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八變(십팔변)=十八神變
불ㆍ보살이 나타내는 열여덟 가지 신변부사의(神變不思議).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제37권에 있음. 진동(震動)ㆍ치연(熾然)ㆍ유포(流布)ㆍ시현(示現)ㆍ전변(轉變)ㆍ왕래(往來)ㆍ권(卷)ㆍ서(舒)ㆍ중상입신(衆像入身)ㆍ동류왕취(同類往趣)ㆍ은(隱)ㆍ현(顯)ㆍ소작자재(所作自在)ㆍ제타신통(制他神通)ㆍ능시변재(能施辯才)ㆍ능시억념(能施憶念)ㆍ능시안락(能施安樂)ㆍ방대광명(放大光明). 또 『법화경(法華經)』 「엄왕품」에도 있음.
『유가(瑜伽)』에서 말하였다.
“열여덟 가지 변화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진동이니, 이른바 일체 세계를 능히 두루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치연(熾然)이니, 이른바 몸 위로는 불꽃을 일으키고 몸 아래로는 물을 내뿜는 것이다.
셋째는 유포(流布)이니, 이른바 빛을 흘려 두루 비추는 것이다.
넷째는 시현(示現)이니, 이른바 하고 자 하는 바에 따라서 저 불토(佛土)와 악취(惡趣)를 보이는 것이다.
다섯째는 전변(轉變)이니, 이른바 그 땅에서 물의 승해(勝解)를 일으키자마자 물을 이루게 하는 것으로 불과 바람을 이루게 하는 승해도 역시 마찬가지다.
여섯째는 왕래(往來)이니, 이른바 즐기는 바에 따라서 산과 돌 가운데를 왕래함이 걸림 없는 것이다.
일곱째는 마는 것이고,
여덟째는 펴는 것이니, 이른바 설산(雪山)의 왕 등을 능히 펴고 마는 것이다.
아홉째는 온갖 상(像)이 몸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른바 현전의 대중과 일체 대지를 자기 몸속에 넣는 것이다.
열째는 동류왕취(同類往趣)이니, 이른바 능히 그곳으로 가서 그 색류(色類)와 같아지는 것이다.
열한 번째는 숨는 것[隱]이고,
열두 번째는 드러내는 것[顯]이고,
열세 번째는 소작자재(所作自在)이니, 이른바 가고 오고 머무는 것이 능히 걸림이 없는 것이다.
열네 번째는 제타신통(制他神洞)이니, 이른바 다른 이가 나타낸 신통을 능히 다 다스리고 조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열다섯 번째는 능시변재(能施辨才)이니, 이른바 모든 유정(有情)의 변재와 능히 함께 하는 것이다.
열여섯 번째는 능시억념(能施憶念)이니, 이른바 모든 유정이 법에 대한 염(念)을 잃어도 능히 억념을 함께 하는 것이다.
열일곱 번째는 능시안락(能施安樂)이니, 이른바 법을 설하실 때 저 듣는 자로 하여금 몸과 마음을 안락하게 하는 것이다.
열여덟 번째는 방광(放光)이니, 이른바 몸으로 광명을 놓아서 온갖 불사(佛事)를 짓는 것이다.”
[인자함(因字函) 제7권]
위세는 단지 중근기와 하근기를 교화하지만
실상(實相)은 마땅히 향상(向上)하는 자에게 던져야 한다.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문] 만약 신변(神變)을 구족하지 못한다면, 장차 어떻게 섭수해서 교화하는가?
[답] 만약 순수하게 사상(事相)을 취한다면, 신통은 진취(眞趣)에 어긋나는 것이니, 가령 『보행기(輔行記)』에서는 이와 같이 말했다.
'삼매를 닦는 자가 홀연히 신통을 일으키면 신속히 그것을 버려야 하니, 유루(有漏)의 법은 허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관(止觀)』에서는 '능히 반야(般若)를 가로막는다'고 말한 것이다. 왜냐 하면 종지(種智)의 반야는 자체가 모든 법을 갖추고서 능히 온갖 상(相)을 소멸[泯]하기 때문이다. 아직 구족하지 못한 채로는 단지 이(理)에 안주할 뿐이니, 어찌하여 사(事)의 신통을 요구하겠는가? 만약 신통에만 전념한다면, 이는 이(理)를 장애하는 것이다. 이(理)를 장애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재앙을 받으니, 가령 울두승의(鬱頭勝意)의 무리들이 바로 그런 종류이다.
무릇 참된 신변(神變)은 일승문(一乘門)을 연설하고 무생(無生)의 이치를 이야기하지 않음이 없다. 한마디의 말이 도(道)에 계합하면 생사에 처해서도 열반을 증득하고, 눈으로 분명한 종지를 보게 되면 진로(塵勞)에 즉해서도 정각을 이룬다. 찰나에서도 범부를 혁신하여 성인이 되고, 잠깐 사이에 변화하여 공(空)으로 돌아가니, 이 같은 작용이 어찌 신변이 아니겠는가?
『유마경』에서는 '신통의 지혜로 어리석은 중생을 교화한다'고 하였다. 만약 상상(上上) 근기의 사람이라면 단지 몸의 실상(實相)을 관하도록 할 뿐이니, 부처를 관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마치 팽성왕(彭城王)이 이렇게 물은 것과 같다.
'모든 대덕(大德)이 나로 하여금 왼쪽 겨드랑이에서는 물이 나오고 오른쪽 겨드랑이에서는 불이 나오며, 허공으로 날아올라서 광명을 놓고 땅을 흔들게 한다면 나는 즉시 예를 드리고 그대를 스승으로 삼겠습니다.'
우두 융(牛頭融) 대사가 대답했다.
'이제 나에게 이런 식으로 과(果)를 증득한 걸 따진다면, 정작 도(道)와는 괴리될까 두렵습니다. 이런 식으로 성불하는 것이라면 환사(幻師)도 역시 부처를 지을 수 있으며, 환사가 부처를 지을 뿐만 아니라 천마(天魔)·외도(外道)·요괴·여우·정령·도깨비·귀신·용·이무기도 모두 불도(佛道)를 이룰 수 있습니다.'”[치자함(侈字函) 제5권]
단지 변화만을 아는 것을 이른바 신통이라 하고
저 식(識)의 작위(作爲)는 모두 묘용(妙用)이다.
[문] 박지(博地)의 범부도 그 지위가 모든 부처와 동일하다는데, 어째서 모든 부처의 신통 작용을 갖추지 못한 것입니까?
[답] 갖추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단지 중생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엄종(華嚴宗)에서는 '부처는 중생의 체(體)를 증득하고 중생의 용(用)을 쓴다'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지공가(志公歌)』에서는 이렇게 노래했다.
종횡무진하면서도 꺼리고 싫어함[忌諱]를 끊고
오랫동안 인간세계에 있으면서도 세속에 묻히지 않는다.
운용은 성(聲)·색(色) 가운데를 여의지 못하니
겁(劫)을 지낸들 어찌 잠시라도 버리겠느냐.
또 학인(學人)이 대안(大安) 화상에게 여쭈었다.
'무엇이 모든 부처의 신통입니까?'
화상이 말했다.
'그대는 어느 곳에서 왔는가?'
'강서(江西)에서 왔습니다.'
화상이 말했다.
'거짓말이 아닌가?'
대답하였다.
'결코 잘못 말하지 않았습니다.'
학인이 다시 여쭈었다.
'무엇이 신통입니까?'
화상이 말했다.
'과연 망령된 말을 하는구먼.'
이것은 모두 시험을 하는 것이다. 현전(現前)의 일상적인 작용[日用]을 알지 못하니, 어찌 다시 갖추고 갖추지 못함을 논할 수 있겠는가? 방(龐)거사의 게송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 사람은 대부분 재물[金]을 중시하지만
나는 찰나(刹那)의 고요함을 사랑한다네.
재물이 많으면 사람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만
고요함은 진여(眞如)의 성품을 본다네.
마음을 통하면 법 역시 통하니
열여덟 가지 행의 자취를 끊어 버리네.
다만 스스로의 마음에 걸림이 없다면
어찌 신(神)이 통하지 않음을 근심하리요.
이같이 이해한다면 자연스럽게
일체 불사(佛事)를 이루어서 갖춘다네.”
[위의 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