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은 사랑학이다. 아니 사랑학이 신학이다.
누군가 내게 백만송이 장미 꽃다발을 주었다면 분명 그 사람은 내게 지대한 관심과 사랑의 마음을 표현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온 산과 들판에 시시때때로 장미 꽃만 아니라 이름지을 수 없을 만큼 많고 많은 아름다운 온갖 종류의 꽃들로 수놓으시며 우리의 시각을 즐겁게 하시려고 우리를 향한 그 관심을 수 천년동안 쉼없이 보이셨는데... 그 뿐만이 겠는가 꽃향기 내음새로 시시때때로 우리의 후각을 자극하며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려하였는데... 그뿐만이겠는가?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 동물의 울음소리, 사람의 말 소리들을 통하여 오늘도 수백만마디의 의미있는 소리를 보내시고 계시는데...
누군가 내게 수 천년을 마다하지 않고 여러 메신져를 보내며 나의 사는 모습을 눈여겨보며 관심을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은 내게 엄청난 열정을 쏟고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성경의 신구약을 통해 우리를 향해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들은 무엇을 증언하고 있는가? 그것도 수십년도 아니고, 수백년도 아니고 수천년 동안을 끊임없이 보내시며 종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하시려고...
누군가 내게 수천통의 사랑의 편지를 보내어 소식을 전하며 관심을 보였다면 그 사람은 진정 나를 사랑하는 사람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수없이 쓰여진 성경의 구절구절마다 질투하리만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애정(?)의 몸짓이 보이질 않는가? 어찌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지 못하겠는가? 꼭 ‘자기, 사랑해.'란 말로 고백해야지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혼줄나게 야단치시는 부모님처럼, 막무가네로 울어대는 아이에게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사주시는 부모님처럼, 좌절과 실망에 몸부리 치며 죽고 싶은 그 순간에 찾아온 친구처럼, 깨알같이 흰 종이 위에 쓰여진 눈물로 써내려간 길고도 긴 편지처럼... 지금도 그 사랑 전하려고 짝을 맺으시며 그 사랑 알도록 배우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 ...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어오라는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붉은 장미를 창가에서, 창가에서, 창가에서 그대는 보고 있는지 사랑에 빠진, 사랑에 빠진, 진정으로 사랑에 빠진 한 사람이 그대를 위하여 자신의 삶을 꽃과 바꾸어 버렸다네...(중략)(러시아 가요 백만송이 장미중에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중략) 말1:2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솔직한 사랑의 고백 앞에 우리 인간의 대답은 너무나 매정하다.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나이까?” 좀 현대식으로 고쳐 표현해본다면 “우리를 사랑한다고요. 좀 제대로 하나님 사랑을 보여줘 보세요. 별로 느낌이 없네요. 피부에 와 닿는 그런 사랑을 하나님은 모르세요? 좀 더 세련되게 말이에요...” 이같은 무정한 말에 하나님은 너무나 큰 충격으로 인해 그만 넋을 잃어버렸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근 400여년간 긴 침묵의 시간이 지났다. 이 순간까지 4천여년을 한결같이 사랑해왔는데 “뭐 우리를 사랑했다고요“라는 반문에 그만 그만 하나님은 정신을 잃어 실성하셨다. 이 침묵의 시간동안 하나님의 고민은 오로지 한가지였을 것이다. ”사랑했는데 분명 사랑을 아낌없이 퍼부어줬는데...어찌 된 영문일까? 그렇다면 별로 상대가 알아주지 않는 그런 일방적인 사랑을 했단 말인가?“ 그러면 이들에게 진정 이해가되는 사랑은 과연 무엇인가를 고민하였을 것이다.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는데에는 단지 6일정도면 충분했지만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한 숙제문제를 푸는데는 무려 400년간의 침묵과 수천년의 시행착오(?)의 시간이 필요했다고나 할까? 그 해답을 찾게 되는 그때가 바로 요셉과 마리아를 통한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기로 작정하고 때가 찬 경륜을 따라 이 땅에 오신 주 예수의 탄생일 것이다. 직접 오시기로 작정하시고 육으로 같은 위치에서 만남을 통해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시려고하였다. 우리처럼 아픔도, 슬픔도, 배고품도, 미움도, 질투도, 싸움도, 버림도, 사업도, 직업도, 감사도, 배움도, 나눔도, 섬김도, 훈련도, 시험도, 사랑도 ... 다 통과하시고 난후 우리를 향한 주님의 결론은 사도 요한을 통하여 이렇게 정리하셨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1 4:7-10)“신학은 사랑학이다. 아니 사랑학이 신학이다. 사랑학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배워가며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알아가게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오늘도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은 사랑학을 강의하시고 기업으로 주신 자녀를 향한 사랑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깨닫도록 이끌어가시는 것이 아닐까?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붉은 장미를 창가에서, 창가에서, 창가에서 그대는 보고 있는지.
사랑에 빠진, 사랑에 빠진, 진정으로 사랑에 빠진 한 사람이 그대를 위하여 자신의 삶을 꽃과 바꾸어 버렸다네.
꽃이 되어 우리 곁에 오고 싶어 생명을 꽃과 바꾸어버린 그 분...
벌레가 되어 우리 곁에 오고 싶어 생명을 벌레와 바꾸어 버린 그 분...
나비가 되어 우리 곁에 맴돌고 싶어 생명을 나비와 바꾸어 버린 그 분...
구름과 비가 되어 우리 살결을 적시고 싶어 생명을 구름과 비로 바꾸어 버린 그 분...
나무가 되어 우리에게 상큼한 공기를 뿜어내고 싶어 생명을 나무와 바꾸어 버린 그 분...
인간이 되어 우리와 열애하고파 생명을 인간과 바꾸어버린 그 분... 아니 그 생명을 바쳐 나를 온전히 살리려고, 사랑하노라고 만천하에 알리고 싶어 높이 달리어 피묻은 두 팔을 벌려 천국문을 활짝 열어 놓으시고 함께 가자 그토록 우리를 부르시는 그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