여 주고 관심을 가져줄 것만 같았다. 주먹 쥔 손이 저려오고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옆에 있던 계 소장은 불안했던지, 내 옆구리를 찌르면서 참으라는 사인을 보냈다. 난생 처음 들어가 본 검사실에서 인간이하의 모욕을 당한 치욕의 날이었다.
마침 그날은, 언론노조와 민주노총 주관으로 태평로 삼성 본관 앞에서 촛불집회를 하는 날이었다. 사실, 나는 연사로 초대 받긴 했지만 검찰 수사로 가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워낙 열을 받아서 그런지 서울고검을 나와서는 태평로 삼성 본관으로 직행했다. 너무 일찍 도착한 시간이라 그런지 시위용품과 깃발만 보였다. 나는 오늘 한번 제대로 해보려는 각오로 계 상무와 함께 삼성 본관 근처에 있는 콩나물 국밥집에서 대자를 시켜서 먹었다.
저녁 식사 후 삼성 본관 앞으로 갔더니 꽤 많은 사람들이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고 얼마 후 집회가 시작되었다. 난생 처음 참가하는 시위현장 이었지만 당당하게 연사로 나가서 삼성의 만행과 검찰의 몰상식한 행태를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
“안녕하세요? 얼라이언스시스템 조성구 사장이라고 합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상생경영, 나눔경영, 윤리경영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삼성이 중소기업 등치나 치고 검찰이 봐준다면 이 나라 중소기업은 갈 곳이 없습니다.” 이렇게 성토하는 동안 방송국 취재 카메라는 나에게 집중되었지만 어느 한 곳도 방송을 내보내진 않았다. 이 날은 비까지 내려서 내 분노를 식혀주는 것만 같았다.
“삼성은 검사 열 명이 달라붙어도 기소 못해!” 라는 검사의 망언을 이야기 할 때는 함께 참석했던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조차도 긴 한숨을 쉬었다.
이 내용은 2005년 8월 24일 <오마이뉴스> 빗속에서도 불타오른 '이건희 처벌 촛불' 제목으로 보도 함.
서울고검 박 검사의 폭언으로 별반 기대도 안했지만 2005년 8월 30일 항고했던 사건 역시 무혐의 처분되었다. 그렇지만 중학교 시절 못된 친구들은 짱돌을 들어서라도 손을 봐주고 녀석들의 통학용 자전거를 날마다 바람을 뺀 나였기에 끝까지 가기로 다짐했다.
그동안 두 차례 동안 검찰의 비열함을 경험한 나였기에 그들에게 공정한 수사를 기대 할 수 없었지만, 2005년 9월 16일 대검찰청에 재항고장을 접수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사건을 마약 수사본부에 배당하는 게 아니가? 그 당시 처음에는 도무지 믿겨지질 않았다. 내가 무슨 마약을 제조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약상도 아닌데 말이다. 삼성과 끝까지 해보려 하니까 마약판매상으로 무슨 올가미를 씌우나 싶기도 해서 겁이 덜컥 났다.
결국 대검찰청에 재항고한 사건마저도 마약반에서 최종 무혐의 처분이 되었다. 이젠 대한민국 검찰청에 삼성SDS의 사기혐의를 고소할 수는 있는 방법은 더 이상 없다. 2004년 8월 23일 삼성SDS를 고소한 이후 1년 6개월 동안 애간장만 탔고 괜히 쓸데없는 시간과 노력만 허비한 꼴만 되어 버렸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방법인 헌법소원을 준비해서 라도 어떻게 해서든 삼성SDS의 사기행각을 밝히려 노력 했지만, 나의 분신과도 같았던 얼라이언스시스템 호는2005년 11월 17일 끝끝내 최후를 날을 맞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한 솥밥을 같이 먹었던 사외이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물론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각본과 함께 진행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업무상배임 행위도 노골적으로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대표이사였던 나를 강제로 해임하였다. 내 집과 주식을 담보로 빚을 내서 봉급도 주고 스톡옵션까지 주었던 사장이었는데도 말이다. 아마도 이렇게 불법적이고 비참하게 내쫒긴 사장은 나 말고 또 누가 있을까 싶다. 마치 등에 대놓고 칼을 꼽듯이 말이다.
11명의 등기이사들 가운데 여섯 명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각본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기어코 나를 대표이사 직에서 끌어 내렸다. 임직원들의 회유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젊은 청춘을 다 바쳐서 어렵게 띄운 얼라이언스시스템 호는 사악한 암초에 찢기고 부서진 채 더 이상의 항해는 불가능했다. 어딘가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말이다.
대한민국에 법이 있다고 하지만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세상인 것 같다. 이 땅의 중소기업인과 노동자는 힘없다고 그저 죽으라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