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한의 한계를 사랑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건을 우리편에서 보면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하나님의 절대 능력의 제한이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어찌 이 정도의 우주 속에 다 들러내게 할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을 제한하는 그 과정에서 우리를 향한 엄청난 사랑을 표현하시고 기뻐하신다. 이는 마치 어머니가 갓난 아이와 대화하기 위하여 유치하게 들릴 수 있는 어휘들을 거리낌없이 사용하는 모습 속에서 어머니의 제한적 사랑이 있으며 자기 제한적 집념이 있다(장경철 목사의 쉽게 배우는 교리 이야기 중에서)
창조된 물질 세계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그 능력의 용량을 다 담을 수 없듯이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가늠하기란 무리수이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히 보기에 좋았더라고 표현은 하셨지만 그 의미가 무엇일까? 그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눈, 코 입 등 이목구비가 제대로 붙어 있는, 아름다운 몸매의 두 다리로 걷는 키가 2m 이하의 길다란 체구를 보시고 좋았다고 했을까? 아니면 하나님의 무한 능력을 다 담아 표현하려 했지만 부족한대로 나중에 그 부족 분을 채우기에 충분한 그릇으로 만들어졌기에 보시기에 좋았던 것인가? 제 개인적인 생각으론 후자인 듯 싶다. 완전하진 않아 하나님의 나머지 무한 능력을 받기에 충분한 그릇인 인간! 그분의 무한 능력은 다름 아닌 태초부터 가지셨던 ‘사랑’이셨다. 이 사랑을 받을 그릇을 만드시고 기뻐하셨고 좋아하셨던 것이지 동물중 IQ가 뛰어난 언어를 가진 고등 동물로서 인간을 보시고 육신과 재능을 통해 하나님의 무한 능력을 표출하려고 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분의 무한 능력을 표현하기에 충분하였고 완전하지 않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전달됨으로써 하나님의 무한 능력을 표현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1:3-4에서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하려 하셨으니”라고 표현함으로써 하나님 자신의 제한을 사랑의 신기한 능력으로 완성하셨다. 지금도 당사자이외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어머니가 갓난 아이에게 뭔가를 전달하려 하듯 하나님은 그 분의 무한 능력을 사랑으로 완성하고 계신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하나님..."의 노래 가사가 생각 나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가사를 무척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받기에 충분한 존재인 나!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으며 무언가 옹알거리며 내게로 다가와서 말씀걸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