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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한 글
서문: 정글을 벗어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모두가 큰 기쁨과 축하를 하는 때였다. 검들을 쳐서 쟁기를 만들고, 죄수들은 자유를 얻었으며, 수백만의 군인들은 그들의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한 사람, 일본 제국 군대의 중위 히루 오나다Hiroo Onada는 전쟁이 끝났다고 하는 방송의 선전을 믿지 않기로 선택했다. 그 후 29년 동안 오나다 중위는 집에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필리핀의 정글에서 숨어 지냈다.
이 사실을 안 일본 당국자들은 오나다에게 종전의 소식을 전해주려고 애썼다. 그러나 오나다는 섬 주민들이 던져준 선전물을 적국의 불온선전물로 간주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편지들과 가족 사진 심지어 신문 기사들이 비행기로 공수되어 왔으나 영리한 속임수일 뿐이라고 치부해버렸다.
1974년 한 일본 대학생이 이 숨어 지내는 사람을 찾기로 결심했다. 그 학생은 정글을 탐험하면서 마침내 늙은 군인을 찾아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오나다를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마침내 일본 정부는 오나다의 전 고참전령을 정글로 보내 이제 그만 내려놓으라는 명령서를 전달한다. 오나다는 그의 임무를 벗게 되자, 총에서 탄알을 비우고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에게 전쟁은 마침내 끝이 났다. 그는 영웅의 환대 속에 집으로 돌아왔다.
삼십 년 동안이나 오나다 중위는 전쟁을 하면서 그의 마음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적, 곧 그가 두려워하고 믿지 않은 적과 싸웠다. 이것이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마음에서 적대적으로 대하거나,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을 향해 벌을 준비하고 계시는 분으로 그들은 생각한다. 그들은 적대적 관계가 종료되었음을 듣지 못했으며, 전쟁은 지금 왕좌에 앉아 계시는 평화의 왕의 승리로 끝이 났다는 사실도 듣지 못했다. 이 좋은 소식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그들은 종교나 무신론의 자기 기만이라는 정글에 누워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미워하신다-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쌓여만 간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 알지 못하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오시는 때는 그들이 죄값을 치를 지옥에서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Paul Ellis의 책 The Gospel in Ten Words의 서문에서. 오나다 중위는 지난 2014년 1월 16일에 생을 마감했다.)
(1)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사랑
복음은 모든 백성에게 기쁜 소식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걷는데 방해가 되는 유일한 것은 우리의 불신이다. 죄인은 하나님을 향한 불신의 총을 내려놓아야 하고, 신자는 손에 든 두려움의 헌물을 내려놓고 빈 손이 되어 믿음 가득한 마음으로 그 축복의 상 table 에 임해야 한다. 불신과 믿음의 차이가 어떻게 행동으로 나타나는지 보자:
불신은 하나님 이것 저것을 해 달라고 기도하고, 믿음은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을 바라본다. 그리고 말하기를 주님, 주님이 전부 다 이루어놓으셨군요 라고 한다.
불신은 무언가를 주님께 드리면서, 주님 제가 한 일과 세운 것 그리고 주님께 가져온 것을 보십시오 라고 말하고, 믿음은 주님으로부터 받으면서 말하기를 주님께서 제게 해주신 것 좀 보세요 라고 한다.
불신은 고생하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지만, 믿음은 모든 것이 은혜로 거저 우리에게 주어짐을 이해한다. 불신은 끊임없이 분투하고 믿음은 잠잠히 신뢰한다.
여기서 우리는 출애굽기 14장에서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고 하신 말씀과 이사야 30:15에서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거하여야 구원을 얻겠거늘 이라고 하신 말씀이 이해된다. 불신은 부르짖고 믿음은 잠잠히 기다린다.
나의 기도, 나의 언어생활, 나의 신앙생활은 믿음을 나타내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두려움 가운데 분주한가?
(2) 무조건적인 용서
용서에 관하여 두 가지의 잘못이 있다:
하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용서가 있기 전에 그들이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율법이라고 부르며, 이는 은혜를 죽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죄인들에게 그들이 구원 받았으므로 그들도 죄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보편구원론이라고 부르며 믿음을 죽이는 것이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용서는 구원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세상의 죄를 지고 가셨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다.
죄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위로를 얻기 위해 종교에 귀의하지만, 은혜 없는 종교는 단지 악화시킬 따름이다. 성경은 계속해서 어떤 규칙의 종교도 궁극적으로 그것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결국은 죽음을 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은혜 없는 종교는 사람들을 죽인다. 내가 무언가를 해야 죄용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 우리는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나 반대로 죄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도 용서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못되고 약한 죄인인지 깨닫고 믿음으로 십자가의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용서는 효과가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죄 용서의 기쁨을 누리기 전에 자신의 가면을 벗고 주님 앞에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회개하는 것이 먼저 필요한 일이다.
공기를 돈 주고 사려는 사람이 있는가? 공기는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선물이다. 들이마시면 된다. 용서도 이와 같다. 우리의 죄는 크고 무겁지만 주님께서 이미 용서하셨다.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우리에게 생명이 된다.
(3) 구원 받음
생략
질문: 나는 이미 구원 받았는가? 아니면 구원을 이루어 가는가?
(4)하나됨
결혼식은 신랑과 신부가 평생을 함께 할 부부임을 서약하고 공표하는 자리다. 결혼식의 순서 중에 가장 중요한 시간은 결혼 서약일 것이다. 이 서약에는 사랑과 헌신을 약속하는 시간이다. 주례는 신랑과 신부에게 이를 확인하는 질문을 하고, 신랑과 신부는 "네!"라고 대답을 한다. 그리고 즉시 두 사람의 부부임을 선포한다. 나머지 순서를 마치고 결혼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이 모여 피로연을 갖는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혼인잔치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결혼 서약식에 비유될 수 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모시고 그의 사랑을 받아들여 평생을 함께 하고 헌신할 것을 약속한다. 이것을 우리는 영접기도라고 한다. 이 의식을 한 사람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공표하는 의식이 바로 세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옛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가 된다.
그래서 새로운 이름으로 불린다. 곧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이제 성도는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 한 몸을 이룬다. 이렇게 한 몸이 된 것을 가리켜 교회라고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결혼 서약을 하고 혼인잔치를 기다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모인 곳이다.
신랑이신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고 하시며 주님의 신부들을 끝까지 책임지실 것을 약속하신다. 그리고 주님의 신부들인 성도들을 위하여 성령님을 보내셨다. 성령은 예수의 영이니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다. 그리고 예수 안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니, 그리스도인은 성령, 성자, 성부가 함께 하시는 사람이다. 세상 끝날까지.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는 내 안에, 나는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는 주님 안에 있다. 우리와 주님은 하나요 한 몸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 죄를 피했으나, 신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죄를 범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와 예수님이 하나된 것은 그 어떤 큰 죄도 끊을 수 없고, 그 어떤 중독도 끊지 못한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결혼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된 사람은 더 이상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지 않는 내 노력은 자칫 이스마엘을 낳게 할 뿐이다. 예수님이 거룩하시니 그 안에 있는 나도 거룩하다. 예수께서 승리하셨으니 그 안에 있는 나도 승리자다. 복 받은 사람이다. 날마다 예수님과 하나됨을 이루라.
(5)용납됨
사람은 칭찬과 인정을 받으며 살도록 설계되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 받기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애쓰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과 가족들을 희생하기도 한다. 외적 성장이나 규모에 사로잡혀 자신이 누군지를 잊어버린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도 점수를 얻기 위해 애쓰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 대한 심각한 오해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이미 용납하셨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향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예수께 나아온 우리들을 향하여 동일한 말씀으로 사랑하신다.
예수님께서도 도저히 사랑받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셨고,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던 사람들에게 직행하시면서 그들을 영접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고 말을 듣지만, 사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영접하신다는 선포와 함께 시작된다. 믿음이란 예수님 안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맞아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아들이요 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받는 자들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속속들이 다 아신다. 우리가 과거에 한 일과 미래에 할 일들까지도 아신다. 우리가 숨기고 있는 마음의 은밀한 비밀도 다 아신다. 그럼에도 미치도록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미 용납하셨고 변함없이 사랑하시며 우리를 기뻐하시는데 더 이상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노력을 하느라 분주할 필요는 없다. 우리를 위하시며 우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보란듯이 두려움 없는 거룩한 발걸음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더 신나는 모험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의 기대를 맞추려는 노예가 아니라 주님의 자녀로 당당하게 살아가자.
(6)거룩함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다. 다음의 성구들은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것 같다: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5)
* 아무도 거룩함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 너희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면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렇다면 거룩함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거룩함을 다음의 여러가지로 정의한다:
* 죄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 이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다.
*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을 의미한다.
위의 어느 것도 거룩함의 의미를 온전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거룩함은 온전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거룩하시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온전하시며 충만하시고 아름답고 풍성한 생명이 흘러 넘치는 분이라는 뜻이다. 그 초월적이고 총체적인 완전성 때문에 천사들이 놀라워하며 거룩 거룩 거룩을 외치며 그 앞에서 찬양한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실제로 거룩하게 살라는 설교를 듣고 그렇게 살아보려고 애쓰지만 실패를 많이 하는 것은 거룩하게 살아보려고 한 사람은 알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오직 예수님의 은혜와 그 공로를 힘입어 구원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함을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드리신 것(히 10:14)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의 희생을 통해 우리는 이미 거룩한 자들이다. 우리는 거룩해지기 위해 거룩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자들이기 때문에 거룩한 행동을 한다. 예수께서는 깨어지고 누더기가 된 우리의 옛 삶을 가져가셨고 대신에 온전한 삶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온전함을 주셨다. 이것을 믿고 의지하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올바른 믿음이다.
(7)의롭게 됨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므로 의롭게 된 것을 안다. 칭의 곧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을 안다. 그러나 자신이 의롭게 된 것을 느끼며 확신 가운데 살지 않고 있다. 그 증거는 불안, 안정감의 결여, 끊임없는 노력 등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근심 속에 안정감을 잃은 채 살아가는 이유는 복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열심 있는 종교인이 되었다.
이런 과오를 사데교회의 성도들이 범했다. 마르다도 그랬고 바울 시대의 유대인들도 할례를 행함으로 의로워진다고 확신하고 바울을 핍박했다. 차라리 마르다는 하늘의 주방장이 만들어 주는 만나를 먹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우리 스스로 의로움을 확보하려는 것은 물에 빠진 사람이 구조요원에게 자신을 맡기기를 거부하고 몸부림치면서 구조를 어렵게 하는 것과 일반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의로움의 선물을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내가 죄를 지을지라도 성령께서는 나에게 항상 방향을 잃지 않도록 추락하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을 바라보라고 인도하신다. 여전히 의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신다. 나는 더 이상 죄를 바라보고 고민하는 자가 아니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것이다.
나는 항상 먼저 주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할 것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옷을 입은 새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의로운 사람처럼 행동할 것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일시적인 의로움에 거할 수 있었으나 나는 영원히 의롭게 되었다. 이는 나의 행동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주님의 공로 덕이다.
그러므로 나는 실패를 걱정하지 않고 주께서 내 안에서 행하심을 확신하고 담대하게 살아갈 것이다. 나는 무슨 선택을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 안에 있으므로 주께서 나의 길을 인도하실 것이다. 나는 의로운 행동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의로우신 주님의 자녀기 때문이다. 나는 무슨 직업을 선택하든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춰 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 만이 할 수 있는 일, 다른 사람에게는 어렵지만 나에게는 쉬운 일을 할 것이다. 그것을 주께서 나에게 주셨고, 이 세상은 어서 내가 그 일을 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주저하지도 않을 것이고, 주님을 거슬러 내 마음대로 인생을 살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나의 삶은 주님 안에서 해처럼 밝고 나의 미래도 희망차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미리 모든 것을 예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님 안에서 의로운 사람이며 주님과 함께 다스리고 통치할 것이다.
(8)죽음
복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자주 넘어지는 고통과 수치감 그리고 좌절들을 이길 수 있는 길을 보여준다. 그 핵심은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시작하는 신앙의 출발선에 있었다. 정답은 처음부터 내 손에 있었다. 즉, 그리스도교에 입문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받아들일 때 나는 이미 주님과 함께 모든 것을 받았다. 세례가 가리키는 것은 나의 죽음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삶을 산다. 그것이 영생의 시작이다. 구원 받은 삶의 시작이다.
내가 죽은 것은 과거의 나, 곧 아담적인 나, 죄에 매료되던 나의 죽음을 말한다. 바울에게서 이것은 두드러진다. 그는 이전 것은 잊음으로 과거의 자신이 죽었음을 확실하게 한다. 그리고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살고 계심을 확언한다.
그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부인하느라 애쓰면서 살아간다. 어떤 날은 성공하여 기쁘고 어떤 날은 실패하여 좌절한다. 이렇게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면서 정신분열증환자처럼 언제 어떤 발작이 일어날 지 모르는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 사실 지금 내가 당장에 죄를 짓지 않을지라도 평생 죄를 짓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다만 주님 오실 때까지 노력에 노력을 경주할 뿐이다. 이것이 정녕 자유롭게 하는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인가?
성경은 우리의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명백하게 그리고 여러 번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자들이 아니고 구제불능의 옛 사람이 이미 죽은 자들이다. 자동차사고를 가장하여 조폭을 떠나 죽은 사람처럼 먼 나라에 가서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에게는 과거는 죽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의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어 없는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새 나라에 있다. 그것은 죄의 나라가 아니라 의의 나라의 시민이다. 이제는 새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가 여전히 위력을 발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다. 자신의 필요를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떠나 독단적으로 사는 사람들 속에 있다. 또한 우리 안에도 과거의 습관이 남아 있다. 그 이전에는 나에게 자유가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악당의 말을 들어야 했다. 이제는 성령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따라 살 선택이 주어졌다. 나는 옛 주인을 거절하고 성령의 새 주인의 말씀을 들을 것이다. 내 속에 두 본성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옛 본성은 죽고 새 본성 곧 그리스도의 성품 만이 살아남아 있다.
나는 새 사람이다. 나는 예수 안에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죽음을 늘 일깨워준다(고후 4:10). 나는 죄에 대하여 반응하지 않으며 나는 오직 그리스도께만 반응한다. 그리고 그 반응 때문에 나는 더 자유롭다. 나의 옛 자아는 죽었기 때문이다.
(9)새롭게 됨
신앙생활은 결혼생활처럼 두 사람이 하나되어 함께 살아가면서 누리는 삶의 위대한 모험이다. 신랑과 신부가 하나되어 결혼생활을 이루어가듯이,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하여 살아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피조물이다.
우리는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는 고달픈 광야생활을 하는 불신앙과 완고한 마음을 가진 이스라엘이 아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죄인에서 성자로 변화되었다. 성도는 참 포도나무신 예수께 접붙인 참 가지요 열매가 무성한 가지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보실 때는 영원의 관점에서 보신다. 그 관점에서 볼 때 성도는 흠이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으며, 영광 중에 빛나는 모습이다. 예수와 함께 하늘 보좌에 이미 앉은 자요, 승리자의 모습, 이것이 진짜 나의 모습이다.
무엇이 성도를 새롭게 했는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주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생명의 말씀을 발견하고, 빛에 거하며, 지혜를 얻었다. 전에는 밤에 거했으나 이제는 낮과 같이 살며, 예수님의 새로운 심장으로 이식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요일 3:6). 이것은 우리의 현재 상태를 향한 위협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릴 삶에 대한 약속이다.
예수를 모신 사람은 죄 없으신 예수님처럼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는 약속이다. 그런 성품의 사람으로 이미 바뀌었기에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천국에 간음하는 자나 거짓말쟁이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예수께 나올 때 그들은 더 이상 간음자나 거짓말쟁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살인자 다윗과 모세가 어찌 천국에 있겠는가? 율법의 눈으로 보면 그들은 살인자들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그들은 죄인이 아니라 아들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을 상속 받을 자들이다. 그리고 예수 안에 있는 우리도 그렇다.
그럼에도 성도가 죄를 범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새 생명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있으나 운전을 배우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다.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우리는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 배움의 과정에 우리를 돕기 위해 성령이라는 위대하고 친절한 스승이 곁에 계신다.
신앙생활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삶이 아니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령께서 인도해 가시는 새로운 삶을 배우고 누리는 것이다.
(10)왕
우리는 지금까지 주님의 은혜 안에서 다음과 같은 복을 받았다는 진리를 배웠다:
1.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무궁하시다. 그리고 결코 불변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2.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영원히 용서되었다.
3. 믿음으로 은혜로 우리는 영원히 구원 받았으며, 이 땅에서 그 구원을 누리며 살아간다.
4.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는 하나되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요, 신랑과 신부의 밀접한 관계로 살아간다.
5.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기뻐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기뻐하시고 용납하신다.
6.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졌다. 이는 하나님 앞에 흠 없고 점도 없는 온전한 자가 되었음을 말한다.
7. 신자는 의롭다 인정함을 받았으므로 더 이상 다른 사람의 기대에 맞춰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대로 세상을 향해 봉사할 것이다.
8. 죄를 짓던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이제는 예수께서 사신다.
9.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영생은 시작되었다.
은혜의 복음 안에는 이처럼 놀라운 약속들과 우리에게 주시는 복으로 넘쳐난다. 그 하나하나를 다시 생각해 보면, 놀랍기 그지 없는 축복이다.
우리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려주는 귀한 진리를 믿고 알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행복과 기쁨, 안정감과 확신으로 넘쳐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축복이 이런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우리가 왕족이라는 사실이다. 천국에서 장차 왕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왕이 된 자들이다.
왕이라면 왕에 맞는 일을 하고 생각을 하자. 우리 안에 만 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심장이 뛰고 있다. 우리의 왕 노릇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왕은 말로 통치를 시작한다. 우리의 삶과 환경, 생각을 틈타고 들어오는 마귀를 말씀으로 물리치자.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를 말씀으로 퇴치하신 것처럼. 골리앗에게 다윗이 위대한 믿음의 선언으로 공격한 것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 복음을 선포하자.
더 많은 사람들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종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섬기자. 그것이 하늘의 왕으로 통치하는 성도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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