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 맺은 의형제>
앞서 이야기 했듯이 2004년 8월 삼성SDS를 서울중앙지검에 사기혐의로 고소 후 인터넷 매체를 시작으로 내 사건은 집중 조명되었다. 그러자 한나라당을 시작으로 집권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 그리고 민주노동당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한나라당 서상기 의원은 2004년 10월 14일, 한국SW진흥원과 한국정보보호진흥원을 상대로 한 국정감사에서 "대기업인 삼성의 전횡으로 국내 중소 소프트웨어 업계가 고사위기"라고 지적하고 이에 대한 대책마련을 촉구했다. 그리고 내가 고소한 사건에 대해 "대기업의 횡포에 희생되는 중소기업이 많고 이번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우려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현상이 소트프웨어 산업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지적하고 이를 막을 구체적인 대안까지 제시했다.
그리고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에서 운영중인 분쟁조정위원회나 고충처리센터가 있는데 실효성이나 권위가 없다."면서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 처럼 준사법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실질적인 조직으로 만들면 어떤가?" 라고 묻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공공 프로젝트의 입찰방법 개선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내가 삼성SDS를 고소하자 국회의 반응은 뜨겁기만 했다.
나는 그 당시 참여정부의 친재벌 위주의 정책에 실망하여 제도권의 도움을 받기위해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 운동본부를 찾아갔다. 그리고 삼성SDS의 횡포를 국회에서 관심을 갖고 지속적인 제도권의 지원을 요청했는데, 당시 이선근 본부장께서는 재벌대기업들의 횡포에 대하여 익히 잘 알고 있던 터라 나에게 용기 잃지 말고 끝까지 함께 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심상정 의원실에 내 문제를 소개했고 결국 국회 귀빈식당에서 조찬토론회를 첫 시작으로 내 문제가 국회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민주노동당이 중소기업 문제에 대하여 이처럼 큰 관심을 갖고 있을 것으로는 기대를 못했는데, 그는 오래전부터 이 나라 경제민주화를 위해서 일평생을 헌신하고 있었다.
그는 현재 ‘경제민주화를 위한 민생연대 공동대표’ 로 활동하고 계시는데 '학림사건'으로 억울한 옥고도 치루시고 전기고문 등 인권탄압도 받으셨던 분이다. ‘학림사건“에 대한 재심판결은 2012년 6월 16일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되었다. 그의 의협심과 정의감은 내가 만나 보았던 국회의원들과는 감히 비교조차도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
나는 이때부터 이선근 본부장과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속 끓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레 끈끈한 정도 일기 시작했다. 내가 이 나라 최대의 재벌대기업인 삼성과 맞장을 뜨는 입장이라 그의 존재감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마치 집안의 큰 형님처럼,
이렇게 그와는 끈끈한 정을 쌓으면서 2005년 11월 회사를 빼앗긴 후 2006년 2월 대·중소기업상생협회를 설립하면서부터 본격적인 만남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나와는 상생협회의 모든 정책과 사업을 상의하였고 함께 추진하는 동반자적인 운명이 된 것이다. 훗날 그는 민생연대의 대표로서 자리매김하여 영세 상인을 구제하는 일에도 혼신을 다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나라 사회적 약자를 위해 상가임대차 법을 기획하고 제정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당사자이기도 했다. 결국 경제민주화를 저해하는 재벌대기업들의 횡포를 성토하는 자리에 이선근 대표와 나는 형님 동생처럼 활동하게 된 것이다.
2006년 11월 24일 오전 11시, 경제민주화운동본부 이선근 본부장과 나는 대·중소기업상생협회 회원사들과 함께 과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공정거래위원회 직원들의 금품수수 규탄집회를 하였다. 이날 기자회견은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의 부당 내부거래를 조사하던 공정거래위원회 직원들이 현대차그룹으로부터 700만 원 상당의 금품을 받은 행위를 규탄하고 관련자의 즉각 파면을 요구하기 위해 이선근 본부장과 함께 마련한 것이다.
이선근 본부장은 “금품을 받은 직원 중 한 명이 사흘 뒤 자기 몫의 상품권을 현대차 측에 돌려주자 다른 직원들은 이 직원을 질책하고 폭언까지 하는 등 공정위 직원들은 대기업으로부터 뇌물을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 충격을 금할 수 없다”며 관련자들의 파면과 형사처벌을 요구했다.
또한 나는 “부당내부거래는 건전한 기업발전을 가로막고 재벌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불법적 지원행위이며 중소기업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범”이라고 규탄한 뒤 하도급 부당거래의 전면 재조사를 요구했다.
2007년 9월 19일,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상생협력 청와대 보고대회가 열리는 던 날 이선근 본부장과 나는 폭우를 맞으면서 참여정부의 상생협력 정책은 속빈강정이라고 성토를 하였는데 상생협회의 피해 중소기업 회원사들도 대거 참석하였다. 그는 이날 “재벌총수들은 Value Engineering(가치공학)을 얘기한다. 그 가치공학은 대기업 경영이 어려우면 하청업자의 납품 가격을 깎아버리며, 중소기업의 생사를 가로막는 경영이다”며 “그 재벌총수들에게 지금 청와대에서 밥을 주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기업의 침탈을 받은 중소기업 대표들에게 진정 상생할 마음이 있는지 물어보고 밥을 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나는 “우리나라 대기업은 제품에 대한 연구개발 투자로 인한 경쟁력 확보로 시장에서 판매이윤을 극대화하기 보다는 ‘협력업체를 쥐어짜서 이윤 극대화하기’를 해 왔다”며 대기업의 몰지각한 윤리의식을 꼬집었다. 그리고 “사법부는 대기업에 지나칠 정도로 관대하고 공정거래위원회 역시 대기업의 파수꾼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전속고발권’ 제도로 피해를 입은 중소기업이 가해자인 대기업을 검찰에 고소고발 할 수 없게 돼 있다”며 공정위의 ‘전속고발권’ 제도를 폐지하고, 피해 중소기업이 직접 검찰에 고소하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뿐만 아니라 불공정거래 상습적발 시 ‘3진 아웃제도’를 위해 상상협력 촉진법을 전면 개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처럼 그와 나는 재벌대기업들의 횡포와 만행을 성토하는 자리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필연적 운명을 함께 하면서 동지적 관계 이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2007년 늦가을, 여의도 어느 삼겹살집에서 쓰디쓴 소주를 함께 나누다 평소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내가 먼저 그에게 꺼냈다.
“이 본부장님, 우리 아예 의형제를 맺으면 어떨까요? 가시밭길 함께 가시는데 형님 동생으로 같이 가면 덜 외롭고 힘들지 않을 것 같아서요.” 했더니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허허, 대·중소기업상생협회 조 회장님을 의동생으로 맺으면 더 없이 영광이고 든든하고 좋겠습니다.” 했다. 그리고 이선근 형님께서는 증인으로 심상정 의원에게 나와 의형제 맺은 소식을 전화로 알렸다. 그 후로 그와는 친형제 이상의 특별한 행보를 시작했다.
그러나 2008년 민주노동당의 분당사태로 민생보호활동이 어렵게 되자 이선근 본부장은 안정적인 활동을 위해 구로동에 ‘경제민주화를 위한 민생연대’라는 시민단체를 설립하였다.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의 활동가들은 변함없이 그와 함께 민생보호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민주노동당이 분당되지 않았다면 총선에서 높은 지지를 얻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을 것이다. 분당 후 이선근 형님과 소주를 한잔하게 되면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다.
“동생, 퇴행적인 좌우 정파들 때문에 민주노동당이 쪼개져서 너무 미안하네. 분당만 되지 않았어도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해서 동생문제 만큼은 꼭 진실을 밝혀서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삼성에게 당하고 검찰에게 버림받은 동생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가 없네...가정은 점점 힘들어져만 가지?” 라며 고개를 떨구며 연거푸 쓰디 쓴 소주를 들이켰다. 그리고는,
“동생, 이젠 어쩔 수 없이 장기적인 싸움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동생이 민생연대 부대표직을 맡아서 나와 함께 시민의 힘을 모아 해결해 나가자.” 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회사의 연대보증책임으로 은행과 기술신용보증기금 등의 빚 독촉으로 인해서 삶의 현실이 하루가 다르게 곤두박질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