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과 번뇌로부터의 자유
불교학과 최건업
번뇌는 마음이 혼란되고 안정되지 못하여 뭔가에 시달려서 괴로운 것을 말하는데 무엇으로 인하여
그런가를 관찰해보니 생각의 들끓음으로 인해 그것에 집착하여 일어난 것임을 수행을 통해 알게 되었다. 생각의 형태는 폭포의 흐름과 같이 마구 쏟아져 흘러내리는데 우리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집착한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여 괴로움에 반복하여 시달리다 지칠 때 쯤 에야 겨우 눈치를 채니 이것이 곧 범부각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곧 생각에 집착하는 습관을 떨쳐내어야 하는데 생각이 일어남도 알아채지 못하니 생각에 들러붙을려고 하는 집착의 습관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극복하기 힘들고 어렵기만 하다.
그러니 우선 생각의 일어남부터 알아채어야 한다. ‘생각이 일어남을 알고 있느냐?’하고 질문을 던져보면
누구나 당연히 내가 일으키고 있는 생각을 알고 내가 사고하고 행동하고 반성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 우린 그렇지 못하다. 당장에 작은 수행법을 통해 시험해보면 명백해진다.
五停心觀 중의 하나인 수식관을 해보면 숫자를 10 또는 100까지도 가기 전에 우리는
자기의 생각에 빠지고 그 생각이 얼마나 흘러갔는지도 모르고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숫자를 놓친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 자신이 생각의 바다에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는지 일단 감지해야 하고 다시 수식관 수행으로
돌아가 자신이 숫자를 놓친다면 바로 생각에 빠진 것임을 알게 된다.
호흡과 의식의 집중을 통해 호흡이 안정되고 고요해지고 의식이 명료해지기 시작하면
숫자를 놓치게 하는 생각이 침범하려는 것임을 금새 알아채고 숫자를 세는 행위로 돌아오게 된다.
이것이 순일하게 되어 수식관이 순조롭게 되고 명료한 의식이 뚜렷하게 되면 자기 안에
고요하면서도 명료한 의식의 형태 없는 한 영역이 생기게 된다. 물론 이 영역은 형상도 없고
소리도 없고 움직임도 없지만 명료해서 호흡과 수식을 방해하는 생각의 등장을 바로
알아차리게 된다.
생각의 알아차림은 항상 명료한 의식이 바탕에 펼쳐져 있음에 알 수 있는 것이고
잔잔한 호수에 파문이 일어남을 보듯이 하게 된다. 그래서 <기신론>에서도 생각의 일어남을
生住異滅의 생각모습에 따라, 자각하는 경지에 따라 구경각, 수분각, 상사각, 범부각이라 하여
강조하였다고 본다. 내 안에 생각이 일어나 머물고(住) 있음을 자각만할 수 있어도 진리를
부분적으로 알았다고 하여 隨分覺이라고 한 것이다.
오정심관을 통해서 또는 지관수행을 닦아서 폭류와 같이 흐르는 생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요(명료한 의식)를 확보할 수 있다면 이 고요를 통해 생각을 보게 되는 것이다,
생각이 보이면 생각은 본래 무명의 업을 통해 생겨난 비실체의 형태이므로 스스로 소멸하게 되고
다시 명료한 의식(고요)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래서 고요하면 생각이 보이고 생각이 보이면 생각은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깊어지고 예리하고 정밀하게 의식이 깨어있게 되면 생각은 일어나자마자(生起) 바로 알게 되니
生相을 알아서 생각을 보게 되고, 생각에 집착하지 않게 되고, 생각이 스스로 소멸하여 (생각을 떠난)
진여삼매에 들게 되니 이를 구경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수행의 최종목적지라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수심결에서도 ‘但離妄緣即如如佛(다만 망상만 여의면 바로 부처와 같다)’고 하신 것이다.
생각을 알아채는 수행방식은 수없이 많이 있지만 지관수행법에 있어서 觀修行 할 때 면벽수행을 하듯이
벽의 한 점을 응시하여 눈을 자연스럽게 뜨고 바라보는 수행이 있다. 한 점 수행이라고도 하는데,
좌선자세 또는 편안한 자세를 한 상태에서 한 점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 때 그 한 점을 놓치게 되면
바로 생각에 빠진 것을 의미 한다. 자신이 얼마나 생각에 금방 빠져서 망상에 갇히게 되는지,
그로 인해 홀연히 일어난 한 생각이 얼마나 많은 생각의 덩어리를 펼쳐내는지 그 현장을 목도하게 된다.
응시하는 한 점이 둘로 벌어지게 되거나 사라지게 되면 생각이 내 안에 침범한 것이다.
생각은 내가 명상을 하거나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할 때를 가리지 않는다. 정말 폭포수와 같이
나를 엄습하여 그 안에 갇히게 하고 그로 인한 번뇌가 영화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한 점이 명료하게 지속되기 시작하면서 그 지속되는 시간도 길어지게 되고 수행의 정도에 따라
하루 내내 명료한 자각 속에서 생각의 침범도 없이, 그에 대한 집착도 없이 보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기 시작하면 생각의 일어남을 바로 자각하고 일어나더라고 보게 되어 집착하지 않게 되니
생각이 나를 엄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엄습하지 못하니 내 안에 생각의 번쇠함이 없고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 한 점 수행은 어디서나 바로 행할 수 있는데, 전철을 기다리는 순간에도, 길을 가면서도,
상대방과 대화를 하면서도 의식을 활짝 열고 상대방이나 앞의 대상에 집중하여 명료한 의식이
지속되도록 하는 것이다. 불교가 지향하고 증득하고자 하는 ‘마음’은 우리가 가지고 쓰고 있는 슬기이며
이 슬기는 ‘아는 마음’에 다름 아니다. 이 ‘아는 마음’, ‘알아채는 의식’이 지속되도록 하는 것이
곧 마음인데 생각에 빠지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이 아는 마음이 지속되도록 하여 자기 안에 생각이
엄습하지 않도록 하고 엄습하더라도 바로 자각하여 생각(망상)이 내 안에서 실체처럼 행동하지 않도록
바라보는 것이다. 고요하면 보이고 보이면 생각은 그 힘을 잃게 된다.
생각이 내 안에서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나더라도 자각하여 그 힘을 잃으면 우리는 과거세부터
습관적으로 들러붙을려고 하는 業의 소용돌이로부터 벗어나 집착을 놓을 수 있게 되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성제인 苦集滅道는 생각에 대한 집착에서 오는 것이 분명하기에 번뇌(괴로움)를 극복하려면 집착하지
않아야하고 집착하지 않으려면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업의 계박에서 벗어나려면,
망상의 폭류로부터 빠져나오려면 그 망상을 잠시 멈추어 자기 안에 고요(명료한 의식)를
확보하여야 한다. 그 확보된 고요를 바탕으로 생각을 보고, 보여진 생각은 이미 그 힘을 잃어
나를 계박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을 정미하게 알아차려서 생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번뇌를 극복하자.
선행 합장
첫댓글 인도선 과제물을 하면서 한번 올려봅니다. 생각으로부터의 자유가 참 그립습니다.
선행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