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는 요나서를 공들여 구상한 우상 내러티브로 보고 있다. 우상은 모든 면에서 우리 행동을 조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될 때조차도 우리를 그분에게서 더 멀어지게 만든다고 했다. 나는 요나서를 읽을 때마다 요나 선지자가 친숙하게 느껴진다. 하나님께 반항하고 자기 뜻과 다른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도망가는 요나 선지자의 모습이 내 모습과 같다고 생각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내 역량으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향해 사랑하라고 하실까 봐 미리 선수를 친다. 그런 말씀에는 마음을 닫아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집요하게 나를 이리저리 주무르시며 빚어가신다.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을 향해 어린애처럼 말대꾸하며 투정을 부릴 때도 하나님은 노여워하시지 않고 요나의 인간적인 입장을 아시면서도 흥얼거리는 아이를 달래듯이 요나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 주신다. 하나님의 따뜻하신 사랑과 긍휼, 다함 없는 자비를 느낀다. 그래서 요나서를 읽을 때마다 한바탕 웃게 된다. 하나님께 스스럼없이 투정 부리는 요나의 태도가 어이없긴 하나 밉지 않고 친근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또한 두렵기보다 인자하고 긍휼하심이 한량없는 분으로 다가온다.
이제 팀 켈러 목사님의 설교에 귀를 기울여 보자.
요나서의 극적인 긴장감이 한껏 감도는 내용은 첫 문장에서 시작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욘1:1~2)
요나는 북이스라엘 선지자이다.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요나가 시키는 대로 팽창주의 군사정책에 힘써 나라 영토를 넓혔다고 한다. 같은 시대의 아모스와 호세아는 왕실의 부패한 행정을 질타했다. 그러나 요나는 왕이 민족주의적 열의로 부국강병에 매달리는데도 그 잘못을 지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단다. 이런 선지자라면 니느웨성으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기겁했을 것이다.
니느웨는 세상에서 가장 막강한 도시로 앗수르 제국의 본산이었다. 군사력으로 이스라엘과 주변국을 쳐부수려 위협했으므로 어떤 식으로든 앗수르를 이롭게 하는 행위는 곧 이스라엘에 대한 자해 행위로 보였을 것이다. 사명은 ‘그 성읍의 악을 향하여 외치는 데 그쳤다. 그래도 심판을 면할 가망이 없고서야 경고를 말할 이유도 없었을 테고, 요나도 그 점을 아주 잘 알았다. 하나님은 자비로 자기 백성의 철천지원수에게 다가가셨다. 이보다 더 직관에 반하는 사명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애국심이 투철한 유대인 선지자를 보내 그 일을 하게 하셨다. 이보다 더 부적격한 사신을 뽑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명하신 일이 그에게는 당연히 언어도단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사명은 그것이었고 그는 이 사명을 맡은 선지자였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라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1:3)
요나는 동쪽의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일부러 거역하고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갔다. 그곳은 알려진 세상의 서쪽 끝에 있던 성읍이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과는 정반대로 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팀 켈러는 요나가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에 그토록 대놓고 불순종한 이유에 대해 몇 가지 단서를 제시한다. 우선 요나는 실패가 두려웠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 히브리 선지자를 불러 세상에서 가장 막강한 도시에 홀로 들어가게 하셨다. 그는 그곳 사람들에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라고 외쳐야 했는데, 돌아올 결과라고는 조롱이나 죽음밖에 없어 보였다. 웃음거리가 되는 것 못지않게 죽임을 당할 가능성도 높았다.
설교자는 자기 말이 먹히는 곳으로 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작은 성공일지라도 사명의 성공 가능성이 또한 두려웠을 것이다. 앗수르는 잔인하고 폭압적인 제국이었고 이미 이스라엘에게 일종의 국제 보호 기금인 공물을 요구하고 있었다.
요나가 명령대로 니느웨에 하나님의 진노를 경고하면 자칫 그들이 살아남아 계속 이스라엘을 위협할 소지가 있었다. 애국자인 요나는 그런 일에 가담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요나가 도망간 이유는 그의 내면에 있는 우상숭배 때문이라고 팀 켈러는 말한다. 그는 우선 요나 개인의 우상을 지적한다. 요나는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 자기 사역의 성공을 더 원했다는 것이다. 요나를 빚어낸 문화적 우상도 언급한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니느웨 사람들의 영적 유익보다 이스라엘의 국익을 앞세웠다.
끝으로 요나의 종교적 우상을 언급하고 있다. 요나는 무조건 자신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여겼다. 악한 이교도인 니느웨 사람들을 향해 우월감을 느꼈고 그들이 구원받는 게 싫었다. 그래서 요나의 문화적 우상과 개인적 우상이 한데 녹아 독소가 되어 자기 안에 감쪽같이 숨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섬긴다는 하나님께 반항했다는 것이다.
마침내 요나는 하나님을 피하고 사명을 피하려고 배에 올라탔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사나운 풍랑이 배를 침몰시킬 듯 위협했다. 유난히 지독한 풍랑임을 감지한 선원들은 이런 재앙을 부른 사람이 누구인지 보려고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가 당첨되었다. 요나는 순순히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러 가는 중임을 그들에게 고백하게 되고, 무리들은 심히 두려워하여 요나를 책망하자 요나는 점점 흉용해지는 바람을 보고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한다. 그리하면 바다가 그들을 위하여 잔잔하게 될 것이며 큰 폭풍을 만난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밝힌다(욘 1:10~12). 죽음이 두려운 선원들이 요나의 말대로 그를 바닷속에 던지자 하나님이 보내신 물고기가 그를 삼켜 살려낸다. 하나님은 자신을 거역하고 도망가는 요나에게 예비하신 물고기를 보내어 살리신다. 덕분에 요나는 물고기의 배 속에서 하나님께 회개하며 회복을 위한 기도를 드리게 된다.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거짓되고 헛된 것(우상)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욘2;1~2, 4, 8~10)
그는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자”(8절)를 말했는데, 하나님이 요나에게 가라고 명하신 곳인 니느웨의 백성이야말로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요나가 그들에 대해 놀라운 말을 한다. 이 우상 숭배자들이 ’자기에게 베푸신 헤세드‘를 버렸다는 것이다. ’헤세드란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 구속하시는 무조건적인 은혜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로 그분과 그분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관계를 기술할 때 늘 쓰이는 용어다. 그런데 요나는 우상숭배자들이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8절)를 버렸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요나 자신에게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심을 청천벽력처럼 깨달은 것이다.
그분은 왜 그러실까? 은혜는 은혜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참된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으며, 따라서 모두가 대등하다. 그 사실을 깨닫고 그는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9절)." 라고 아뢴다. 구원은 어느 민족이나 계층에 속한 게 아니며,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종교가 없는 사람보다 더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다. 구원은 전혀 우리 쪽의 자격이나 공로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그분의 은혜로 온다. 그런데 우리 삶 속에 은혜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팀 켈러는 우상에 집착하면 그렇게 된다고 한다. 요나는 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그리도 몰랐을까?
바로 그의 우상숭배 때문이다. 요나는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자기 종교를 자랑했고, 자기 조국을 열렬히 사랑했다. 그것이 하나로 합해져 치명적인 우상 덩어리가 되었기에 그는 영적으로 눈이 멀어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했다. 그 결과 그는 은혜가 필요한 한 도시에 그 은혜를 베풀 마음이 없었고 그들이 다 죽기를 바랐다.
팀 켈러는 또한 ‘은혜의 복음’과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을 알려 준다. 즉 인종적 우월감과 문화적 편협성은 은혜의 복음과 공존할 수 없다고 한다. 상호 배타적이라서 한쪽이 다른 한쪽을 밀어낸다. 인간의 마음은 자신을 정당화하는 본성 때문에 자기 문화나 계층의 특성이 나머지 모든 이보다 우월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은 이런 본능적 성향을 저지한다. 바울이 베드로의 잘못을 지적한 갈라디아서 2장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유대인인 베드로 사도는 어려서부터 이방인이 영적으로 ‘부정한’ 사람이라서 음식을 함께 먹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고대 문화에서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건 개방과 수용을 상징했다. 베드로가 일부러 이방 그리스도인과 함께 식탁에 앉지 않는 것을 보고 바울은 그의 민족적 우월감을 지적했다. 즉,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갈2:14참조).
바울에 따르면 인종적 편견은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원리 자체를 부정한다. 팀 켈러는 그 상황을 이렇게 보고 있다. ‘베드로여, 우리가 다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면 어떻게 당신은 남에 대해 우월감을 느낄 수 있소? 어떻게 인종적, 민족적으로 계속 배척할 수 있소? 당신 마음에 먼저 복음을 적용하시오!’
우리도 불신자들을 배척하고 그들보다 우월한 감을 느끼고 산다면 복음을 깊이 모르는 자일 수밖에 없다. 팀 켈러는,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하지 못한 이들은 자기 확신을 떠받칠 영적 구명대를 찾아다니며 미친 듯이 찾느라고 자신의 알량한 능력과 의에 매달릴 뿐 아니라 어떻게든 자신의 인종, 소속, 몸에 밴 사회생활, 교회 생활, 문화 등을 통해 자신을 정당화한다고 한다.
그는 내면의 회의를 막겠다고 문화를 갑옷처럼 입으면 그것이 정신적 구속복이 되어 삶에 들러붙어서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을 총체적으로 믿지 않고는 결코 그 옷을 벗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제 팀 켈러의 생각을 계속 따라 가보자.
물고기 배 속에서 요나는 자신이 여태 무엇을 놓쳤으며 하나님의 첫 부름에 왜 그토록 반감이 들었는지 깨달았을 것이다. 요나는 세상의 가장 큰 도시에 가서 은혜를 전하도록 부름 받았으나 정작 본인은 그 은혜를 몰랐다. 한 방 맞고 겸허해진 그는 조금씩 진리를 깨달았다. 구원은 은혜이므로 누구나 받을 수 있다. 그 점을 이해하고 나자 그의 문화적 우상은 사라진 듯 보인다. 마침 그때 물고기가 그를 토해내 선지자 요나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