牛頭 法融禪師
우두종의 초조 법융선사(法融禪師: 594~657)
선종 4조 도신스님 제자로 철저한 ‘무심’의 사상
“관할 마음도 없고 지켜야 할 마음도 없다”
법융스님(法融禪師, 594∼657)은 중국 선종 제4조 도신스님(道信大師)의 방계 제자이자 우두종(牛頭宗)의 초조(初祖)이다. 스님은 속성을 위(韋)씨라 하고, 윤주(潤州) 연릉(延陵:江蘇省)인데, 나이 19세에 이미 경전과 사기에 정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대반야경(大般若經)〉을 열람하다가 진공의 도리를 깨닫고는, 홀연히 탄식하였다. “세상의 유교와 도교의 경전은구경의 법이 아니오, 반야(般若)의 바른 관법(觀法)이라야 세상을 벗어나는 배로다.” 이후 스님은 그 때까지 배운 유교와 도교의 학문을 버리고 삼론종(三論宗)의 대가인 모산(茅山)의 대명법사(大明法師)를 찾아 출가한 뒤 20년간 숲속에 묵좌(默坐)하여 깨우침을 얻었다. 뒤에 스님은 강남(江南) 금릉(金陵)동쪽에 있는 우두산(牛頭山)에 들어가서 유서사(幽棲寺)에 주석하였는데, 깊은 골짜기에 있어서 물을 길러오기에 어려움이 컸다. 스님이 이것을 보고 이곳이 여러 승려들이 살만한 장소라면 맑은 물이 솟아야겠다고 생각하자 바로 우물에서 겨울에는 따듯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맑은 물이 풍부하게 솟았다. 뿐만 아니라 스님이 손바닥 위에 새를 불러 먹이를 주어도 새들이 두려워하는 법이 없었고, 더 나아가 100가지 새들이 꽃을 물어오는 등의 기이한 일들이 종종 있었다. 당(唐)의 정관(貞觀)에 도신스님이 법융스님의 기량을 알고 제자로 삼을 생각이 있어 몸소 찾아가서 물었다. “여기서 무엇을 하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마음을 관조합니다.”
“그러면 관조하는 것은 누구이며 마음은 어떤 물건인가?” 도신스님의 말 한마디에 스님은 벌떡 일어나서 절을 하여 제자의 예를 다하고는 법문을 청하니, 도신스님이 스승의 위의를 갖추고 말씀하셨다.
“백 천 가지 법문이 모두 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돌아가고 모래알처럼 많은 묘한 덕이 모두 다 마음의 근원에 있다. 일체의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구족하고 신통(神通) 묘용(妙用)이 모두 네 마음에 있다. 번뇌(煩惱)와 업장(業障)이 본래 공적(空寂)하고, 일체의 과보도 본래 갖추어져 있다. 경계인 인연은 좋고 나쁨이 없지만, 좋고 나쁨이 마음에서 일어나니 마음이 억지로 이름을 짓지 않으면 망정(忘情)이 어떻게 일어나겠느냐. 망정이 일어나지 않으면 참 마음이 두루 안다. 그대가 다만 마음에 맡기어 자유로이 하여서 더 하지 않으면 그것이 변함없는 상주법신(常住法身)이니 변하거나 달라질 수 없다.”
4조 도신스님의 법을 계승한 스님의 사상은 그의 저서〈심명(心銘)〉을 통해서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스님은 여기에서 ‘절관망수(絶觀忘守)’를 설했다 이 말은 ‘본래 무심하기에 관할 마음도 없고 지켜야 할 마음도 없다’하는 의미인데, 관심(觀心)의 법을 끊고 수심(守心)의 법을 버려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융스님의 사상은 철저한 반야주의에 기‘무심(無心)’의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종밀(宗密)은〈도서(都序)〉에서 법융스님의 선법에 대하여, “민절무기(泯絶無寄宗, 우두종)은 일체의 존재를 부정한 공적(空寂)으로 종지를 삼는다. 원래 공적하기에 불(佛)도 중생(衆生)도 법계(法界)도 번뇌(煩惱)도 모두 몽환(夢幻)과 같은 것이며, 불도 법도 없고 일체가 미망(迷妄)이 된다. 이와 같이 깨달으면 본래무사(本來無事)인 마음은 기댈 곳도 없어, 정말 전도를 벗어나 해탈할 수 있다”고 해설한다. 이후 스님의 제자들은 우두산을 중심으로 해서 수행을 하고 활동을 하였으며 반야공관(般若空觀)의 독특한 선풍을 진작시킨다.
우두종이란 종명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우두종의 선법은 지나치게 공(空)을 강조하고, 이것 때문에 후대에 이르러 마조(馬祖) 문하의 비판을 받는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절관(絶觀)과 무심(無心)의 반야선(般若禪)을 대성시킨 우두종의 선사상이 강서(江西) 홍주종(洪州宗)의 조사선(祖師禪) 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 또한 우리는 간과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