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의 눈
- 심상주와 주선미의 시
강병철
1)
두 시인 모두 지난한 문단 캐리어를 거쳐 「작가마루」에 입성했던 바 신입회원으로 주석을 달게 됨이 민망했음을 감히 밝힌다. 그나마 작가마루 29호와 이번 호에 실린 달랑 네 편씩의 작품이니 평 자체가 ‘겉핥기’임을 인정한다. 용서하시라.
2)
먼저 취객들을 장승처럼 지켜주는 심상주 시인이다. 시적 배경은 ‘음울한 기억의 우물 속 반추’와 ‘신변잡기에서 그림자 찾기’로 해석이 된다. 그래서일까, 착한 인정과 외로운 다짐이 겹겹이 비춰진다. 그리고 자주 비장하다.
가을 눈에 떨어져선 안 된다
가을 눈은 털어내야 한다
삼십 년 건너온 아버지 목소리가
산까치 울음으로 흰 숲을 깨워
가을 나무들이 푸르게 눈을 지우고
나는 쉰셋의 어깨에 쌓인 눈을 턴다
「가을 눈」 부분
늦가을 단풍 속 눈발을 바라보는 시인의 다짐은 소박하다. 예순 셋, 청청한 연륜의 부친을 일찍 망자로 보냈으니 여하를 막론하고 그는 불효자가 된 것이다. ‘가을 눈에 떨어져선 안 된다’ 다짐하며 구천으로 떠난 부친과 보살펴야 할 가족들을 연결시킨다. 그래서 ‘푸르게 눈을 지우고’ ‘어깨에 쌓인 눈을 턴다’라고 토로하는 것이다. 시인은 그렇듯 직선형 문장인데도 특유의 애잔함으로 독자들을 추스르니, 얼개가 촘촘하지 않은데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이유이다. 이제 장년의 문턱에 서서 나머지 고초들도 기꺼이 견디겠노라 술회하는 중이다.
꽃자리마다 분탕질하는
화적떼 같은 꿀벌 소리
잉-, 잉-, 이-잉-
저 소리 훑고 간 꽃봉오리
꿀 마르고 꽃가루 흩어져도
잉태된 생명 푸르게 익어가리니
「종심(從心)」 부분
논어 위정편의 ‘마음의 좇음’에서 착상한 시문이다. 아카시아 꽃등을 배회하던 벌떼들이 제비꽃으로 옮기는 도정에서 종심(從心)을 견인하는 것이다. 그렇다. 꽃대궁 이쪽저쪽 넘나들면서 함부로 분탕질하는 벌떼들은 그 유희성 동작만으로도 일용할 양식을 취하고 꽃들의 생명을 잉태시키니 그게 생명의 시다. 마찬가지다. 시인은 때로 아주 화끈한 과장으로 섬뜩하게 포장해야 할 때가 있으니, ‘화적떼 같은 꿀벌 소리’ 같은 시어이다. 시란 과연 무엇인가, 무심히 스쳐간 스크린에서 숨겨진 진리를 찾아내는 예민한 감각대이다. ‘어린 왕자’의 장미가 그렇고, 날마다 불쏘시개로 청소하던 분화구가 그렇다.
새벽 세 시, 설핏 잠에서 깨어보니
큰애 방에서 나온 형광등 불빛이
거실까지 훤하게 드리워져 있다
가만 들여다보니 잠 든 아이 손 끝에
아직 잠들지 못한 책이 매달려 있고
딸의 다리가 끝난 침대 귀퉁이에
흰 강아지가 동그랗게 말려있다
「문이 열린 방」 부분
새벽 세 시, 사위는 적막하다. 수험생 딸은 잠에 빠진 채 여전히 책을 놓지 못하고 있는데 소녀의 발치 아래 강아지 한 마리 동반자로 인형처럼 붙어있다. 가장은 가슴이 짠해진다. 시린 콧등 감추며 살며시 문을 닫는데 딸내미의 ‘문 닫지 마세요. 강아지 물 먹으러 가야하니까’라는 요청이 잠결의 스냅으로 발목을 잡는다. 그는 그렇게 ‘물리적 창문’과 ‘마음의 문’을 동시에 열어놓아야 함을 깨닫는다. 소품의 소재에서 아리고 시린 감동이 절절하니 그게 시적 진실이다.
어린 날 쇠 낫 맞은 아카시아나무
쇳 낫보다 굵어져 깊은 곳에 쇳덩이를 숨기듯
퍼렇게 날 세우며 가시처럼 살던 아이
스스로 가시 버리는 아카시아 큰 줄기가 되어 있다
「아카시아나무」 부분
녹슨 쇠붙이 하나 심장에 박혔던 60-70년대 혹은 그 이후의 질풍노도 사연이다. 까까머리 시절, 콩밭 매던 그에게 담임님이 ‘학교에 무단결석한 놈’이라며 싸대기를 날린 것이다. 당연히 해결책이 없었다. 단지 나무에 낫을 치며 분을 풀던 심장 뾰족한 소년이 수십 성상 세월을 보내면서 밑동 동그란 무처럼 마음도 무난해졌을 뿐이다. 그랬다. 예전의 스승들 중에는 횡포 같은 체벌이 일상화된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시험문제 틀린 점수대로 엉덩이 찜질을 당한 경험들은 차치하고라도 공납금을 내지 못해 맞거나 집으로 돌려보낸 기억들이 수도 없이 많다. 가해 스승들은 뒤끝 깔끔하게 잊고 살지만 제자에게 평생 아픈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개발도상 시대의 교육 환경은 그만큼 모질고도 강팍했다.
필자 역시 교탁 위에 올라서서 종아리 100대를 맞은 기억이 있으니 수업시간에 허락없이 필기를 했다는 이유이다. 그 수학 스승님은 ‘필기 시작’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는 무르팍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했는데 마음 급한 소년 하나 그 지시를 어긴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 소년 혼자 눈물을 꺼이꺼이 삼켰을 뿐 구경꾼들까지 까맣게 잊혀진 스크린이었을 뿐이다.
세월이 흘렀고, 가장이 된 시인이 지난날들을 회고하는 것이다. 심상주 시인, 이제 그는 낫에 찍힌 아카시아 흉터의 푸른 그늘도 틈실한 연륜으로 폭삭 덮은 채 막걸리 한 잔 삭여도 될 것이다. 아픈 상처가 상큼한 문장으로 돌변할 수도 있으니 그 해답은 연륜 있는 시인의 손끝에 있다.
3)
주선미 시인은 나와 면식이 두텁지 않으니 그냥 촉수가 정의로운 시인이라고 막연하게 알고 있는 정도이다. 「안면도 가는 길」, 「일몰, 와온 바다에서」라는 두 권의 시집을 상재했으며 완곡한 표현으로 행간의 정점을 드러내는 시인이다.
그녀는 나무가 되었을까
맨발로 허공을 딛고 나면
손마디에 돋은 뿌리가 땅속을 파고 들자
잎사귀는 푸른 동맥을 타고 흐르다
온몸을 덮고
사타구니에 계속 피어나는 꽃들은 물을 찾아
촉수를 안테나처럼 세우고 있어
「거꾸로 선 나무」 부분
왜 하필 ‘거꾸로 선 나무’가 화두로 등장하는가? 이 땅에 여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엄마라는 여자’는 제발 무엇일까? 그 뒤웅박 팔자를 당연히 차단하고 싶지만 해결방안이 녹녹치 않으므로 정면 돌파나 완전 포기까지, 두 가지 모두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시국은 양성평등의 대세로 가지만 여전히 업이 크므로 ‘우주로 날아가는 꿈’은 때때로 꿈으로만 머물기도 한다. 게다가 엄마라는 ‘모성애 포장’이 여성해방의 ‘무거운 짐’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문득 일제강점기 용산역 어디쯤에서 ‘파리’ 하고 기차표를 끊던 나혜석(1927년, 27세)의 표정이 겹쳐진다. ‘여자의 지위는 과연 어디에 있고 남녀는 과연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는 나혜석의 「조선 여성 첫 세계일주」에서의 술회이다. 그러니까 그 억압과 차별은 고통의 근원인 동시에 시적 소재가 되기도 한다.
마지막 연 ‘무선을 타고 행방불명이 된 아이의 목소리’는 따로 시인의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행간이 깊으니 해석이 만만찮음이 감지된다.
서울 왔다가 돌아가는 길
돈화문 앞 도로를 지나오는데
길 가의 플라터너스를 자르는 전기톱 소리
내 팔이 잘려나가는 듯 아프다
겨우내 눈보라 몰아쳐도
살갗에 이는 부드러운 바람 가져다 줄 봄
솟아나길 고대하면서
참고 견디며 지켜온 싹들이
모두 잘려나간다
「허공에 기대어 선」 부분
전기톱으로 잘린 채 미로의 비너스처럼 몸통만 남았던 플러타너스가 이듬해 봄비를 받으며 풋풋한 싹을 피어 올리는 장면이다. 죽은 몸통으로 새싹을 피워 올리니 그게 ‘개펄에서 진주를 찾는 어미의 마음’이다. 이 땅에서 기득권이 되지 못한 모든 삶들이 그렇듯 희생만을 업으로 삼으며 견디고 있으니 아름답고 허망하다. 잘린 몸으로 싹을 틔우는 나목의 의지, 눈부시고 눈물겹다.
극장 간판 사라진 자리
스커트를 흔드는 가을바람 맞으며
보고 싶은 사람 기다리는데
보석가게만 빽빽이 들어 서 있다
카페 화려한 불빛이 들어서고
멀티빌딩이 요염한 자태로 손짓하는
찬바람 부는 가을 오후
30년 동안 일터로 돌아가지 못한 김용희 씨
강남 역 통신 탑에서 새우처럼 구부린 채
사라진 책상 돌려달라고 침묵의 소리
쏟아 내고 있다
「피카디리 앞에서」 부분
파고다 공원 근방은 한때 서울의 번화가였지만 지금은 외로운 노인들의 피신처인 사각지대가 될 판이다. 舊도심지 한복판 비좁은 가게와 네일아트 그리고 피카디리 옆 골목 빛바랜 전당포와 직업소개소 간판이 유물처럼 존재한다. 시적 소재가 즐비한 건 입간판들의 쟁쟁한 외침이 시인의 심장에 사무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이다. 피켓 든 상품들의 구호가 소비의 욕구를 자극하는 장면들이 유독 시인의 눈에만 잡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의 정점은 또 다른 자리에 있으니 30년 동안 일터에 들어가지 못함 김용희 노동자의 투쟁 현장이다. 삼성해고자 김용희(60세) 노동자는 81째 고공농성 중이며(2019.8.29현재) 26일부터 재단식에 돌입했다. 某정당 국회의원들처럼 5시간 30분짜리 릴레이 개그단식이 아니라 생과 사의 목숨을 건 단식이다. 그게 끝이다. 모두들 시류의 소용돌이에 눈동자가 쏠려 노동자의 외침이 들리지 않을 때 시인만의 포커스에 들어온 것이다. 수만 송이 장미에서도 벌레 먹은 상처의 꽃잎 하나 적확하게 그려내니 그게 ‘마음의 눈’이다. 절제된 표현 그리고 행간의 외침!
친구가 보내온 겨울 제주도
추사가 유배 살이 한 돌담 집에는
한겨울인데도 마당 그득하게
수선화 활짝 피어있다
(중략)
한동안 세상과 단절된 것으로도 모자라
발자국 한 번 제대로 밖으로 못 디디고
가시관을 쓴 듯 먹만 갈았구나
내 가슴이 이렇게 가시에 찔린 듯 아픈 것도
「겨울 유배지」 부분
‘유배된 지사’ 추사 김정희를 겹쳐놓은 제주도가 배경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의 팔을 자르라고 했던가. 안마당을 뚫어지게 쳐다보니 베일 속의 숨소리조차 오래된 장식품처럼 선명하다. 추사의 붓끝과 유배지 그리고 파도소리가 옆서 한 장을 꽉 채워준다. 그 옛날 선비는 얼마나 외로움에 사무친 채 글에만 몰입했을까, 를 떠올리며 시인은 시 창작 노트를 화들짝 꺼내는 것이다.
4)
좋은 시란 무엇인가? 이완을 절제하고 압축시키되 혹여 호흡이 필요하면 배경 지식을 완전히 소화한 다음 질펀히 어우러지게 해야 한다. 작은 사물에서도 우주를 당겨낼 수 있는 혜안도 필요하다. 상상력은 무궁하니 끌어낼 때마다 고구마 뿌리처럼 뽑혀 나온다. 시인의 캐릭터 정립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필자는 목숨 건 열정과 승부수를 가차 없이 꼽는다. 동시에 두 시인 모두에게 샘물처럼 퐁퐁 솟는 시적 자양분을 전폭적으로 기대하는 바이다. 배추뿌리 뽑아낸 자리마다 억새꽃 하얀 보푸라기만 허허로운 늦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