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재조명 (#3)
- 오도에서 대승사까지
1939년 여름, 동화사 요사채에 불이 났다. 금당선원에서 하안거 수행 중이던 성철스님은 불길이 다 잡혔을 무렵 부삽과 부집게를 들고 나타나선 타다 남은 숯불로 약을 달이기 시작했다.
“불이 나서 모두가 정신없는데, 어찌 저런 무심한 짓을….” 주위의 스님들이 웅성거렸다. 주지스님이 상황을 마무리 시켜 잠잠해졌지만, 후에 그 당시를 회고한 성철스님은 “나도 그 때 내가 와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데이”라며 웃곤 했다.
그 이듬해 1940년, 출가한지 4년만인 29세에 무자화두를 잠시도 놓지 않던 스님은 마침내 칠통같은 어둠을 깨고 자신의 본래 성품을 깨달았다.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깨달음을 얻어 눈부신 법열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無’자 화두 4년만에 눈부신 오도송
황하서류곤륜정(黃河西流崑崙頂)하니
일월무광대지침(日月無光大地沈)이라
거연일소회수립(遽然一笑回首立)하니
청산의구백운중(靑山依舊白雲中)이로다.
황하수 곤륜산 정상으로 거꾸로 흐르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지는 도다
문득 한 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청산은 예대로 흰 구름 속에 섰네. 〈오도송〉
성철스님은 깨달음에 대해 항상 이렇게 말했다. “마음을 깨쳐 성불, 부처를 이루어야 한다. ‘마음을 깨친다’는 것은 꿈을 깨는 것과 같다. 또 ‘마음을 깨친다’는 것은 무심을 증득하는 것이다. 무심을 증득하면 꿈을 깬 사람, 마음의 눈을 뜬 사람이 되어 대 자유의 자재로운 활동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부처도 조사도 필요 없는 참다운 대자유자재가 된다.”
참다운 대자유자재를 얻기까지 스님은 범어사로 통도사로 하안거와 동안거 등 끊임없이 정진했다. 수행에 관한 욕심이 유일한 욕심이었다. 1938년 통도사 백련암에서 동안거를 끝내자마자 부산 범어사 내원암으로 옮겨 여름을 지낼 무렵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하는 용맹정진을 주장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선방스님들에게 결국 스님은 소리쳤다.
“요만한 것도 참지 못해서 무슨 정진을 하겠는가.” 결국 사소한 말다툼 끝에 육박전까지 벌어지는 소동이 벌어졌다. 암자를 책임지던 동산스님이 스님을 불러 꾸짖었다. “공부하고 싶으면 자네나 열심히 하면 되지, 안 하려는 사람까지 야단을 내느냐.” 성철스님은 후에도 이 일화를 자주 들려주었다고 한다.
무서운 집중력으로 철야 용맹 정진
깨달음 후에도 장좌불와 고행 계속
도반 청담스님과 불교개혁의지 키워
수행에 대한 집중력은 세속의 인연도 소용없었다. 1939년 금강산 마하연에서 정진하던 스님에게 어머니가 찾아왔다. 성철스님은 “볼 필요 없다” 돌려보내려 하자 대중공사가 열렸다. “생사를 걸고 수행하는 수도승이지만 어머니가 먼 진주에서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마냥 외면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다. 만나지 않으면 선방에서 떠나야 한다.” 성철스님은 대중공사 결론에 따라 참선수행을 중단하고 어머니를 맞았다. 그 바람에 어머니를 모시고 금강산 유람도 한 셈이 됐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여러 선원에서 안거와 익히지 않은 음식을 하루에 한 끼만 먹고, 눕지도 자지도 않는 장좌불와로 고행정진했다. 성철스님의 장좌불와에 대한 소문은 퍼졌고, 마침 도봉산 망월사에 머물던 춘성스님에게도 전해졌다.
“저 철수좌가 소문대로 눕지도 않고 졸지도 않으면서 좌복 위에서 앉아 지새는가.”라며 밤새 지켜보니 사실이었다. 그 이후 환갑이 다 된 춘성스님은 장좌불와 수행을 시작했다.
스님 곁에는 도반이 많았다. 금강산 마하연을 떠나 1940년 도착한 경북 은해사 운부암에서 평생의 법우인 향곡스님을 만났다. 향곡스님과 성철스님은 동갑이고, 풍채도 비슷했다. 성철스님은 향곡스님과 장난치며 어울렸던 일들을 얘기하곤 했다. 이후 봉암사 결사도 함께 하고, 깨달음에 대한 법전(法戰)도 벌렸던 두 도반. 먼저 간 향곡에 대한 성철스님의 말이 진한 인간미로 다가온다. “저번에 다녀가면서 ‘니 평생 내한테 말 안한 거 있제? 니 평생 날 속였제?’하길래, ‘내가 니한테 속인거 뭐 있어? 다 말했는데’ 그리고 헤어졌는데 이제 가버렸네.”
그리고 또 하나의 도반. ‘물을 부어도 안 새는 사이’인 청담스님. 1941년 가을 수덕사에서의 첫 만남에선 서로 괴각쟁이임을 알아봤고, 2년 후 법주사 복천암 하안거에선 한국불교의 개혁의지를 키웠다. 그 1년 후인 1944년 대승사. “한국 불교의 살 길은 선불교를 중심으로 수행가풍을 세우는 것 아니겠냐” 두 스님은 한국불교의 탈바꿈 필요성에 결론을 내렸다.
청담스님은 성철스님보다 열 살이나 많았지만 아무 허물없이 지냈다. 이게 못마땅한 청담스님의 제자 현성스님이 불만을 터뜨렸다. 청담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성철스님은 한국불교의 보물이야. 나이는 내가 열 살이나 많지만, 불교는 성철스님이 열 배나 더 잘 안다.” 때때론 레슬링을 함께 즐기던 두 스님이었다
조계종정 법전예하는 “언젠가 대승사에 함께 살 때 아침공양을 하고 버드나뭇가지로 양치를 하면서 두 스님이 얘기를 시작하는 걸 봤지. 점심공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는 때까지 함께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는 그런 도반을 가진 두 선지식이 부러웠지”라고 기억했다.
청담스님이 먼저 열반한 아쉬움의 표현은 성철스님의 심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청담스님이 열반하셨다는 갑작스런 소식을 들으니 눈 앞이 캄캄하대. 향곡스님이 나보고 ‘니 앞으로 레슬링 상대할 사람 없어 우짤래’하대. 청담스님이 오래 있어야 했는데….”
두 스님과 또 다른 뜻 맞는 스님들의 만남은 후에 한국불교의 정초를 놓은 ‘봉암사 결사’로 이어졌다.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던 다짐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깨달음을 주고 있다. “중 노릇은 사람 노릇이 아니다. 중 노릇하고 사람 노릇하고는 다르다. 사람 노릇 하려면 옳은 중 노릇은 못한다.” 1940년대 초 송광사 삼일암에서 일타스님에게 했던 성철스님의 말이 되새겨 진다.
<청담스님과의 인연>
동진출가한 청담스님 딸
유일하게 사미니계 설해
부처님은 출가 전 라훌라라는 자식을 두었다. 성철스님도 조혼 풍습으로 출가 전 자녀를 두었고, 성철스님의 평생 도반인 청담스님도 출가 전 이룬 가정에서 딸을 두었다. 그 딸은 유일하게 성철스님에게 사미니계를 받았고, 봉녕사 승가대학 학장이 되어 한국불교의 주축이 된 묘엄스님이다.
성철스님은 “내가 평생동안 계를 설하지 않기로 했는데, 청담스님 딸이니까 특별히 요번만 계를 설한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큰 종이에 ‘묘엄’이라는 법명까지 건네주었다. 게다가 자상한 부탁까지. “공부 열심히 해야제. 그라고 옷은 다 떨어진거 입더라도 마음을 절대로 떨어지면 안된데이.”
묘엄스님이 열 서너살 때 어머니가 써준 편지를 갖고 출가한 아버지에게 보내졌다. 편지엔 이 아이를 출가시켜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적혀 있었다. 조금 후에 성철스님이 나타나 “너거 아부지 하고 나하고는 물을 부어도 안 새는 사이다. 그러니 니도 나를 믿거라.”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아버지도 못 믿는데….”
당돌한 어린 소녀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었고, 내기 끝에 출가를 하게 됐다. “스님이 아시는 것, 그걸 다 나한테 가르쳐 주신다면 중이 되겠습니다.” “오냐, 그기 좋다카면 그래 하자.” 그 후 1945년 5월 단오날 윤필암에서 묘엄스님은 계를 받았다.
묘엄스님은 지금도 성철스님이 자신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었던 한국사 도표와 사미니 계첩을 간직하고 있다. 성철스님은 ‘참 중은 그래야 마땅하다’는 정신적인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지요. 그런 분의 열정을 옆에서 지켜본 시절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첫댓글 수행자가 이정도는 되어야하는 결기가 있어야 하겠지요.
목숨울 내놓는 결의
이번 한생 안태어난 샘 치고 공부하라던
스님의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