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세계대회 왕자
프란시스코 휘리오
1971년 1월 10일, 브라질 바이아주 출신
91년 제5회 세계대회에 처음 출전하여 감투상 수상
95년 백인조수를 완수, 같은 해 제6회 세계대회 3위
97년 제1회 세계웨이트제 중량급 우승
99년 제7회 세계대회에서 외국인 선수 첫 우승
브리질 지부, 4단. 186cm, 99kg(당시)
프란시스코 휘리오가 처음으로 ‘이기고 싶다’가 아니라, ‘이겨야만 한다’는 심경으로 임한 것이 제1회 세계웨이트제 대회였다.
당시의 휘리오는 2년 전에 백인조수를 상처 없이 무패로 완수하였고, 이어진 제6회 세계대회에서는 당당하게 3위에 입상하는 등 이미 세계 톱 레벨의 파이터로 자리매김했었다. 실적으로 봐도 그러하였고 다음 세계대회 제패를 노리는 이상 우승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이 휘리오에게 직면한 과제였다.
게다가 절대 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세계웨이트제 대회가 끝나고 3개월 후에 극진 직속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K-1위 무대에 올라가게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기가 생기기 시작한 K-1에 도전함에 앞서 중럅급 세계챔피언이라는 호칭을 내걸고 K-1에 참가하는 것이 휘리오가 생각하는 이상의 시나리오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웨이트제 대회는 절대 질 수 없는 이겨야만 하는 싸움이었다.
대회 날이 다가오면서 휘리오에 대한 주목도는 날로 높아졌고, 그와 함께 격투기 미디어뿐만 아니라 일반 잡지와 방송국에서도 취재 요청이 쇄도했다. 당시 그의 조국인 브라질을 멀리 떠나 총본부에서 수행하고 있던 휘리오의 부담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그러나 휘리오는 대회를 앞둔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K-1에 참가하게 돼서 주목 받고 있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질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 한다는 특별한 의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와 같은 마음으로 대회에 임하여 승리하고 싶습니다.’
18명이 출전한 중량급, 휘리오의 존재는 단연 돋보였다. 준준결승까지를 본선에서 승리하였고, 준결승에서는 상대의 부상을 간파하며 매트에 쓰러뜨렸다. 상대를 무차별하게 쓰러뜨리며 결승까지 올라온 그라우베 페이토자와 비교해보면 휘리오의 싸움이 중압감이 있었다. 절대 질 수 없는 싸움에서 침착하게 승리하는 모습에서 이미 왕자의 풍채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결승전에서는 후배인 페이토자의 부상을 놓치지 않으며 하단 돌려차기로 절반을 빼앗으며 순조롭게 초대 중량급 세계챔피언에 군림하게 되었다.
괴물이라 불릴 만큼의 파워와 기술을 가짐과 동시에 무도가로서의 정신력을 추구하는 모습. 그런 자질이 최강의 외국인 선수가 아닌 ‘극진의 휘리오’로서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극진의 중량급 세계챔피언의 호칭을 손에 넣은 휘리오는 그 후로 K-1에 참가하며 놀라운 활약을 보였다. 그리고 1999년에 극진 최고의 무대인 세계대회에 출전하였고, 사상 첫 외국인 세계 왕자가 되며 세계의 극진 선수들에게 큰 꿈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제8회 세계대회 왕자
키야마 히토시
1974년 1월 9일, 카고시마현 카고시마시 출신
97년 제1회 세계웨이트제 미들급에서 우승하며 등장
00년 제32회, 01년 제33회 전일본대회 우승
01년 제2회 세계웨이트제 미들급 우승
03년 제8회 세계대회 우승. 편 일본대표 감독
나고야 중앙 지부장, 5단. 175cm, 89kg(당시)
개리 오닐에게 승리를 빼앗은 제 1회 세계웨이트제 대회가 키야마 히토시를 세상에 널리 알린 대회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일본 대표 선발전에서 3위를 하며 간신히 출전권을 따낸 23살의 키야마는 제6회 세계대회 4위이며 전년 제28회 전일본대회 준우승에 빛나는 실력을 자랑하는 실력자인 개리를 연장전에서 쓰러뜨렸다. 그 기세를 몰아 미들급 세계 챔피언의 자리까지 올라간 것이다.
‘그 이후 한 순간에 변했습니다. 공수도가로서 나의 인생은.’
큰 실적을 남긴 키야마는 그 해 열린 제29회 전일본대회에서는 개리에게 패하고 말았지만, 제 30회 전일본대회에서는 3위에 입상하며 그 다음해 열리는 제 7회 세계대회 출전권을 따냈다. 브라질 이소베 세이지 지부장은 ‘가장 경계해야 하는 선수가 카즈미 히즈메, 그 다음이 키야마 히토시다’라는 말을 했다.
큰 기대와 주목을 받으며 임한 제7회 세계대회. 그러나 키야마는 체중 증가 탓인지 제 기량도 발휘하지 못한 채 둘째 날에 모습을 감추었다. ‘제 인생에서 그토록 괴로웠던 적은 없었습니다’라고 할 만큼 큰 좌절을 맛 보았다.
그 이후 어느 순간까지는 그 때의 패전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물러나지 않겠다는 결의로 임한 제32회 전일본대회에서는 ‘우승하지 못하면 후퇴하는 것이다’는 선언대로 첫 우승을 따냈다. 전일본에서 우승한 다음 다시금 큰 고비를 맞이하였다. 제2회 세계웨이트제 대회.
전일본대회에서 우승하였다고는 하지만 과연 세계 무대에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전일본의 왕자가 되었지만, 본인은 물론 주변 사람들의 인식 속에도 제7회 세계대회에서 패배하였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일본을 짊어진 에이스가 되기에는 아직 신뢰를 얻지 못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시절까지만 해도 어디서 패한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 즉 지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압박감과 싸워야만 했다.
그러나 본인과 주변 사람들의 불안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 세계웨이트제 대회에서 패전의 이미지를 완전히 불식시킬만한 시합을 보여주었다. 세계대회에서 신페이 돌레인 선수의 벽도 완전히 무너뜨리며 자신의 실력을 스스로 증명하였다. 황량한 들판을 힘차가 나아가듯 결승전에 올라갔다.
결승전. 좌우로 스텝을 밟으면서 간격을 좁혔다가 떨어지고, 떨어졌다가 좁히기를 반복했다. 27살의 전일본 왕자는 활동감 넘치는 움직임 속에 날렵한 안쪽 하단차기를 몇 번이고 명중시키며, 러시아 최강이라 칭송받던 남자를 완벽하게 쥐락펴락했다. 그야말로 압승. 시합이 끝나기도 전에 일본 관계자들의 기대는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키야마야 말로 신시대의 에이스라고.’
제1회 세계웨이트제 대회에서 스타덤에 올랐고, 제 2회 대회에서 에이스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키야마는 두 번의 세계웨이트제 대회를 거치며, 세계 왕자의 길을 향해 뛰어가게 된다.
<계속>
첫댓글 성수야 매번 고맙다. 번거로울텐데 번역도 해주고~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아니에요~저도 재밌게 하고 있습니다 ㅎ
이 기사는 너무 좋앙!!
맘에 드시다니 다행이네요. 나머지 기사 방금 올렸어요. 늦어져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