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 살다보면 황당해할 때가 있는 법이다. 정보라의 『저주 토끼』가 그랬다.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는 기사를 접하고 궁금해서 책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내게는 그저 생뚱맞고 전혀 엉뚱한 이야기들이 가득한 것 같았다.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소설은 내게 그렇게 낯설었다. 저자는 “세상은 대체로 사납고 낯설고 가끔 매혹적이거나 아름다울 때도 있지만 그럴 때조차 근본적으로 야만적인 곳”이라고 규정한다.
그런 다소 모순되어 보이는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외로울 수밖에 없으며, 이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단정한다.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라며 그런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갖가지 방식으로 세상과 교류하는 것이라는 온기 없는 말이 섬뜩하다.
어찌 보면 산다는 게 저자의 말처럼 사랑하거나 기뻐하기보다는 주로 좌절하고 절망하고 분노하고 욕망하고 분투하고 배신하고 배신당하거나 살해하거나 살해당하는 과정의 연속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저자는 그런 외로운 인간들에게 이 책을 통해 위안을 주고 싶었고 말한다.
숨 쉴 공간조차 찾기 어려운 인간에 대한 쓸쓸한 위로다. 그런데도 출판사에서는 ”불의가 만연한 지금 같은 시대에 부당한 일을 당한 약한 사람(들)을 위해 복수하는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서 이 단편집을 내기로 했다“고 한다.
나는 책에서 불의를 읽어내지 못했다. 부당한 약자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저 쓸쓸함에 대한 위로를 언뜻 읽었을 뿐이다. 그런 이야기가 복수로 탈바꿈 할 수 있다는 건 놀랍다. 출판사와 저자 사이의 거리가 참 멀다.
어떻든 이 소설이 부커상의 최종 후보에 올랐다. 그것이 내가 이 소설을 찾은 이유이다. 회종 후보에 오른데 대한 작가의 소회는 간명하다. “한국 장르 문학이 이 정도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는 수준에 올라다는 사실이 증명되어 그 점이 기쁘다”고 했다.
그 말은 장르 문학이 겪었을 법한 고단함 같은 것이 담겨 있는 듯했다. 말하자면 비현실적이거나 초현실적인 이야기도 그저 흥밋거리 이야기를 넘어서 그 속에 나름의 진실이 감추어져 있다는 항변이기도 했다. 그걸 저자는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라고 표현한다.
이 소설에 날개를 달아 준 부커재단은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들로 현실적인 공포, 잔혹한 현대 가부장제, 자본주의를 부각했다“라고 평했다. 내게는 출판사와 저자와 부커재단의 생각이 조금씩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환타지 속에서 혼란을 거듭했다. 장르 문학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었을 것이다. 집사람이 즐겨보는 중국의 환타지 드라마를 보는 것도 나는 힘들어 한다. 그래서 집 사람 옆에서 중국 환타지 드라마를 같이 본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다.
그 동안 장르 문학이 가지는 독특함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장르 문학은 장르 고유의 패턴을 지니며, 일정 부분 대중의 흥미와 기호를 중시하는 경향을 가진다. 이런 점이 순수 문학과 비교되어 문학성에 대한 논쟁을 낳기도 한다.
지금도 환타지 드라마는 내게는 이해 불가의 영역이다. 그러다보니 겨우 20여 쪽 남짓한 단편 한 꼭지 이야기를 단숨에 읽어내기도 힘들었다. 아이들을 따라 가서 본 환타지 영화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해 영화를 보는 도중 잠이 들었던 나다.
장르 문학은 인터넷 매체가 낳은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장르 문학은 포털 사이트의 성장과 함께 성장해왔으며 젊은 층을 중심으로 독자층을 형성해갔다. 그러니 인터넷 환경에 익숙치 않은 세대들에게 버거울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모두 열편의 단편을 담고 있다. <저주 토끼>는 한 노인이 친구의 복수를 위해 저주를 걸어 만든 토끼 전등이 살아 움직이면서 복수의 대상을 갉아먹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표제작이다. 출판사의 평에 가장 가까운 단편일 것이다.
<머리>는 누구나 매일처럼 쏟아내는 분변물이 각자의 분신이라는 이야기로 읽히고, <차가운 손가락>은 출구가 없는 삶이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읽혔다. <몸하다>도 그런 의미에서 동일하게 읽혔다.
<안녕, 내 사랑>은 조금 독특하다. 요즈음은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가상현실 같은 단어들이 일상어가 되었다. 정말로 머지않은 시기에 가정마다 가정 일을 돌보는 로봇이 등장할 것도 같다. 스마트폰처럼 업그레이드된 로봇들이 수도 없이 쏟아지게 될 것이다.
아마 그때쯤이면 오래된 가구며 옷가지들을 버리지 못하듯이 누군가는 오래되어 업그레이드조차 힘든 로봇에 유독 애착을 느끼는 일도 생길 것이다. 그런 때를 생각하자 이 단편은 모처럼 즐겁게 읽혔다.
무릇 모든 생명체는 생식기를 통해서 영원으로 이어지는데 로봇은 이마로 그 과정을 대리하는 발상이 재미있다. USB를 쓰기 위해 인간의 생식기를 닮은 코드를 꽂아서 쓰고 있는 현실이 진부하거나 고정적 사고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다.
<덫>은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 이야기를 연상하게 한다. 인간의 탐욕은 비정하며 끝도 없다. 그 끝이 그리 찬란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탐욕을 놓지 못하는 데 대한 경구로 읽히는 단편이다.
어린 시절 마을마다 이야기 하나씩은 품고 있었다. 귀신 이야기부터 온갖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어린 동심을 포박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범접할 수 없는 커다란 힘에 굴복하여 마을을 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동네의 아이들을 한 명씩 바친다는 이야기가 가장 섬뜩했다.
동네를 지배했던 그 힘은 위장된 자연의 힘일 것이며, 누구도 그 힘을 벗어날 수는 바로 마을을 옭아매는 <덫>이었을 것이다. <즐거운 나의 집>은 이 소설 가운데 가장 우리의 이웃이야기 같은 느낌과 함께 자본주의의 무서운 얼굴을 잘 드러내고 있는 단편이다.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는 마치 몽환적인 아라비안나이트를 읽는듯하다. 인간의 탐욕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으로 읽힌다면 너무 진부하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재회>는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신음하는 사람들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우리도 한국전쟁을 겪었다. 70년 세월이 지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시기를 힘겹게 살아 넘긴 분들이 우리 주변에는 계실 것이다. 그 분들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나름이 트리우마를 겪고 계실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재회>는 남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이야기다.
홀로코스트와 한국전쟁
가끔씩은 장르 문학에도 눈길을 돌려야겠다. 그러나 책을 덮는 지금까지도 그 낯섦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몽롱한 것을 숨길 수 없다. 글을 정리하고는 있지만 장르 문학이 주는 생경함에 제대로 이해했는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