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란훈향芝蘭薰香 조지훈趙芝薰
- 마지막 지사이자 반反 권위주의자로서 박정희 대통령과의 일화
사범학교 출신답게 독서량이 많고 다방면에 걸쳐 광범위한 지식을 소유한 박정희 대통령이 제일 좋아했던 시인이 조지훈이었다는 사실은 뜻밖이었다. 세월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재미도 있고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주군의 의중을 읽는 데는 귀신이었던 자칭세칭 박정희신도들이 대통령의 생일을 앞두고, 시인 조지훈을 청와대 만찬에 초대해서 생일날 읽을 시를 짓도록 하라고 진언하고 대통령도 그럴 듯하게 생각한다.
외형만은 정중한 대통령의 부탁, 그러나 지사 조지훈의 대답은 그 자리를 얼음보다도 더 싸늘하고 설렁하게 했다 한다.
“죄송하지만 저는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축시나 찬미의 시는 쓰지 않습니다. 권력의 정상에 있는 분을 위한 시는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아첨하는 말이나 미사여구의 말들을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원하신다면 저와 인생관과 작품관은 다르나 좋은 시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로부터 지훈에게는 오만가지의 수모와 위협들이 따른다. 나중에 대통령의 의중이나 지시가 전혀 아니었다는 것은 밝혀졌으나, 사냥개보다 나을 것 없는 광신도들의 과잉충성은 올곧은 뜻을 가진 사람들을 한없는 고통 속으로 몰아 넣었다.
무엇보다 인간 조지훈을 슬프게 한 것은 지레 겁을 집어먹고, 당신을 피하는 지식인 문화인을 자처한 겁쟁이와 소인배들이었다, 한다. 슬프게도 평생 동지를 자임하던 나그네의 목월도 그 중 하나였다 한다.
참고로 지사志士의 지志란 선비(士)의 마음(心)을 의미하며, 선비란 벼슬아치의 대칭어로 인간의 절대가치絶對價値인 진眞 선善 미美의 구현을 위하여 현실적 모든 것을 포기하는 분을 가리킨다.
조선나라 역사상 최고의 선비가 남명 조식 선생이라면 선비정신을 근간으로 벼슬을 한 벼슬아치는 황희, 맹사성 등이 그 전형이다.
다시 요산요수樂山樂水의 풀이다.
인자는 산을 닮아야 하며 지자는 물을 닮아야 하리
인자인 선비는 산처럼 고요하게
지자인 벼슬아치는 물처럼 민중을 끌고 흘러야 하리,
벼슬아치는 선비에게서 그 정신을 배워 백성과 나라를 이끌어야 하므로.
부연이다. 벼슬아치는 올바른 방법으로 벼슬을 하는 사람인 대부大夫의 고유어다.
- 승무僧舞
얇은 사絲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파르란이 깍은 머리
박사薄沙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 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밤사 뀌또리도 지새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絲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17세 때 수원 용주사 부근에서 재인광대들의 춤 중에서 여승의 인간적인 고뇌와 그 승화과정을 그린 춤인 승무를 보고 발상, 19세 때 초고를 완성하여 퇴고를 거듭, 21세 때 완성했다고 한다. 조지훈의 시인으로서의 엄격함을 보여주는 예로 후학의 귀감이 된다.
완화삼玩花衫
- 목월木月에게
차운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산에서 내려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영어의 생활 후, 한 동안 낭인생활을 할 때 시인 박목월과 목월의 향인 건천과 경주 일원을 다니면서 우정을 돈독히 하고 다시 고향으로 들어가 목월에게 준 헌시다. 이시의 화답시가 이 시보다 유명해진 목월의「나그네 - 지훈에게」다.
낙화洛花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병에게 마지막 연
잘 가게 이 친구
생각나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시인으로서의 조지훈
「승무」에서 보여주는 시인으로서의 엄격함에서 출발하여, 「완화삼」이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표표함, 「낙화」에서의 삶에 대한 달관과 「다부원에서」가 보여주는 역사적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분노, 다시 찾은 달관과 역사 속에서의 완성이 조지훈의 시적 편력이 근간이다.
국어학자로서의 조지훈
1942년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가입하여 당시는 소장파학자이던 최현배, 이희승 님들과 더불어 『큰 사전』 편찬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이어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진다.
조선어학회가 단순한 학술단체가 아닌 조선인의 민족정기를 응집시키는 단체로 커가자, 위기의식을 느낀 일인들이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잡아들인 사건을 가리킨다. 원로학자들과 중견 소장학자들의 투옥과 고문과 영어囹圄생활, 최현배, 이희승 등 소장파회원들 더불어 이 모든 것을 꿋꿋이 견디어낸 조지훈 시인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영어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았다는 것이었다.
스승으로서의 조지훈
고려대학교 교수로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지사志士로서의 정신과 삶을 가르치고, 다음 시와 문화사를 가르친다. 오늘날 흔히 쓰는 말로 참스승이었다.
4.19 당시 4.19가 반독재 반부패에 저항운동을 지나 구국의 학생혁명임을 가르치고, ‘폭력을 쓰지 말고 스스로는 다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적극 참여하라!’고 고려대 4. 18시위로 불을 짚히며 맨 먼저 권유한 분으로 4.19세대에게는 영원히 기억되는 유명한 분이다.
그러고 보니, 개화기 이후의 성공과 실패의 중간에 위치한 우리의 혁명들이 눈에 선하다. 갑오 제도혁명, 3.1 민중혁명, 4.19 학생혁명, 5.16 군사혁명, 6.10 정치혁명 기타.
사학자로서의 조지훈
문화사를 모든 역사의 중심으로 파악하고, 전체역사에서 문화사를 독립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라의 역사가 정립되고 완성된다고 역설했다.
미완성이라 지훈 스스로 공개하기 꺼려했던 『한국문화사 서설序說』은 기실 역사에서 문화사를 독립시킨 기념비적인 작품이었으며, 만년에 건강을 잃은 조지훈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사업이라 생각한 『한국문화사 대계大系』의 모태가 된다.
불행하게도 이 사업은 변변히 출발도 못하고, 예상보다 빨리 병이 깊어진 조지훈의 죽음과 더불어 끝나고 만다. 위대한 인물 한 사람의 중요성만을 확연하게 가르쳐 주고.
조지훈이 돌아가셨을 적, 싸늘하게 식은 주검의 머리맡에 『한국문화사 대계大系』의 허두부분만 초고로 써 있고 자료들은 차곡차곡 쌓여 보존되어 있었다는 일화는 아직도 눈시울 뜨거워지는 이야기다.
사랑과 우정, 그리고 말년
사랑에 관한 일화는 스물하나 약관의 나이로 결혼한 조강지처 아내 김난희 님과의 애틋한 사랑뿐이다.
개화기, 속칭 개화남開化男들의 애정관은 딱 두 가지 뿐이었다.
부모가 정해준 조강지처와 이혼하거나 그대로 둔 채 신여성新女性이라 불리는 여자와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자유연애의 신봉자들과 부모님 뜻에 의하여 결혼한 아내를 시대의 희생자로 보고 평생 신의를 지키는, 남녀관계에 관한 한 전통적이었던 분들이 그것이다.
조지훈은 단연 후자의 편에 서고, 오히려 그것을 우리 민족 특유의 전통이라 칭송하고 스스로는 실천궁행한 분이었다. 지훈의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다는 것이 오늘날 명약관화해 진다.
전통傳統이란 과거의 문화유산 중에 고이 지키고 아름답게 가꾸어야 하는 것이고, 인습因襲이란 하루라도 빨리 버려야할 유산이다.
당신의 평탄치 못한 삶과 우리민족의 대표적 원형적 민족성인 떠돌이혼으로 인하여 평생을 고생시킨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애틋한 심정은 주로 지훈의 산문散文에서 자주자주 토로되고 있다. 불같은 사랑도 멋있고 화려하지만 우리 조상들의 화로 속 불씨 같은 사랑이 오히려 위대하지 않을까 싶다.
평생을 다양한 교우관계를 엮어내면서 산 조지훈의 풍요 속의 빈곤이 우정이다. 흔히 말하는 고우(故友 old-friend), 즉 30년 40년 나아가 평생을 고락을 나누면서 같이 한 친구들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모든 존경할 만한 분들은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과 추종자들을 빼면, 대등한 사이인 친구들이 많지 않다. 지훈도 그 범주를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듯싶다.
여기서는 젊고 풋풋했던 청록파 시절의 역사이자 배놓을 수 없는 친구인 목월 박영종朴永鐘과의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깐깐한 기독교인이던 혜산兮山 박두진, 소박하고 인정을 제일로 치던 목월 박영종, 고고한 선비풍이자 불교에 심취 반승伴僧의경지였던 지훈 조동탁, 청록파 삼인이다.
드러난 성격으로 보아 친하기 어려운 분들이었다. 특히 혜산과 목월은 물과 기름이었다. 그 둘을 중화시키던 분이 조지훈이었다 한다.
지훈이 산을 내려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다 나온다. 번민과 회의의 암울했던 시절, 아직은 시인으로의 작품과 이름만 알고 있던 지훈과 목월이 목월의 고향인 신라천년 고도 경주의 기차역에서 만난다. 얼굴을 모르니까 앞가슴에 각각 자신의 이름을 커다랗게 써 붙이고.
그렇게 만난 두 분이 의기투합, 보름 이상 밤과 낮을 경주일원과 목월의 고향집이 있는 건천을, 때로는 과거로, 때로는 미래로. 떠다니며 현실의 암울함을 잠시나마 잊어버렸고, 시와 인생에 관한 토론과 통음으로 우정을 다진다.
경주박물관에서 소매가 긴 나그네인형을 선물 받고, 고향 영양으로 귀향한 지훈이 그 인형을 옆에 두고 목월과의 행복한 시간을 그리워하면서 쓴 시가 「완화삼玩花衫 - 목월木月에게」였다. 제목의 의미는 ‘나그네 긴소매를 꽃으로 감상하고 사랑한다’이다. 전형적 헌시다.
그 화답시가 목월의 「나그네 - 지훈芝薰에게」였으니, 두 분의 우정이 없었다면 두 편의 목가적이나 완벽한 자연귀의의 시는 탄생 불가능했을 것이다.
식민지시대보다도 외로웠던 조지훈의 만년이었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청와대사건 이후 감시와 추적과 위협의 나날들이었다. 무시무시한 권위주의 시대 아니던가. 그로 인한 친우들의 멀리하기, 왕따에 도망자 수준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조지훈이 친구들을 찾아 나섰을 때, 시인을 위하여 시간을 선뜻 할애해준 분은 적어도 유명인사 중에는 없었다. 목월도 건강을 위하라는 말로 그에게 시간을 내주지 않았다. 지훈의 탄식이다.
“식민지시대에는 왜인들에게, 자유당 정권 시절에는 친일파들에게, 군부시절에는 또 그들에게... . 핍박받고 따돌림을 당해도 그저 그랬는데,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기도 했고... . 그런데 오늘 목월의 돌아섬은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많이 아프구나!”
- 자칭세칭 청록파靑鹿派 시인의 일원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된 문화사인 『한국문화사 서설序說』의 저자인 지훈芝薰 조동탁趙東卓 시인을 찾아서, 마지막 지사志士의 모습을 보고 배우려 한다.
올곧은 뜻이기에 한번 펼친 뜻 저버릴 수 없어서 절대권력 앞에서 많이 고통스러웠고, 등을 돌리는 친구들의 비겁한 뒷모습에 슬프고 외로웠던 지사시인 조지훈의 지란훈향에 상기도 코도 콧등도 아프다. 반권위주의운동을 실천궁행하다가 외톨이가 된 후의 일이다.
시인이자 국어 국문학자에, 문화사학자이자 교육자로서 제자를 분신처럼 아낀 시대의 스승이기도 했다.
대한나라 마지막 선비요 지사로 추앙받으면서도, 후학과 후손의 귀감이라 공인되었으면서도, 유불선儒彿仙의 합일合一이자 정점頂點인 선시禪詩를 완벽하게 형상화形象化시킨 분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청록파의 일원으로 고풍스런 시를 쓴 교수시인 정도로 인식된 것은 친일파들의 장난 외에도 광복 후에도 여전한 권위주의 시대의 아픈 유산 아닌가 싶다.
2001년 6월 30일 김광수
조지훈趙芝薰 연보
조지훈 1920년에 태어나 1968년에 열반영생
1920년 경북 영양 출생, 본명은 조동탁趙東卓
부 한양 조 씨 조헌영趙憲泳(제헌 및 2대 국회의원, 6.25때 납북됨), 모 전주 류씨(柳魯尾류 노미) 의 4남매 중 둘째아들로 출생. 어릴 때 할아버지(조인석 趙寅錫,이조말 성균관과 사헌부 대간大諫 지냄)께 한학을 수학하고 보통학교 3년 수학 후, 초중 고교 과정을 모두 독학으로 공부 함.
1939년 <문장>지에 「고풍의상」「승무」「봉황수」
1940년 21세 약관의 나이로 경북 영주의 독립운동가 김성규金成圭선생의 장녀 김난희金蘭姬 님과 결혼
1941년 혜화전문학교 문과 졸업
1941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학원’ 강사를 하면서 불경佛經 연구와 당시唐詩를 탐독 하면서 독학
1942년 ‘조선어학회’『큰 사전』 편찬위원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약 일 년 가까이 옥고를 치름
1946년 경기여고 교사(2월), 전국문필가협회 중앙위원(3월), 청년문학가협회 고전문학부장(4 월)' 박두진, 박목월과의 공저 '청록집'간행, 서울여자의전女子醫專)교수(9월).
1947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창립위원(2월) , 동국대 강사.
1948년 고려대학교 교수로 취임하며 교수생활 시작
1950년 6.25 발발과 더불어 문총구국대 기획위원장(7월).
1951년. 종군문인단 부단장(5월), 종군작가로 활약
1959년 민권수호연맹 중앙위원. 공명선거 전국위원회 중앙위원.
1960년 한국교수협회 중앙위원.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이사. 3.1 독립선언 기념비 건립위원회 이사.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평의원.
1961년 세계문화 자유회의 한국본부 창립위원. 벨기에의 크노크에서 열린 국제 시인회의 한 국대표로 참가. 한국 휴머니스트회 평의원.
1962년 고려대 한국고전국역위원장.
1963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
1965년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편찬위원.
1966년 민족문화추진위원회 편집위원.
1967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신시 60년 기념사업회 회장
1968년 5월 17일 기관지확장으로 영면永眠)경기도 남양주시 마석리 송라산에 묻힘.
1972년 서울 남산에 '조지훈 시비'가 세워짐.
1973년 '조지훈 전집' (전 7권)을 일지사에서 펴냄.
1978년 '조지훈 연구'가 고려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냄.
1982년 향리 주실에 '지훈 조동탁 시비'를 세움.
1996년 조지훈 전집(전 9권)을 나남출판사에서 펴냄.
2000년 '지훈상(지훈 문학상, 지훈 국학상)제정.
2002년 문화부 '이달의 문화인물'에 선정됨.
2006년 고려대학교에 '지훈 시비' 세움.
2007년 고려대 교우회 창립 100주년 기념 ' 자랑스런 고대인상' 수상 향리에 '지훈문학기념관' 개관.
만년에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당신이 쓴 『한국문화사 서설』을 바탕으로 『한국문화사 대계』를 기획하고, 이 사업을 추진하다가 지병으로 48세에 돌아가심
저서
시집 청록파 동인지 〔청록집〕1946년 공저
『풀잎단장』 1952년
『조지훈 시선』 1956년
『역사 앞에서』 1957년
『여운餘韻』 1964년
시론『시의 원리』 1959년
수상집『창에 기대어』 1956년
『시와 인생』1959년
번역서『채근담菜根談』1959년
지조론 志操論 1962년
한국문화사대계 2권 1963년
한국독립운동사, 민족 국가사 1964년
수상집 '돌의 미학' 1964년
대표 시편들
조지훈 시인의 삶의 역정과 인생론적 관점에서 선택
고사(古寺)1
목어(木魚) 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만리(西域萬里)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파초우 芭蕉雨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촛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조 앉어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츰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동물원의 오후
마음 후줄근히 시름에 젖는 날은
동물원으로 간다.
사람으로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짐승에게라도 하소해야지.
난 너를 구경 오진 않았다 뺨을 부비며 울고 싶은 마음. 혼자서 숨어 앉아 시(詩)를 써도 읽어 줄 사람이 있어야지
쇠창살 앞을 걸어가며 정성스레 써서 모은 시집을 읽는다.
철책(鐵柵) 안에 갇힌 것은 나였다 문득 돌아다보면 사방에서 창살틈으로 이방(異邦)의 짐승들이 들여다본다.
"여기 나라 없는 시인이 있다"고 속삭이는 소리……
무인(無人)한 동물원의 오후 전도(顚倒)된 위치에 통곡(痛哭)과도 같은 낙조(落照)가 물들고 있었다.
가야금 (伽倻琴)
1 휘영청 달 밝은 제 창을 열고 홀로 앉다 품에 가득 국화 향기 외로움이 병이어라.
푸른 담배 연기 하늘에 바람 차고 붉은 술그림자 두뺨이 더워 온다.
천지가 괴괴한데 찾아올 이 하나 없다 우주(宇宙)가 망망(茫茫)해도 옛 생각은 새로워라.
달 아래 쓰러지니 깊은 밤은 바다런듯 창망(蒼茫)한 물결소리 초옥(草屋)이 떠나간다
2 조각배 노 젓듯이 가얏고를 앞에 놓고 열두줄 고른 다음 벽에 기대 말이 없다.
눈 스르르 감고 나니 흥이 먼저 앞서노라 춤추는 열손가락 제대로 맡길랐다.
구름끝 드높은 길 외기러기 울고 가네 은하(銀河) 맑은 물에 뭇별이 잠기다니.
내 무슨 한(恨)이 있어 흥망(興亡)도 꿈속으로 잊은 듯 되살아서 임 이름 부르는고.
3 풍류(風流) 가얏고에 이는 꿈이 가이없다 열두 줄 다 끊어도 울리고 말 이 心思라.
줄줄이 고로 눌러 맺힌 시름 풀이랏다 머리를 끄덕이고 손을 잠깐 쓸쩍 들어
뚱뚱 뚱 두두 뚱뚱 흥흥 응 두두뚱 뚱 조격(調格)을 다 잊으니 손끝에 피맺힌다.
구름은 왜 안 가고 달빛은 무삼일 저리 흰고 높아 가는 물소리에 청산(靑山)이 무너진다.
절정(絶頂)
나는 어느새 천길 낭떠러지에 서 있었다. 이 벼랑끝에 구름속에 또 그리고 하늘가에 이름 모를 꽃 한송이는 누가 피워 두었나 흐르는 물결이 바위에 부딪칠 때 튀어 오르는 물방울처럼 이내 공중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 그런 꽃잎이 아니었다.
몇만년을 울고 새운 별빛이기에 여기 한송이 꽃으로 피단 말가 죄 지은 사람의 가슴에 솟아 오르는 샘물이 눈가에 어리었다간 그만 불 붙는 심장으로 염통 속으로 스며들어 작은 그늘을 이루듯이 이 작은 꽃잎에 이렇게도 크낙한 그늘이 있을줄은 몰랐다. 한점 그늘에 온 우주(宇宙)가 덮인다 잠자는 우주(宇宙)가 나의 한방울 핏속에 안긴다 바람도 없는곳에 꽃잎은 바람을 일으킨다 바람을 부르는것은 날오라 손짓하는것 아 여기 먼 곳에서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보이지 않는 꽃나무 가지에 심장(心臟)이 찔린다 무슨 야수(野獸)의 체취(替臭)와도 같이 전율(戰慄)할 향기가 옮겨 온다.
나는 슬기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한송이 꽃에 영원(永遠)을 찾는다 나는 또 철모르는 어린애도 아니었다 영원(永遠)한 환상(幻想)을 위하여 절정(絶頂)의 꽃잎에 입맞추고 기리 잠들어 버릴 자유(自由)를 포기(抛棄)한다.
다시 산길을 내려온다 조약돌은 모두 태양(太陽)을 호흡(呼吸)하기 위하여 비수(匕首)처럼 빛나는데 내가 산길을 오를 때 쉬어가던 주막에는 옛 주인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 이마에 주름살이 몇개 더 늘었을 뿐이었다 울타리에 복사꽃만 구름같이 피어 있엇다 청댓잎 잎새마다 새로운 피가 돌아 산새는 그저 울고만 있었다.
문득 한 마리 흰 나비 ! 나비 ! 나비 ! 나를 잡지말아다오 나의 인생(人生)은 나비 날개의 가루처럼 가루와 함께 절명(絶命)하기에 ----- 아 눈물에 젖은 한마리 흰나비는 무엇이냐 절정(絶頂)의 꽃잎을 가슴에 물들이고 사(邪)된 마음이 없이 죄 지은 참회(懺悔)에 내가 고요히 웃고 있었다. |
■1940년대
암혈(巖穴)의 노래
야위면 야윌수록 살찌는 혼(魂)
별과 달이 부서진 생물을 마신다
젊음이 내게 준 서릿발 칼을 맞고
창이(創痍)를 어루만지며 내 홀로 쫒겨왔으나
세상에 남은 보람이 오히려 크게
풀을 뜯으며 나는 우노라
꿈이여 오는가 광야(廣野)를 달리거라
깊은 산골에 잎이 진다
■1950년대
역사 앞에서
만신(滿身)에 피를 입어 높은 언덕에 내 홀로 무슨 노래를 부른다. 언제나 찬란히 틔어 올 새로운 하늘을 위해 패자(敗者)의 영광(榮光)이여 내게 있으라. 나조차 뜻 모를 나의 노래를 허공(虛空)에 못박힌 듯 서서 부른다. 오기 전 기다리고 온 뒤에도 기다릴 영원한 나의 보람이여 묘막(渺漠)한 우주(宇宙)에 고요히 울려 가는 설움이 되라.
풀잎단장(斷章)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風雪)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 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이 피어오르는 한 떨기 영혼이여.
이력서(履歷書)
본적(本籍) 차운 샘물에 잠겨 있는 은가락지를 건져 내시는 어머니의 태몽(胎夢)에 안겨 이 세상에 왔습니다. 만세(萬歲)를 부르고 쫓겨나신 아버지의 뜨거운 핏줄을 타고 이 겨레에 태어났습니다. 서늘한 예지(叡智)의 고향(故鄕)을 그리워하다가도 불현듯 격(激)하기 쉬운 이 감정(感情)은 내가 타고난 어쩔 수 없는 슬픈 숙명(宿命)이올시다.
현주소(現住所) 서울특별시 성북동(城北洞)에 살고 있읍니다. 옛날에는 성(城) 밖이요 지금은 시내(市內)---이른바 '문안 문밖'이 나의 집이올시다. 부르조아가 될 수 없던 시골 사람도 가난하나마 이제는 한 사람 시민(市民)이올시다. 아무것이나 담을 수 있는 뷘 항아리, 아! 이것도 저것도 될 수 없는 몸짓 이 나의 천성(天性)은 저자 가까운 산골에 반생(半生)을 살아온 보람이올시다.
성명(姓名) 이름은 조지훈(趙芝薰)이올시다. 외로운 사람이올시다. 그러나 늘 항상 웃으며 사는 사람이올시다. 니힐의 심림(深林) 속에 숨어 있는 한오리 성실(誠實)의 풀잎이라 생각하십시오. 거독(孤獨)한 향기(香氣)올시다. 지극한 정성을 오욕(汚辱)의 절(折)과 바꾸지 않으려는 가난한 마음을 가진 탓이올시다.
연령(年齡) 나이는 서른 다섯이올시다. 인생(人生)은 칠십이라니 이쯤되면 반생(半生)은 착실히 살았나 봅니다. 틀림없는 후반기(後半期) 인생(人生)의 한 사람이지요. 허지만 아직은 백주(白晝) 대낮이올시다. 인생(人生)의 황혼(黃昏)을 조용히 바라볼 마음의 여우(餘裕0도 지니고 있읍니다. 소리 한가락 춤 한마당을 제대로 못 넘겨도 인생(人生)의 멋은 제법 아노라 하옵니다.
경력(經歷) 평생(平生) 경력(經歷)이 흐르는 물 차운 산이올시다. 읊은 노래가 한결같이 서러운 가락이올시다. 술 마시고 시(詩)를 지어 시(詩)를 팔아 술을 마셔--- 이 어처구니 없는 순환(循環) 경제(經濟)에 십년(十年)이 하로 같은 삶이올시다. 그리움 하나만으로 살아가옵니다. 오기 전 기다리고 온 뒤에도 기다림---묘막(渺漠)한 우주(宇宙)에 울려 가는 종소리를 들으며 살아 왔읍니다.
직업(職業) 직업(職業)은 없습니다. 사(詩) 못 쓰는 시인(詩人)이올시다. 가르칠 게 없는 훈장(訓長)이올시다. 혼자서 탄식(歎息)하는 혁명가(革命家)올시다. 꿈의 날개를 펴고 구민리(九萬里) 장천(長天)을 날아오르는 꿈, 욱척(六尺)의 수신장구(瘦身長軀)로 나는 한마리 학(鶴)이올시다. 실상은 하늘에 오르기를 바라지도 않는 괴롬을 쪼아먹는 한마리 닭이올시다.
재산(財産) 마음이 가난한 게 유일(唯一)의 재산(財産)이올시다. 어떠한 고나(苦難)에도 부질없이 생명(生命)을 포기(抛棄)하지 않을 신념(信念)이 있습니다. 조금만 건드려도 넘어질 사람이지만 폭려(暴力) 앞에 침을 뱉을 힘을 가진 약자(弱者)올시다. 패자(敗者)의 영광(榮光)을 아는 주검을 공부하는 마음이올시다. 지옥(地獄)의 평화(平和)를 믿는 사람이올시다. 속죄(贖罪)의 뇌물(賂物) 때문에 인적(人跡)이 드문 쓸쓸한 지옥(地獄)을 능히 견디어 낼 마음이올시다.
거짓말은 할 수 없는 사람이올시다. 참말은 안 쓰는 편이 더 진실(眞實)합니다. 당신의 생각대로 하옵소서 --- 고자일생(孔子一生) 취직난(就職難)이라더니 이력서(履歷書)는 너무 많이 쓸 것이 아닌가 하옵니다.
마음의 태양(太陽)
꽃 다이 타오르는 햇살을 향하여 고요히 돌아가는 해바라기처럼 높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맑은 넋을 살게 하라.
가시밭길을 넘어 그윽히 웃는 한 송이 꽃은 눈물의 이슬을 받아 핀다 하노니 깊고 거룩한 세상을 우러르기에 삼가 육신의 괴로움도 달게 받으라.
괴로움에 짐짓 웃을 양이면 슬픔도 오히려 아름다운 것이 고난을 사랑하는 이에게만이 마음나라의 원광은 떠오르노라.
푸른 하늘로 푸른 하늘로 항시 날아오르는 노고지리같이 맑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높은 넋을 살게 하라.
빛을찾아 가는 길
사슴이랑 이리 함께 산길을 가며 바위틈에 어리 우는 물을 마시면 살아 있는 즐거움의 저 언덕에서 아련히 풀피리도 들려오누나. 해바라기 닮아 가는 내 눈동자는 자운 피어나는 청동의 향로 동해 동녘 바다에 해 떠오는 아침에 북받치는 설움을 하소하리라. 돌 뿌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이 아물어 꽃잎에 스치는 날은 푸 나무에 열리는 과일을 따며 춤과 노래도 가꾸어보자. 빛을 찾아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 슬픈 구름 걷어 가는 바람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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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잠언(箴言)
너희 그 착하디 착한 마음을 짓밟는 불의(不義)한 권력에 저항하라.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는 세상에 그것을 그런 양하려는 너희 그 더러운 마음을 고발하라.
보리를 콩이라고 짐짓 눈감으려는 너희 그 거짓 초연한 마음을 침 뱉으라.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둥근 돌은 굴러서 떨어지느니
병든 세월에 포용되지 말고 너희 양심을 끝까지 소인(小人)의 칼날 앞에 겨누라.
먼저 너 자신의 더러운 마음에 저헝하라. 사특한 마음을 고발하라.
그리고 통곡하라.
병(病)에게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虛無)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 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生)에의 집착과 미련(未練)은 없어도 이 생(生)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地獄)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는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린 다시 인생(人生)을 얘기해 보세그려.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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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많이 배우고 갑니다^^
김선생님 감사합니다.
자주 방문해 주시고 부담 갖지 마시고
좋은 글, 여러 정보 공유 바랍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