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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멜 표류지 ◇
헨드리크 하멜(Hendrick Hammel.1630~92)은 1630년 호트쿰시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네덜란드 연합동인도회사에 서기로 취직해 스페르웨르호를 탔다. 이 배는 함포 30문이 장치된 3층 갑판의 5백40톤급 범선이다. 이 배는 1653년 대만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 8월 16일 제주도에 표착한 것이다. 선원 64명 중 36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들이 표착한 곳은 그동안 남제주군 산방산 아래 용머리 해안가로 생각돼 하멜기념비가 진작 세워졌고 하멜상선전시관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근래에 발굴된 제주목사를 지낸 이익태(李益泰.1633~1704)의 '지영록(知瀛錄)'에는 "차귀진(遮歸鎭) 아래쪽 대야수(大也水) 연변"이라고 명확히 기록돼 있다. | |
하멜 일행은 일단 제주도에 억류돼 있었는데 표착 10개월 만인 1654년 6월 탈출하려다 붙잡혀 모두 서울로 압송됐다. 서울로 끌려와서는 효종의 신문을 받았다. 임금은 이들에게 호패를 내려주며 훈련도감의 박연 아래 배속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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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귀화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일행 중 2명이 청나라 사신에게 호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외교문제로 번질 공산이 커지자 조정에선 청나라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입막음하고 모두 강진으로 유배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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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각종 잡역에 동원됐고 한 달에 두 번은 점호를 받으며 주로 병영성과 장터의 풀을 뽑는 일을 했다. 하멜 일행은 병마절도사에 따라 가혹한 사역을 당하기도 했다. 하멜은 흉년과 질병이 유행할 때 동네 사람. 승려에게 도움 받은 고마움을 잊지 않고 기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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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이 탈출한 곳으로 알려진 여수의 하멜 등대)
* 꿈도 없이 억류생활만 계속되는 하멜 일행은 탈출했다. 풍랑을 넘고 넘어 이들은 3일 뒤 일본 고도(五島)에 표착했다. 그리고 곧 나가사키의 본사로 인계돼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조선에 표착한 지 13년28일 만이었다.
* 하멜은 나가사키에 체류한 1년간 지난 13년 동안의 일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하멜의 보고서는 곧바로 책으로 출간돼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 '하멜 보고서'(중앙M&B)는 기행문학으로도 성공해 유럽의 유명한 기행문학 전집 속에 들어갔고 이 책은 결국 조선왕조 5백년 역사상 외국인이 쓴 가장 충실한 조선견문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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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멜 표류기 |
* 하멜 기념비 |
* 하멜의 조선 표착에서 탈출까지의 연도별 기록
▒ 1653년 8월 16일 제주 표착 ▒ 1653년 8월 21일 대정 현 관아로 이송 ▒ 1653년 8월 22일 제주 목 관아로 이송 ▒ 1653년 10월29일 박연(벨테브레)와 면담 ▒ 1654년 6월초 선박이용 제주항 출발 ▒ 1654년 6월26일 한양도착 ▒ 1656년 3월초 전라병영(강진)으로 이송 ▒ 1663년 2월 생존자 22명을 여수, 남원, 순천으로 분산 ▒ 1666년 9월3일 탈출.9월13일 일본 나카사키 도착 ▒ 1667년 12월18일 나카사키 출발 ▒ 1668년 7월 20일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도착
* 하멜은 귀국해 『하멜표류기(Relation du naufrage dúm Uaisseau Hellandois, Narrative of Hollander Wrecked at Quelpart)』와 『조선왕국기(Description du Royaume of Corée, Description of Kingdom of Korea)』를 저술해 극동의 은둔국(隱遁國)인 조선에 대해 지리, 풍토, 산물, 정치, 군사, 법속(法俗), 종교, 교육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비교적 소상하게 묘사했으며, 이로써 세계에 조선을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저술들이 후일에 네덜란드 선교회가 파송한 귀츨라프 선교사가 한국을 찾아오게 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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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 용마루해안에 세워진 '하멜 상선전시관'은 난파된 스페르웨르호를 80%로 복원한 것으로 배의 길이가 36m가 넘는 거대한 범선이다. 내부에는 하멜의 표류 과정부터 '하멜 보고서' 출간에 이르는 관계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하멜호는 하멜 표착 350년을 기념하여 2003년 8월 16일 준공되어 개관하였다. 유홍준. 「350년 전 ‘코리아’ 유럽과 마주치다」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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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치: 제주특별자치도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