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아카데미의 신행법: 일삼오공
나모붓다야
붓다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현행 ‘학문불교학’을 ‘박물관불교학’(박태원)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부정하기 힘들다. ‘왜 불교를 하는가’에 대한 답변은 너무나 간단하다. 고해라고 부르는 현실의 불만족에서 벗어나 영원한 완전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의 원인은 붓다께서 너무나 명료하게 제시했다. 세상의 존재원리는 무상하고 무아여서 일체가 고통 속에 있게 되므로 그것을 진단하고 해결하는 법이 사성제이다. 세상의 존재 원리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고 나와 남이라는 조건의 만남에서이므로 거기서 답을 찾고 끌려가는 업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알고 있듯이 답은 각자에게 있다. 그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은 익숙해진 습관 내지 관습이다. 이를 불교에서는 업이라고도 한다. 스스로 길들여진 습관이나 관습은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려는 구심력을 가진다. 그것을 끊는 것이 윤회를 끊는 것이다. 과거로부터 익숙해진 그것은 본능에 가까운 탐욕이다. 대표적인 본능의 탐욕은 재물 이성 먹기 명예 수면의 다섯 가지를 들기도 한다. 이것들을 나라고 인식하다 보니 결코 버릴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라고 붓다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나인 줄 착각하는 것이지 그것은 연기되는 과정의 한 산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놓지 못하고 끊지 못한다. 답을 알지만 고치기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현행 불교학은 그 가르침에 대한 해석이다. 그 해석을 또 해석하고 해석하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그것은 불교해석학일 뿐이다. 용수가 세친이 천태가 원효가 그것들에 대해 어떻게 해석한 것은 나의 수행에 중요한 참고는 될지언정 결코 전부도 아니고 반드시 나에게 필요한 것도 아니다. 나는 나여야 한다. 그것이 내 불교이다. 붓다의 가르침을 읽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도록 노력하며 그 과정에 일어나는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불교학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 많은 후대의 해석을 탐구하고 또 탐구하는 것은 어쩌면 미친 짓인지 모른다.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런 것을 하는 불교학을 ‘박물관 불교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현대의 대부분의 불교학자는 박물관불교학의 학예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는 평가는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다. 이제 불교는 어렵지 않음을 외쳐야 한다. 그리고 실제 쉬운 불교 해야 한다. 일체는 연기하므로 고정된 것이 없다. 나와 나의 마음과 세상이 그렇다. 그러므로 나라고 집착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되는 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업은 있다. 내가 짓는 업에 따라 나의 삶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설령 금생이 다해도 나의 업이 있는 한 다음 생은 계속된다는 것은 분명하므로 그것을 믿지 않는 것은 불신자이다. 나라는 존재의 자성은 보리심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하지만 거기의 주체는 없다. 상황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응무소주이생기심이고 공심이다. 비록 집착하는 마음은 없으나 육바라밀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깊이 사유하는 것이다. 그래야 처렴상정할 수 있다. 어느 현실에 처해도 항상 청정함을 유지할 수 있다. 물들 수 있는 세계에 머물게 되어도 물들지 않는 청정에 머물 수 있어야 현실정토요 유심정토이다. 달라이 라마 성사의 가르침을 듣고 새로 태어나는 감동을 받는 분들을 유튜브영상에서 만날 수 있다. 좋은 일이다. 그런데 말이다. 왜 거기까지 가서야 그걸 알게 될까. 그것은 단절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늘 상 있는 곳에서 그 감동을 받으면 좋을 텐데 큰마음 먹고 많은 돈을 들이고 시간을 내 이역만리 그곳에 갔다는 것은 곧 비웠다는 뜻이다. 비웠기 때문에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래도록 지속되고, 오래도록 지속되었다는 것도 없어지려면 바로 이곳에서 비움과 채움이 가능해져야 한다. 객관적 상태로 돌아가서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소에 그렇게 되어야 흔들림이 없어진다. 지금 이 자리에서 비우고 비울 때 참된 진리로 가득 차게 된다. 이제 박물관불교학이나 박물관 불교신행문화를 졸업해야 한다. 지금 내게 필요한 불교와 신행을 해야 한다. 붓다아카데미의 불교하기, 불교신행문화는 간단하다. 일삼오공이다. 첫째는 나모붓다야 십념의 칭명이다. ‘나모붓다야 나모붓다야 나모붓다야 ~ 나모붓다야 나모붓다야 나모붓다야 ~ 나모붓다야 나모붓다야 나모붓다야 나모붓다야’를 하는 것이다. 둘째는 칭명염불 간경 참선의 세 가지를 행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십념칭명을 최소한 하루 세 번은 하는 것이다. 셋째는 일체[오온]가 공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일체는 나와 대상[세계]이다. 또 오공(悟空)하는 것이다. 오(悟)는 깨닫는 것이다. 공(空)은 일체이 자성이, 실체가 없지만 일체가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박물관불교학이나 신행을 벗어나는 것은 간단하다. 내 불교가 돼야 한다. 불교의 해석학이나 역사상 존재해온 신행문화를 다 섭렵할 필요는 없다. 관심 있는 이들이 학문을 하고 과거의 신행문화를 재현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일 뿐이다. 바웃다넷 바웃다(불자)는 내가 칭명하여 붓다 가피 속에 붓다로 산다. 칭명십념으로 흔들리는 나를 바로잡는다. 일체가 실체가 따로 없이 공하다는 것을 깊이 사유하고, 사유마저 끊는 자리로 들어가 그것을 깨치게 되면 나는 나의 이웃에게 이 진리를 전파하게 되어 있다. 그렇게 그 길을 말없이 간다. 그것이 현실에서 정토를 구현하는 것이고, 자타가 일시에 불도를 이루는 것이다.
나모붓다야
2019.11.25. 우천오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