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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금 광 사 원문보기 글쓴이: 性觀 道彦 (不玄)
따로 임제종지를 밝힘[別明 臨濟宗旨]
1) 구, 현, 요(句玄要)
大凡一句中에 具三玄하고 一玄中에 具三要하니,
一句는 無文綵印이요 三玄三要는 有文綵印이라.
權實은 玄이요, 照用은 要라.
대체로 한 구절 중에 삼현을 갖추고 하나의 현 중에 삼요를 갖추고 있으니,
한 구절은 무늬가 없는 도장*이요 삼현과 삼요는 무늬가 있는 도장이다.
방편[權]과 실상[實]은 현(玄)이요, 비춤과 작용은 요(要)이다.
* 무문채인(無文綵印). 무문인(無文印)·무자인(無字印)·불조심인(佛祖心印)이라고도 한다. 문양이 없는 도장을 말한다. 곧 언어문자의 형식으로 나타낼 수 없는 심인(心印)을 가리킨다.
① 3구
第一句는 喪身失命이요,
第二句는 未開口錯이요,
第三句는 奮箕掃箒라.
삼구三句 *
제1구는 몸을 상하게 하고 목숨을 잃는435) 구절**이며,
제2구는 입을 열기도 전에 잘못되는 구절***이고,
제3구는 오물을 까부르는 키요 쓸어 없애는 빗자루와 같은 구절이다.
* 임제삼구(臨濟三句).
“법좌에 오르자 학인이 물었다. ‘제1구는 어떤 것입니까?’‘3요의 도장을 찍고 떼니 붉은 무늬점이 분명하고, 말도 꺼내기 전에 주객이 나뉜다.’
‘제2구는 어떤 것입니까?’
‘문수보살이 어찌 무착선사의 물음을 용납하겠냐마는, 방편을 펼치는 것이 어찌 망상을 끊어버린 상근기와 모순되겠는가!’
‘제3구는 어떤 것입니까?’
‘무대에서 꼭두각시를 희롱하는 것을 보라. 밀고 당기는 것이 모두 그 배후에서 조작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임제선사는 또 말했다.‘1구의 말에는 모름지기 3현문을 갖추어야 하고, 1현문에는 3요를 갖추어야 한다. 여기에 방편도 있고 작용도 있으니 그대들은 어떻게 이해하는가?’”
(『臨濟錄』
上堂, 僧問, ‘如何是第一句?’
師云, ‘三要印開朱點側, 未容擬議主賓分.’問, ‘如何是第二句?’
師云, ‘妙解豈容無著問, ?和爭負截流機!’
問, ‘如何是第三句?’
師云, ‘看取棚頭弄傀儡. 抽牽都來裏有人.’
師, 又云, ‘一句語須具三玄門, 一玄門須具三要. 有權有用, 汝等諸人, 作?生會?’)
** 상신실명(喪身失命). 몸과 마음이 모두 탈락하여 어떤 기능도 발휘할 수 없는 경계를 묘사한다.
*** 미개구착(未開口錯). 어떤 말이나 분별도 통하지 않는 경지를 나타낸다.
② 3요(三要)
一要는 照卽大機요,
二要는 照卽大用이요,
三要는 照用同時라.
삼요三要 *
첫 번째 요(要)는 비춤[照]이 곧 대기(大機)이고,
두 번째 요는 비춤이 곧 대용(大用)이며,
세 번째 요는 비춤과 작용[用]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 “제1. 비춤을 먼저하고 작용을 뒤에 하는 것○:
예컨대 학인이 찾아 왔을 때 선주(禪主)가 먼저 ‘어디서 왔는가?’라고 묻거나 혹은 ‘그대의 스승은 어떤 언구로 가르치는가?’라고 묻고, 학인이 그에 대한 여러 답변을 하면, 선주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반문하는 것 등을 말한다. 이러한 격식을 가리켜 옛사람이 마지못해 이름을 붙여 조요(照要)라고 한 것이다.
제2. 작용을 먼저하고 비춤을 뒤에 하는 것:
예컨대 학인이 찾아와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나 불법의 대의를 묻거나 ‘학인의 본래면목은 어떤 것입니까?’ 혹은 ‘구경(究竟)의 진리를 담고 있는 본분사[極則事]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선주가 불자를 들어 보이거나 혹은 주장자로 바로 때리거나 혹은 선상을 뒤집거나 혹은 원상을 그려 보이거나 혹은 기틀의 핵심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 등을 말한다. 이와 같은 식으로 기틀에 따라 학인을 제접하는 방식을 가리켜 옛사람이 마지못해 이름을 붙여 용요(用要)라고 한 것이다.
제3.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는 것◑:
예컨대 학인이 찾아와 어떤 단서가 되는 물음을 제기하면 선주가 불자를 꼿꼿이 세우고서 ‘다른 곳에도 이것이 있는가?’라고 묻거나 혹은 허공을 가리키며 ‘알겠는가?’라고 묻는 방식, 또는 학인이 꼿꼿이 세워 보인 불자를 보고 곧바로 절을 올리면 선주가 ‘이 둔한 놈아!’라고 하는 방식, 또는 학인이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면 선주가 노주를 가리키며 ‘이것은 알겠는가?’라고 묻는 방식, 또는 학인이 좌구를 펼치거나 주먹이나 손바닥을 보이면 선주가 ‘쓸데없이 헛짓하는 놈이로다’라고 하는 방식 등을 말한다.
이와 같은 식으로 기틀에 따라 학인을 제접하는 방식을 가리켜 옛사람이 마지못해 이름을 붙여 조용동시요(照用同時要)라 한 것이다.”
(『宗門玄鑑圖』
第一. 先照後用者○:
如學人來時, 禪主先問, ‘從甚?處來?’ 或云, ‘彼師有何言句指示?’ 學人種種言句, 禪主反問云, ‘作?生會?’ 據斯體例, 古人亦?名照要也.
第二. 先用後照者:如學人來問祖師西來意, 或問佛法大意, 或問, ‘如何是學人本來面目?’ 或問, ‘如何是極則事?’ 禪主擧起拂子, 或以?杖便打, 或下禪床立, 或?圓相, 或呈機要. 據斯接機, 古人亦?名用要也.
第三. 照用同時者◑:如學人來發問端, 禪主或竪起拂子云, ‘諸方還有這箇??’ 或指空云, ‘會??’ 或學人見竪起拂子便禮拜, 禪主云, ‘這鈍漢.’ 或云, ‘學人不會.’ 禪主指露柱云, ‘這箇却會??’ 學人, 或展坐具, 或竪起拳掌, 主云, ‘這弄精魂漢!’ 據斯接機, 古人亦?名照用同時要也.)
③ 3현(三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經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捧喝等이라.
삼현三玄
체중현은 삼세가 곧 일념*이라는 것 등이고,
구중현은 경절언구** 등이고,
현중현은 양구(良久)나 방(棒)·할(喝) 등과 같은 것이다.
* 삼세일념(三世一念).
“초발심인 10주(住)의 첫머리에서부터 삼매의 힘으로 단번에 삼계 전체를 도장 찍듯이 마음에 새기니 삼세가 하나의 경계이며 모든 법이 한맛[一味]이며, 해탈과 열반이 항상 적멸한 맛이다.
또한 처음과 끝이 없고, 인과가 하나의 경계이며, 모든 성품이 하나의 성품이고, 모든 지혜가 하나의 지혜이며, 모든 상이 하나의 상이고, 모든 행이 하나의 행이며, 삼세가 일념이고, 일념이 삼세요 십세이니, 이와 같은 모든 법이 자재하고 걸림이 없는 것이다.
이 경의 법문이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이 같은 속성을 가리켜 항상 법의 바퀴를 굴린다는 뜻에서 상전법륜(常轉法輪)이라 한다.”
(『新華嚴經論』 권3 從初發心十住之首, 以三昧力, 頓印三界, 三世一際, 諸法一味, 解脫涅槃, 常寂滅味.
更無始終, 因果一際, 諸性一性, 諸智一智, 諸相一相, 諸行一行, 三世一念, 一念三世, 乃至十世, 如是等法, 自在無?.
此經法門, 無始無終, 名爲常轉法輪.)
** 徑截言句. 말이나 구절 등의 무수한 우회의 방편을 다 끊어버리고 근원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간명하며 적절한 방법이라는 뜻. ‘경절’은 직절(直截)·첩경(捷徑:지름길) 등과 같은 뜻이다.
2) 4요간(四料簡)
奪人不奪境은 待下根이요,
奪境不奪人은 待中根이요,
人境俱奪은 待上根이요,
人境俱不奪은 待出格人이라.
사료간四料揀*
사람을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는 것은 하근기를 대하는 방법이고,
경계를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않는 것은 중근기를 대하는 방법이며,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는 것은 상근기를 대하는 방법이고,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 것은 격(格)을 벗어난 이를 대하는 방법이다.
* 임제사료간(臨濟四料揀).
임제의현이 주관인 사람[人]과 대상 경계[境]에 대하여 빼앗지 않는 긍정[不奪]과 빼앗는 부정[奪]의 방식에 따라 네 가지 핵심이 되는 형식을 간략하게 추출해 낸 것.
종사는 상대의 조건과 상황에 따라 유효적절하게 네 가지 중 하나를 구사하며 지도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요간’이란 잘 헤아려 중요한 요점을 분간해 내는 것 또는 시비와 선악 등을 가려낸다는 뜻이다.“그때 학인이 물었다. ‘사람을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봄날 만물이 움트니 비단을 땅에 펼친 듯하고 어린아이가 머리칼을 드리우니 명주실같이 빛이 번득인다.’ ‘경계를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왕의 명령이 이미 시행되어 천하에 골고루 펼쳐지고, 장군은 국경에서 전란에 휘말릴 일이 전혀 없다.’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병주와 분주는 서로 소식을 끊고 각각 한 지방을 차지하였다.’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왕은 보배궁전에 오르고, 촌노인은 태평가를 부른다.’”
(『臨濟語錄』
時有僧問,‘如何是奪人不奪境?’
師云, ‘煦日發生鋪地錦, ?孩垂髮白如絲.’
僧云, ‘如何是奪境不奪人?’
師云, ‘王令已行天下遍, 將軍塞外?烟塵.’
僧云, ‘如何是人境兩俱奪?’
師云, ‘?汾?信, 獨處一方.’
僧云, ‘如何是人境俱不奪?’
師云, ‘王登寶殿, 野老謳歌.’)
3) 4빈주(四賓主)
賓中賓은 學人이 無鼻孔이니 有問有答이요,
賓中主는 學人이 有鼻孔이니 有主有法이요,
主中賓은 師家無鼻孔이니 唯問在요,
主中主는 師家有鼻孔이니 不防奇特이라.
사빈주四賓主 *
*손님 중의 손님이란 학인이 본분을 깨닫지 못하여 진실이 없는 질문과 대답만 있다는 뜻이다.
손님 중의 주인이란 학인이 본분을 깨달아서 주인도 있고 법도 있다는 뜻이다.
주인 중의 손님이란 종사가 본분을 깨닫지 못하여 학인의 질문만 있을 뿐 올바른 대답이 없다는 뜻이다.
주인 중의 주인이란 종사가 본분을 깨달아서 어떤 점에서나 매우 기특하다**는 뜻이다.
* 임제사빈주(臨濟四賓主).
객간주(客看主):손님이 주인을 간파한다는 뜻.
학인이 스승의 마음을 간파한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서 빈중주(賓中主)와 상통한다.
객간객(客看客):손님이 손님을 간파한다는 뜻.
학인이나 스승 모두 견성(見性)하지 못한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서 빈중빈(賓中賓)과 상통한다.
주간객(主看客):주인이 손님을 간파한다는 뜻. 주중빈(主中賓)과 상통한다.
주간주(主看主):주인과 손님이 모두 대등한 선기(禪機)나 선안(禪眼)을 갖추고 있다는 뜻.주중주(主中主)와 상통한다.
“도를 깨친 진정한 학인이 할을 내지르면서 끈적한 아교단지 같은 말을 한마디 하면 선지식은 이것이 경계인 줄 모르고 그 경계 위에서 갖가지 분별의 틀을 조작한다.
학인이 할을 내지르면 앞의 선지식은 이 경계를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고질병으로 의사도 고치지 못한다. 이것을 손님이 주인을 간파한다고 한다.
혹은 선지식이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다가 학인이 질문하려고 한 것을 곧장 빼앗아버리면, 학인은 빼앗기고는 필사적으로 놓으려 하지 않는다. 이것을 주인이 손님을 간파한다고 한다.
혹은 학인이 청정한 경계를 한 가지 가지고 선지식 앞에 나타나면, 선지식은 그 경계를 분별해내고는 그를 잡아 구덩이로 던져버린다.
그러면 그 학인은 ‘대단하신 선지식입니다’라 하고, 선지식은 곧바로 ‘아, 좋은 것과 나쁜 것도 구별할 줄 모르는 놈이로다’라고 하며 학인은 곧장 절을 올린다. 이것을 주인이 주인을 간파한다고 한다.어떤 학인이 얽매이고 집착된 상태로 선지식 앞에 나타나면 선지식은 거기다 족쇄(그릇된 지식)를 한 겹 덧붙이는데 학인은 기뻐한다.
학인과 스승이 피차 분별하지 못하므로 이것을 일러 손님이 손님을 간파한다고 한다.”
(『臨濟語錄』
如有眞正學人, 便喝先, 拈出一箇膠盆子, 善知識, 不辨是境, 便上他境上, 作模作樣.
學人便喝, 前人不肯放. 此是膏?之病, 不堪醫. 喚作客看主.
或是善知識, 不拈出物, 隨學人問處卽奪. 學人被奪抵死不放. 此是主看客.
或有學人, 應一箇淸淨境, 出善知識前, 善知識辨得是境, 把得?向坑裏.
學人言, ‘大好善知識.’ 卽云, ‘?哉, 不識好惡.’ 學人便禮拜. 此喚作主看主.
或有學人, 披枷帶鎖, 出善知識前, 善知識, 更與安一重枷鎖, 學人歡喜.
彼此不辨, 呼爲客看客.)
** 불방기특(不妨奇特). ‘매우 기특하다’ 또는 ‘참으로 기특하다’라는 말이다.
불방은 매우 ~하다, 틀림없이 ~하다,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괜찮다 등의 뜻이다.
4) 4조용(四照用)
先照後用은 有人在요,
先用後照는 有法在요,
照用同時는 驅耕奪食이요,
照用不同視는 有問有答이라.
사조용四照用*
*비춤을 먼저하고 작용을 나중에 하는 것은 사람이 있는 것이고,
작용을 먼저하고 비춤을 나중에 하는 것은 법이 있는 것이고,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는 것은 밭가는 농부의 소를 몰아가고 배고픈 사람의 밥을 빼앗는 방식이고,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지 않는 것은 물음도 두고 대답도 두는 방식이다.
* 임제사조용(臨濟四照用).
“임제선사가 하루는 대중들에게 말했다.
‘나는 어떤 때는 비춤[照]을 먼저하고 작용[用]을 나중에 하며, 어떤 때는 작용을 먼저하고 비춤을 나중에 하며, 어떤 때는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며, 어떤 때는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지 않는다.
비춤을 먼저하고 작용을 나중에 하는 것은 사람이 있는 것이고, 작용을 먼저하고 비춤을 나중에 하는 것은 법이 있는 것이고,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는 것은 밭가는 농부의 소를 몰아가고 배고픈 사람의 밥을 빼앗는 방식이며
뼈를 두드려 골수를 취하고 바늘과 송곳으로 아프게 찌르는 것과 같고,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지 않는 것은 물음도 두고 대답도 두며
주인도 세우고 손님도 세우며 물과 진흙을 뒤섞은 듯하며 기틀에 따라 사물을 응대하는 방식이다.
헤아림을 넘어선 사람이라면 미처 들어 보이기도 전에 일어나 곧바로 갈 것이니, 그래도 조금 낫다.’”
(『人天眼目』 권1 「四照用」
師,一日, 示衆云,
‘我有時先照後用, 有時先用後照, 有時照用同時, 有時照用不同時.
先照後用有人在, 先用後照有法在, 照用同時, 驅耕夫之牛, 奪饑人之食,
敲骨取髓, 痛下針錐,
照用不同時, 有問有答,
立主立賓, 合水和泥, 應機接物.
若是過量人, 向未擧時, ?起便行, 猶較些子.)
5) 4대식(四大式)
正利는 少林面壁類요,
平常은 禾山打鼓類요,
本分은 山僧不會類요,
貢假는 達摩不識類라.
사대식四大式 *
바른 이익을 얻은 본보기는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하였던 것,**
평상의 도리를 지켰던 본보기는 화산(禾山)이 ‘북을 칠 줄 안다’***고 한 것,
본분을 지켰던 본보기는 6조 혜능이 ‘산승은 불법을 모른다’****고 한 것,
진실과 방편을 나누어 펼친 본보기는 달마가 ‘알지 못한다’*****고한 것 등과 같은 네 가지를 말한다.
* 수행의 본보기가 되는 조사들의 기연을 네 가지로 분류한 것.
정리(正利)대식· 평등(平等)대식·진가(眞假)대식·본분(本分)대식 등 네 가지를 말한다.
식(式)은 법식(法式)·표준·모범의 뜻이다. 『宗門玄鑑圖』에는 다음과 같이 조금 다르게 서술되어 있다.
“‘삼현삼요 외에 저희들에게 말씀해주실 다른 법이 또 있습니까?’
‘사대식이 있다.
첫째 정리대식이니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면벽했던 것이 그 부류이다.
둘째 평등대식이니 화산이 「북을 칠 줄 안다」라고 한 말과 같은 부류이다.
셋째 진가대식이니 앞의 두 가지 대식을 아울러 포함하는 것이 그 부류이다.
넷째 본분대식이니 달마대사가 양무제를 보았을 때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한 말과 같은 부류가 그것이다.’”
(『宗門玄鑑圖』 「四大式論」
問曰, ‘三玄三要之外, 更有何法示徒?’
答曰, ‘有四大式.
第一, 正利大式, 如初祖在少林等, 是也.
第二, 平等大式, 如禾山打鼓, 是也.
第三, 眞假大式, 通取前二式, 是也.
第四, 本分大式, 如初祖, 見梁武帝時云, 不識, 是也.’)
** 달마면벽(達磨面壁). 2조 혜가(慧可)가 법을 물었을 때 달마대사가 시종 침묵하며 면벽하고 있었던 고사를 가리킨다.
“달마대사가 9년 동안 면벽한 것은 정체가 탄로나 훔친 물건과 함께 붙잡힌 격이며, 6조 혜능이 글자를 몰랐다는 것은 몸을 숨기려 했지만 꼬리가 드러난 것과 같다.”
(『松源崇岳禪師語』 續古尊宿語要. 達磨九年面壁, 和贓捉敗;盧行者不識字, 露出巴.);
“법좌에 오르자 어떤 학인이 물었다. ‘달마가 면벽하고 있었던 뜻은 어떤 것입니까?’ ‘분별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五祖法演語錄』 고존숙어록. 上堂, 僧問, ‘達磨面壁時, 如何?’ 師云, ‘計較未成.’);
“그대가 약간의 도리를 알아차렸다고 해도 마음에 속하는 법[心所法]을 얻은 것에 불과하며, 선도(禪道)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런 까닭에 달마는 면벽을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볼 수 있는 단서가 전혀 없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작용을 잊는 것이 불도(佛道)요, 분별은 마구니의 경계이다’라고 한다.”
(『宛陵錄』 大48 p.386c29. 任汝會得少許道理, ?得箇心所法, 禪道總沒交涉. 所以達磨面壁, 都不令人有見處. 故云, ‘忘機是佛道, 分別是魔境.’)
*** 화산타고(禾山打鼓).
‘대오대철(大悟大徹)한 사람은 어떠합니까?’,
‘진제(眞諦)란 무엇입니까?’,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에 대해서는 여쭙지 않겠습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향상인이 찾아오면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라는 네차례의 물음에 대해 화산이 한결같이 ‘북을 두드릴 줄 안다’(解打鼓)고 답한 일화에서 나온 말.
원오극근은 이 문답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물음도 맛이 없고 답도 맛이 없다. 이 공안을 밝히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향상한 사람이라야 이 말이 이치와도 아무 관계가 없고 의론할 여지도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곧바로 알아차려서 마치 밑이 빠진 통과 같이 되는 바로 이때라야 납승이 편안히 거처할 경계요,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에 딱 들어맞게 될 것이다.”
(『碧巖錄』 44則 大48 「評唱.
所謂言無味語無味. 欲明這箇公案, 須是向上人, 方能見此語, 不涉理性, 亦無議論處.
直下便會, 如桶底脫相似, 方是衲僧安穩處, 始契得祖師西來意.)
또 운문(雲門)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설봉이 공을 굴린 일[?毬], 화산이 북을 두드릴 줄 안다고 한 말[打?], 남양혜충(南陽慧忠)국사의 물그릇[水碗], 조주가 차나 마시라고 한 말[喫茶]은 모두 향상의 본분을 들어 보인 것이다.”
(같은 책 44則 「評唱」. 雪峯?毬, 禾山打鼓, 國師水碗, 趙州喫茶, 盡是向上拈提.)
불회(不會). 조계불회(曹溪不會)라고도 한다.
“어떤 학인이 혜능에게 물었다. ‘5조 홍인의 종지는 누가 얻었습니까?’
‘불법을 아는 사람이 얻었다.’ ‘스님께서는 얻었습니까?’
‘나는 불법을 모른다.’”
(宗寶本 『壇經』.
一僧問師云, ‘黃梅意旨, 甚?人得?’
師云, ‘會佛法人得.’ 僧云, ‘和尙還得否?’
師云, ‘我不會佛法.’);
“5조 홍인 회하의 499명의 학인들이 모두 불법을 이해했지만 오직 노행자 한 사람만은 불법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단지 도를 알았을 뿐 별다른 일을 이해한 것이 아니었다.”
(『南泉普願語要』 古尊宿語錄12 卍118 p.297a2.
只如五祖會下, 四百九十九人, 盡會佛法, 惟有盧行者一人, 不會佛法. 只會道, 不會別事.)
****달마불식(達磨不識). 달마와 양무제(梁武帝)가 나눈 세 가지 문답 중 하나.
불식이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뜻도 아니고 망상분별이 없다는 뜻도 아니며, 어떤 인식의 틀로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화두로 간주된다.
“양무제가 ‘짐의 앞에서 말하고 있는 이는 누구입니까?’〈얼굴 전체에 부끄럽고 당황한 빛이 도는데 억지로 멀쩡한 척하는구나. 결국은 찾지 못했다.〉
‘모르겠소.’〈돌! 다시 찾아온들 반푼의 가치도 없겠군.〉”
(『碧巖錄』 1則 「本則」
帝曰, ‘對朕者誰?’〈滿面?惶, 强惺惺. 果然摸索不著.〉
磨云, ‘不識.’〈?! 再來不直半文錢.〉)
***** 공(貢)은 진(眞)의 오식(誤植).
6) 4할(四喝)
金剛王寶劍은, 一刀로 揮斷一切情解요,
踞地獅子는 發言吐氣에 衆魔腦裂이요,
探竿影草는 探其有無承師鼻孔이요,
一喝不作一喝用은 具上三玄 四賓主니라.
사할四喝*
‘금강왕의 보검과 같은 할’은 일체의 정해(情解)를 단칼에 끊어버리는 것이고,
‘땅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금털 사자와 같은 할’은 말을 꺼내거나 숨소리만 토해내도 모든 마군의 뇌가 찢어지는 것이며,
‘물고기를 유인하는 미끼와 같은 할’은 스승이 이어받은 본분을 제대로 지니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며,
‘할로서의 작용을 억지로 하지 않는 할’은 앞에서 말한 삼현(三玄)과 사빈주(四賓主) 같은 것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이다.
* 임제종에서 말하는 네 종류의 할. 종사가 학인을 교화하기 위해 행하는 것으로서 분별하기 이전의 경지에 근거하여 때와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여러 가지 방편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임제가 어떤 학인에게 물었다. ‘어떤 때의 할은 금강왕의 보검과 같고, 어떤 때의 할은 바닥에 웅크린 금털 사자와 같으며, 어떤때의 할은 물고기를 유인하는 수단과 같고, 어떤 때의 할은 할로서의 작용을 억지로 하지 않는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학인이 머뭇거리자 임제가 바로 할을 내질렀다.”
(『臨濟語錄』 「勘辨」
師問僧, ‘有時一喝, 如金剛王寶劍;有時一喝, 如踞地金毛獅子;有時一喝, 如探竿影草;有時一喝, 不作一喝用. 汝作?生會?’
僧擬議, 師便喝.)
7) 8방(八棒)
觸令返玄과 接掃從正과 靠玄傷正과 苦責은 罰棒이요,
順宗旨는賞棒이요,
有虛實은 辨棒이요,
盲架는 瞎棒이요,
掃除凡聖은 正棒이니라.
팔방八棒 ①
종사가 내린 법령을 접하고 그것을 깊은 뜻으로 잘못 되돌리므로 내리는 방②·
바른 이치를 기준으로 하여 잘못된 견해를 쓸어버리는 방③·
깊은 뜻에 의지하다가 정도를 망치는 것을 질타하는 방④·
어리석음을 꾸짖는 방⑤등은 ‘벌방(罰棒)’이고,
종지에 순응하므로 내리는 방⑥은 ‘상방(賞棒)’이며,
거짓과 진실을 가려내어 점검하는 방⑦은 ‘변방(辨棒)’이며,별다른 이유 없이 맹목적으로 휘두르는 방⑧·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분별을 모두 쓸어버리는 방⑨은 ‘정방(正棒)’이다.
①팔방에 대한 내용은 임제의 어록에 보이지 않는다. 후인들이 임제종의 종지에 입각하여 방을 해석하면서 부가한 말이다.
『五家宗旨纂要』 권상 「濟宗八棒」에는 촉령지현방(觸令支玄棒), 접기종정방(接機從正棒), 고현상정방(?玄傷正棒), 인순종지방(印順宗旨棒), 취험허실방(取驗虛實棒), 맹가할방(盲枷?棒), 고책우치방(苦責愚癡棒), 소제범성방(?除凡聖棒) 등,
『宗門玄鑑圖』 「八棒論」에서는 촉령지현방(觸令支玄棒), 접기종정방(接機從正棒), 변기제정방(辯機提正棒), 고현상정방(?玄傷正棒), 인순종승방(印順宗乘棒), 맹가할련방(盲枷?煉棒), 고험허실방(考驗虛實棒), 소제범성방(掃除凡聖棒) 등,
『萬法歸心錄』 권하 에서는 상방(賞棒), 벌방(罰棒), 종방(縱棒), 탈방(奪棒), 우치방(愚癡棒), 항마방(降魔棒), 소적방(掃跡棒), 무정방(無情棒) 등으로 분류하여 제시되어 있다.
아래 주석에서는 『五家宗旨纂要』의 팔방과 위 본문에서 서산이 제시한 팔방을 대대하여 비교한다.
서산은 팔방을 벌방(罰棒)·상방(賞棒)·변방(辨棒)·정방(正棒)의 네 범주로 묶어서 요약했다.
②촉령반현(觸令返玄). 촉령지현방(觸令支玄棒)과 같다.
“첫째, 촉령지현방. 삼산등래(三山燈來 1614~1685)가 말하였다.
‘가령 종사가 내린 하나의 법령에 대해 학인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회피하여 눈앞에 드러난 소식과 멀어진 채로 지루하게 깊은 뜻을 늘어놓을 때 종사가 바로 때리는 방이다. 이것은 벌방이다.’”
(一,觸令支玄棒. 三山來云,
‘如宗師置下一令, 學人不知?避, 觸犯當頭, 支離玄旨, 宗師便打. 此是罰棒.’)
③ 접소종정(接掃從正). 접기종정방(接機從正棒)과 같다.
“둘째, 접기종정방. 삼산등래가 말하였다.
‘가령 종사가 학인을 응대하여 그 학인의 근기에 따라 때릴 만하면 때리는 방을 말하니, 이것을 가리켜 바른 이치에 따른다고 한다. 이것은 상벌의 분류에 속하지 않는다.’”
(二, 接機從正棒. 三山來云,
‘如宗師應接學人, 順其來機, 當打而打, 謂之從正. 此不在賞罰之類.’)
④고현상정(?玄傷正).
“셋째, 고현상정방. 삼산등래가 말하였다.
‘가령 학인이 찾아와 참문하면 종사는 오로지 도리를 기특하게 조작하는 데 힘쓴다.
이때 학인이 깊고 미묘한 뜻에 의지하여 (조작한 도리를) 헤아리다가 도리어 바른 이치를 망치는 경우가 있는데 종사는 곧장 때려서 학인을 그대로 놓아주지 않는다. 이것은 벌방이다.’”
(三, ?玄傷正棒. 三山來云,
‘如學人來見, 宗師專務, 奇特造作.
倚?玄妙, 反傷正理, 宗師直下便打, 不肯放過. 此亦是罰棒.’)
⑤고책(苦責).
“일곱째, 고책우치방. 삼산등래가 말하였다.
‘가령 학인이 이 본분사에 대해 조금도 이해하는 것이 없다면 그 자질과 견지가 아주 어리석어 진전하기 힘드니, 종사가 있는 힘껏 때려준다.
이것을 고책우치방이라고 하는데 상벌과는 관계없는 것이다.’”
(七, 苦責愚癡棒. 三山來云,
‘如學人於此事, 不曾分曉, 其資質見地, 十分癡愚, 不堪策進, 宗師勉?打他.
是謂苦責愚癡, 亦不在賞罰之類.’)
⑥ 순종지(順宗旨).
“넷째, 인순종지방. 삼산등래가 말하였다.
‘가령 학인과 만나 종사가 종지를 들어 보였을 때 학인이 종지를 알아차리고 대답도 상응하므로 종사가 바로 때리는 방이다.
이는 학인의 기틀을 인정한 것이니 상방이라 한다.’”(四, 印順宗旨棒. 三山來云,
‘如學人相見, 宗師拈示宗旨, 彼能領會, 答得相應, 宗師便打.
此是印證來機, 名爲賞棒.’)
⑦ 유허실(有虛實).
“다섯째, 취험허실방. 삼산등래가 말하였다.
‘가령 학인이 방문하자마자 종사가 곧바로 때리는 경우와 혹은 학인이 다가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종사가 또한 때리는 경우 등을 말한다.
이것은 학인의 허와 실을 분별하여 점검하기 위한 방법이니, 그에게 바른 견해가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는 방으로서 칭찬하거나 벌을 주기 위한 종류는 아니다.’”
(五, 取驗虛實棒. 三山來云.
‘如學人?到, 宗師便打, 或進有語句, 宗師亦打.
此是辨驗學人虛實, 看他有見無見, 亦不在賞罰之類.’)
⑧ 맹가할방(盲枷?棒). 굴방(屈棒)이라고도 한다.
“여섯째, 맹가할방. 삼산등래가 말하였다.
‘가령 종사가 학인을 접하면서 학인의 근기는 분별하지도 못하고서 일방적으로 마구 맹목적으로 때리지만 눈 속에는 진주(참된 안목)가 없으므로 맹할(盲?)이라 한다.
이것은 가르치는 스승에게 허물이 있는 것이며 학인의 일과는 상관없다.’”
(六, 盲枷?棒. 三山來云,
‘如宗師接待學人, 不辨學人來機, 一味亂打, 眼裏無珠, 謂之盲?.
此師家之過, 不干學人事.’)
⑨ 소제범성(掃除凡聖).
“여덟째, 소제범성방. 삼산등래가 말하였다.
‘가령 종사가 학인을 접하면서 미세한 망념에도 떨어지지 않고 조금의 머뭇거림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분별을 일시에 쓸어버리며
말을 제대로 해도 때리고 말을 하지 못해도 때리며 말을 제대로 하거나 하지 못하거나 간에 때리며
학인으로 하여금 명근도 끊어버리며 지엽에조차도 머물지 않게 하는 방이다.
이는 최상으로 제기하는 방편으로서 팔방 가운데 가장 묘하게 발휘하는 방이니 정방이라고 한다.’”
(八, ?除凡聖棒. 三山來云,
‘如宗師家, 接待往來, 不落廉纖, 不容擬議,
將彼凡情聖解一竝?除,
道得也打, 道不得也打, 道得道不得也打,
直令學人, 斷却命根, 不存枝葉.
乃上上提持, 八棒中之用得最妙者, 此則名爲正棒.’)
8) 맺는 말
此等法은 非特臨濟宗風이라
上自諸佛로 下至衆生히 皆分上事니
若離此說法하면 皆是妄言니라.
이와 같은 법은 비단 임제의 종지일 뿐만 아니라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중생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본분에 갖추고 있는 것이니,
이것을 벗어나 법을 설하면 모두 망령된 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