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숭배는 요나의 사고를 뒤틀어놓았다. 그가 늘어놓는 궤변은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니다. 하나님이 긍휼과 사랑과 인내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그가 어떻게 격노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이유는 상사병에 걸린 야곱이 그리 쉽게 속을 수 있었던 이유나 탐욕에 찌든 삭개오가 조국과 동포를 배신할 수 있었던 이유와 똑같다. 이들은 다 우상 때문에 눈이 멀어 있었다. 우상이 우리 마음을 장악하면 결국은 성공과 실패와 행복과 슬픔의 정의가 몽땅 변하게 된다. 우상의 기준대로 현실이 재정의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와 긍휼은 누가 보기에도 선한 것이다. 그런데 우상 때문에 민족의 세력과 위상이 궁극적 선(善)이 되면 거기에는 방해되는 것은 당연히 다 악으로 변한다. 그분이 이스라엘의 적을 멸하지 않으신 것은 사랑이 많으셔서인데, 우상 때문에 요나에게는 그 사랑까지도 악한 것으로 보였다. 결국 악을 선이라 하고 선을 악이라 하는 게 우상 때문에 가능해진다.
우상은 우리의 사고만 아니라 감정까지도 뒤틀어놓는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늘 밑에 앉았더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며 시드니라 해가 뜰 때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말미암이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욘4;4~9)
요나는 자신이 멸시하던 성읍을 떠나 초막을 지어 햇볕을 가렸다. 아직도 그는 하나님이 돌이키신 뜻을 다시 돌이켜 니느웨를 멸하시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분의 관심은 요나에게 있었다. 하나님은 속성으로 자라는 넝쿨식물인 ’박 넝쿨‘로 요나의 초막에 서늘한 응달이 지게 해 주셨다. 푸른 잎과 쾌적한 그늘은 낙담한 선지자에게 위안이 되어 주었다.
그때 하나님이 그의 삶에 작지만 새로운 실망을 안겨 주셨다. 식물을 죽게 하신 것이다. 요나는 어찌나 감정이 상했던지 다시 낙심에 빠져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이번에도 너무 화가 나서 길길이 뛰었다. 그 분노가 정당하냐고 하나님이 다시 물으시자 그는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9절) 정당하다고 되받았다. 하나님은 그의 잘못을 지적하셨다. 분노가 틀렸다고 하신 건 아니다. 그분도 불의와 악에는 진노하신다고 수시로 말씀하신다. 다만 요나의 분노는 정당하지 못했고 균형을 잃었다.
요나는 왜 삶의 의욕을 잃었는가?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는 삶의 의욕도 잃을 수 없다. 요나에게 삶의 의미란 바로 조국의 자유였다. 그것을 바라는 것 자체는 좋지만 그게 최고의 것이 되었다. 그래서 앗수르는 그를 깊은 증오와 분노로 들끓게 했다. 그들이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하나님과 그분의 자비가 요나를 분노와 절망으로 들끓게 했다. 주님이야말로 요나가 원하던 이스라엘의 미래를 막을 전능하신 장애물이었으니 말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하지 않았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4:10~11)
하나님이 지적하셨듯이 요나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11절) 수많은 사람을 걱정하기보다 자기 몸이 햇볕에 타는 것을 더 속상해했다. 조국과 도덕적 독단을 우상처럼 사랑하느라 세상의 모든 큰 도시와 나라에 대한 긍휼을 잃고 말았다. 그는 온통 자기 나라밖에 몰랐다.
하나님은 다르셨다. 요나에게 주시는 교훈의 끝부분에 그분은 일부러 요나와 자신을 비교하신다. 그분이 요나에게 명하신 일은 자신의 안전지대와 안락을 떠나, 자신을 해칠지도 모르는 백성에게 가서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이었다. 요나는 처음에는 아예 가지 않았고 나중에도 가긴 했지만, 긍휼은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너는 이 성읍을 긍휼히 여기지 않았지만 나는 긍휼히 여기겠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요나는 거부했지만, 그분은 이 악하고 강포한 도시를 사랑하시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요나가 마다한 일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몇 세기 후에 어떤 사람이 와서 자신이 참된 요나라는 말씀으로 청중을 깜짝 놀라게 했다(마 12:39~41 참조).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실 때 최고의 안전지대를 버리셨다. 자신을 해칠지도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해칠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을 섬기기 위해서였다. 그들을 구원하려고 그분은 말씀만 전하신 게 아니었다. 거기서 훨씬 더 나아가 그들을 위해 죽기까지 하셔야 했다. 첫 요나는 죽었다고 여겨졌을 뿐이지만 예수님은 실제로 죽었다가 부활하셨다. 이 사건을 그분은 요나의 표적이라 칭하셨다(마 12:39).
참된 요나이신 예수님을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분의 생애 중 마가복음 4장에 기록된 한 기사는 의도적으로 구약의 이야기를 환기시킨다. 무서운 풍랑이 일었는데 예수님도 요나처럼 그 한복판에 잠들어 계셨다. 선원들처럼 그분의 제자들도 겁에 질려 그분을 깨우며 모두 죽게 생겼다고 말했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의 능력으로 풍랑은 기적처럼 잔잔해지고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여기 큰 차이가 있다. 요나는 바람과 물의 풍랑 속에 내던져졌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최악의 풍랑 속에 내던져지셨다. 우리 죄악 때문에 마땅히 우리가 당해야 할 하나님의 모든 공의와 형벌을 그분이 당하신 것이다. 나는 내 안의 우상으로 힘들 때면 예수님을 생각한다. 나를 위해 자진해 그 최악의 풍랑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순복하신 그분을 떠올린다. 예수님이 그 끔찍한 풍랑 속에 가라앉으셨기에 나는 인생의 다른 어떤 풍랑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예수님이 그렇게까지 해 주셨기에 내 삶의 가치와 확신과 사명이 그분께 있음을 나는 안다. 이 땅의 온갖 풍랑이 많은 것과 내 목숨까지 앗아갈 수 있어도 내 생명이신 예수님을 앗아갈 수는 없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암시하셨듯이 그분은 요나와 달리 이 땅의 잃어버린 큰 성읍들을 사랑하실 것이었다. 이 약속은 참 요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성취되었다.
요나서는 질문으로 끝난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렇게 물으신다. “네 사랑도 내 사랑과 같아야 하지 않겠느냐? 너밖에 모르는 그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이제부터 나를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살겠느냐?” 독자는 대답을 기다리지만, 말씀은 말없이 거기서 끝나 버린다.
하지만 이 결말은 기발하고 만족스럽다. 만족스럽다고 함은 요나가 회개하고 깨우쳤을지의 여부를 우리가 고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 회개했을 것이다. 어떻게 아는가? 요나가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이 이야기를 알겠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심중 깊이 파고들지 않고서야 그 누가 자신이 시종일관 악한 바보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공개하겠는가? 그래도 이 책에 요나의 반응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치 하나님이 사랑의 책망이라는 화살을 요나의 심장에 겨누어 쏘셨는데 돌연 요나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우리가 서 있는 것 같다.
질문은 바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가 요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우상의 노예가 된 나머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 큰 도시에 사는 사람들. 자기 가족인데도 사랑하기 몹시 힘든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우리도 요나처럼 변화될 의향이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참된 요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표적인 죽음과 부활을 바라보도록 해야 할 것이다. 팀 켈러 목사님의 글은 여기서 끝맺는다.
우리의 내면을 예리하게 들여다보고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부름에 즉시 순종하지 못한 이유를 세밀하게 밝히면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으로 그려내어 줄 뿐 아니라 요나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매듭지어 참 선지자요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깊이 만나게 해 준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을 통하여 내면의 우상과 교만한 아집을 무너뜨리고 끊임없이 낮추사 겸손함과 온유한 미덕 위에 지혜의 영을 더하게 하사 우리의 골수와 혼과 영을 쪼개어 성령 안에서 주의 영이 거하실 마음의 처소를 예비해 주신다. 그래서 당신이 만드신 이 세상에서 자기 백성과 사귀며 소통하시길 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라면 더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그분만으로 흡족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