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숲, 세월호 10주기 기림자리
https://www.youtube.com/watch?v=GfYChCJV8Y8
[1] 세월호 인물 소개 / 장석주
선장 소개
세월호의 선장이였던 이준석은 세월호의 선장이였다.당시 세월호 운전 당시 그는 사고가 일어났을때 그는 ‘그냥 제자리에 앉아 있으세요.’라는 방송만 틀고 15명의 선원들과 함께 탈출했다. 당시 이준석은 탈출을 했을때 신분을 숨기기 위해 사복으로 옷을 갈아입어 탈출했다.(이때 바지를 안입고 나왔다.) 결국 이준석은 재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이때 만약 안내만 잘했으면 전원 생존이라는 설도 있었다.
생존자 인터뷰 하나 요약하기. (생존을 하였음에도 얼마나 고통받으며 사시는가ㅠㅠ에 대한..)
세월호 생존자 중 한명인 박준혁 학생은 세월호의 마지막 구조자이자 75번째 탈출자다. 그는
탈출중 자신의 단짝친구를 잃었고 담임교사와 100명의 학생들, 일반 승객과 탈출을 하다가 자신의 제외한 모든 승객들은 물살에 휩쓸려 다고 한다. 그는 10시 24분 세월호에서 탈출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세월호를 알리고 있다고 한다.
단원고 소개.
단원고등학교는 세월호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승객이였다. 단원고 학생은 수학여행으로 2-1~2-10반은 인천에서 출발해 제주도로 갈 예정이었지만, 사고로 242명이 사망하고,20명이 실종되었다. 단원고는 경기도 안산에 있으며 죽은 학생들의 시신은 여러 공원에 잠들어 있다고 한다.
단원고 학생들 외 다른 사람들 몇몇 (간단하게)
‘세월호 파란 바지 의인’으로 알려진 김동수는 참사 당시 현장에서 20명의 목숨을 구하고 자신도 탈출했다고 합니다. 세월호 선원들 전부가 도망간 것은 아니다. 정현선, 김기웅, 안현영, 박지영과 세월호 사무장인 양대홍은 승객들을 대피시켰지만, 세월호에서 탈출을 못하고 사망하게 되었다.
민간잠수부 피해자분들 소개.
김관홍은 세월호 참사에 만은 시신을 수습했던 민간 잠수부였다.그는 세월호의 사망자를 수습하던 도중 물살에 휩쓸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병원에서는 그에게 한달 동안 잠수는 하지 말라고 했지만, 응급처치만 하고 현장에 복귀할 정도록 시신을 수습했다.그러나 그는 좌절감으로 결국 2016년 사망하고 만다.
[2] 세월호 소개 / 윤승희
1층 화물칸(D데크)에는 1천톤 이상의 차량이 실렸다. 2층(C데크)화물칸은 환풍구를 통해 물이 제일 먼저 들어왔던 구간입니다. 3층에는 로비, 안내데스크, 식당, 매점, 카페, 오락실 등등이 있어서 사람들이 자주 오가던 곳입니다.(내부가 작년 울릉도 여행갈 때 탔던 배 구조, 생김새와 똑같았다.) 단원고 학생들이 머물렀던 4층 객실. 4층 객실의 남학생들 방에는 코앞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출입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내방송에서 객실에서 기다리라고 했던…. 5층은 조타실(운전)입니다. 급격한 침수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던 수밀문 표시램프 등은 아직도 보존돼있습니다.
사건 당시의 배 상태는 수입된 후 수리 증축에 따라 총톤수가 증가(239톤) 하고 좌우가 불균형하게 되었으며, 사고 당일 최대 화물 적재량(1,077톤)의 2배에 달하는 과적(2,142톤)이 있었고, 선체 복원에 필요한 평형수 등을 1,375.8톤 감축 적재하였었다.
객실을 개조해서 더 늘린 것으로 모자라 화물을 더 싣기 위해 선수도까지 개조했습니다. 원래 일본에서 들여왔을 때는 50톤 가량의 거대한 문이 선박 오른쪽에 달려있었으나 배를 넓히기 위해서 통째로 떼어내버렸습니다. 그래서 배의 오른쪽이 가벼워져 기운 것이 아니었다는 추측도 있습니다. (실제로 왼쪽 방향으로 기울었다.)
‘내인설'의 주된 내용은 솔밸브였습니다. 어느 순간 안에 이물질이 껴서 멈춰버린 것입니다. 또한 스테빌라이저가 원래 각도가 20.5도로 돌아가는 것이 한계였는데, 세월호가 올라왔을 때는 50.9도까지 돌아가있던 모습이었습니다. 즉, 무엇인가가 100톤 이상의 힘으로 눌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원인이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세월호를 잊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왜 세월호가 침몰했는가. 그리고 왜 구하지 않았는가"를 알아내야합니다. 아직까지도 세월호가 가라앉은 이유는 가설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운항 경로
4월 15일 밤9시 세월호는 인천에서 제주도로 가는 일정이었습니다. 정확한 침몰 지점은 북위34도 11분 10초 동경125도 56점 19초였습니다. 송고, 서거차도, 맹골도, 병풍도 사이를 지나가는 경로였는데, 이 섬들 사이의 해역은 수심이 깊고 유속(1s간 이동하는 평균속도)이 빠른 곳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침몰한 후에도 엄청난 해류에 밀려 가라앉은 지점으로부터 동북 방향으로 3km나 떠내려갔습니다.
어째서 사람들은 이런 위험한 해역을 배의 선로로 설정해뒀을까요? 사실 원래 권고하는 안전한 선로는 따로 있었지만 그저 서둘러 가고픈 마음에 이런 위험한 길을 운항했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 항로는 세월호처럼 거대한 선박이 오가기에는 좁은 길이었기에 일정 인원의 도선사(안전한 선로로 안내하는 사람)이 반드시 승선해야합니다.
[3] 침몰 과정 / 손수연
저는 세월호가 어떻게 침몰했는지, 4월 16일 당일의 사건 과정을 조사하여 준비하였습니다. 그럼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4월 16일 오전 8시 49분. 전남 진도군 앞바다인 조류가 거센 맹골도에서 세월호는 급격하게 항로를 변경하였고, 배는 곧 중심을 잃고 기울어져 표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8시 52분,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에 최초로 신고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최초 신고자인 학생이 던진 첫마디는 “살려주세요”였고, 이후 그는 배가 침몰하고 있음을 알렸습니다. 당시 신고 전화를 받은 전남소방본부 관계자는 내용을 듣고 목포해경을 연결했습니다. 그런데 목포 최초 신고자에게 가장 먼저 경도와 위도를 말하라며 배의 위치를 물었습니다. 당황한 최초 신고자가 “네?”를 연발하자 119관계자는 그가 탑승객임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해경은 반복해서 GPS를 거론 하는 등 위치를 물었습니다. 그로부터 1분 30초 뒤 해경 측은 선박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고, 최초 신고자는 “세월호”라고 답하였습니다. 세월호는 최초 신고보다 3분 후, 사고 해역과 가까운 진도 관제센터가 아닌 제주 관제센터에 교신하여 배가 침몰 중임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 제주관제 센터는 목포해경이 아닌 제주해경에 연락하였고, 8시 58분에야 비로소 목포해경이 사고를 접수하였습니다. (이렇게 된 사고접수도 세월호의 선장이나 승무원들이 아닌 단원고의 학생의 신고였습니다.)
사고 접수 후, 해양경찰은 출동 및 구조에 나섰습니다. 9시 25분 서해해경청 소속 헬기 511호와 해경 123정이 잇따라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출동한 해경은 세월호와 교신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또, 세월호가 침몰하기 시작한 8시 52분 쯤부터 세월호에서는 배가 침몰하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이동하지 말라”는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안내 방송은 물이 객실에 범람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선장 이준석이 배에서 탈출하는 순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승객들은 물이 들어오는 순간에도 안내 방송에 따라 자리를 지켰습니다. 대부분의 단원고 학생들도 안내 방송에 따랐습니다. 안내 방송을 따르지 않은 승객 중 일부는 배 위로 올라가거나 물에 뛰어들어 구조되기도 했다. 그리곤 도착한 123정은 10시 13분 이준석 선장과 선원들을 태운 채 현장을 떠났습니다.
침몰 전까지 172명이 구조됐지만, 10시 30분, 세월호가 침몰한 이후 단 1명도 구조되지 못하였습니다. 심지어 침몰 사고 생존자 172명 중 절반 이상은 해양경찰보다 약 40분 늦게 도착한 어선 등 민간 선반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단원고등학교 학생 및 일반인 승객을 포함해 총 476명의 승선 인원 중 172명만이 살아남았고 현재까지 희생자는 299명, 실종자는 5명입니다. 467명의 인원 중 172명만이 살아남아 사고의 생존율은 고작 36%에 불과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64%가 사망했다는 뜻입니다.
세월호가 완전히 침몰하여 수면 아래로 완전히 모습을 감출 때까지 약 ‘2일’이 걸렸습니다. 11시 18분경, 선체의 후단부는 물에 잠겼고, 선체 부분은 높이 약 2미터가 물 위로 드러났습니다. 4월 16일 정오 12시, 구근 뱃머리에 50센티미터 만이 물 위에 떠 있었습니다. 2일 후, 4월 18일 오후 1시경, 배는 완전히 물에 잠겼습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일부 언론은 ‘전원구조’라는 오보를 냈고, 해경 등 구조 당국은 구조작업에 우왕자왕해 희생자 실종자 가족들의 불신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검찰은 승객들을 버리고 탈출한 이준석 선장 등 세월호 선원 15명에 대해 살인, 살인미수, 업무상 과실, 선박 매물, 선법 위반 등의 혐의를 적용해 2014년 5월 15일 구속기소 했습니다.
네. 여기까지가 제가 준비한 내용입니다. 다음은 세월호가 왜 침몰하게 되었는지 그 원인에 대한 예준이의 설명을 들어보시겠습니다.
[4] 침몰 원인 / 구예준
세월호의 침몰 원인으로 현재까지도 여러 추정들이 나오는 가운데 정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못한 상태입니다. 추정되는 여러 원인들로는 암초충돌설, 구조결함설, 구조변경설, 변침설(항로변결설), 내부 폭팔설, 과적 및 선체결함설(화물 과적), 실소유주 및 해운 비리, 수 많은 가설들이 있습니다. 또 당시 상황에 따른 정부의 잘못된 대응 방법이 세월호의 그 수 많은 인명들이 희생되게 된 가장 큰 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세월호 침몰 원인- 암초 충돌설
생존자 일부의 증언에 따라 사고 전 들렸다는 ‘쿵’ 하는 소리와 당시의 안개가 있었던 날씨를 고려해 배가 암초에 부딪쳐 좌초 했다는 암초 충돌설이 있다. 그러나 해당 지역에 배와 충돌할 만한 암초가 없었다는 점과 또다른 수중체의 의한 원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으로 사고 원인의 유력 후보에서 후순위로 밀려났다.
2. 세월호 침몰 원인-구조결함설
또 다른 원인으로 세월호자체의 구조적 결함의 문제였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다. 세월호는 원래 화물선이었던 RORO선의 모델인 나미노우에호를 개조한 형태다. 특히 그전에도 이미 같은 RORO선의 침몰 전적이 있었던 것과 개조 과정에서 부실로 인한 결함이 원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해상전문가의 측에 따르면 선박의 복원 능력을 생각하여 선체가 그렇게 빨리 기운다는 것이 이해가 갈 수 없는 부분이며 이는 선박의 구조적 결함이 원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 사고 당시 세월호의 급격한 우회가 조타기의 오작동으로 인해 일어났다는 조타기 조장설도 나왔지만 세월호의 급격한 우선회가 횡경사를 유발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하여 기각되었다.
3. 세월호 침몰 원인-구조변경설
한국해양대 해사수송과학부 김길수 교수는 세월호의 무리한 구조 변경이 원인일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실제로 세월호는 일본에서 수입된 뒤로 객실을 증설하였고 승선정원 인원수는 181명에서 191명으로 늘어났다. 추가된 객실과 늘어난 인원수로 선박 무게도 239톤 증가했다. 또 무게가 자꾸 더해지며 선박의 무게중심이 자연스럽게 위로 올랐고 외부의 충격이 가해질 경우에는 쉽게 균형을 잃고 기울게 되었다.
4. 세월호 침몰 원인- 변침설(항로변경설)
변침이란 전문 용어로 항로를 변경한다는 말이다. 세월호의 경우, 도중에 급격히 오른 쪽으로 배를 틀면서 자연스레 왼쪽으로 배가 기운 것이다. 거기 까지는 괜찮았다 하더라도 더해서 선체가 기움과 동시에 결박이 푸리면서 갑판에 실려있던 화물들도 왼쪽으로 쏠린 것이었다. 이 과정 또한 위에서 말한 무게중심의 영향또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또한 차량에 실려있던 블랙박스를 통해 선체가 10초만에 52도 까지 기우는 모습이 확인되었으며 변침이나 화물 쏠림에 의해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속도임이 밝혀졌다.
5. 세월호 침몰 원인-내부 폭발설
공길영 한국해양대 교수와 임교수는 배가 이미 기운 상태에서 변침을 할 수 없다며 조타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내부에서 폭발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고 컨테이너에 폭발물과 관련된 무엇이 실렸었는지 봐야한다 했다.
6. 세월호 침몰 원인- 과적 및 선체결함설
당시 출항 전 세월호에 화물 1157톤, 차량 180대가 실렸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도 사고 한참 이후의 일이다. 이는 원래 적재량을 넘어 화물을 무려 500톤, 차량은 30대를 초과한 것이다. 여기에 결박 또한 허술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 포함되지 않은 승객들과 연료등의 무게를 합산하면 더한 무게가 될 것이다. 또 침몰되기 1시간 전부터 세월호는 이미 기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는 평형수 탱크가 균형을 잡지 못한 것이었는데 원래부터 물이 한쪽으로 실리는 결함이 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7. 세월호 침몰 원인-실소유자 및 해운비리
세월호 대책 위원회는 잠수부가 올린 세월호 컴퓨터 하드디스크에서 세월호 구입에서 국정원이 개축,운항 등에 깊이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100개에 달하는 선내 작업예정 사항에 국정원 지적사항이라는 설명이 붙었고, 천장 칸막이 및 도색작업, 자판기 설치, 바닥타일 교체, 직원 휴가계획서 제출 등이 있었다. 이를 보고 실소유주는 국정원이 아니냐는 말이 많았지만 국정원은 부인했다.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며 제주군사기지를 위한 철근이 세월호 적재량의 4배 이상 많은 양이 적재되었다고 하였다.
8.인명 피해 원인-당시 정부의 대응방법
당시 선내 방송으로 자리에 있으라고 했으며, 해경들은 접근을 거의 안하고 구조를 한 건 민간인 어선들이었다. 이러한 대처로 바다에서 물에 젖어있어야 할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던 것이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며, 가짜 뉴스까지 퍼트리며 참사가 나고 일주일이 지난 후에야 입장을 발표했다. 박근혜는 사건 당일 7시 30분 동안 관저에 없고 위치도 아무도 몰랐다.
세월호가 골든타임을 놓친 이유 중 하나인 경찰, 해경등의 공동대응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2023년 10월에 의무화가 되었다. 세월호 참사 9년만이다. 또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윈회는 2022년 9월에 공식 활동을 마치며 세월호 참사에 대한 54개의 권고문을 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국가 책임인정 사과”였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루어지 않았다.
[5] 희생자,생존자,의인 소개 / 박윤산
단원고
정차웅: 2학년 3반 학생으로 침몰할때 자신이 입고있던 구명조끼를 친구에게 주고 또 다른 친구를 위해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심폐소생술 끝에 결국 첫 사고 학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생일을 하루 앞두고 친구를 위해 희생해서 더욱 안타까움을 주고 있습니다.
최덕하: 최초신고자로 그 신고로 174명을 살리는데 큰 역할을 한 단원고 2학년 6반 학생입니다. 참사 7일 뒤 4층에서 구명조끼도 없이 발견 되었습니다. 최덕하 학생은 리더쉽이 있고, 선생님의 명령을 따라서 학생들을 지도 했습니다.
허다윤: 마지막까지 다른 친구를 도와 친구들을 탈출시켰습니다. 자신이 탈출할 차례에는 다른 친구에게 구조를 양보하고 참사 1129일 만에 유해가 발견 되었습니다
남윤철 선생님: 단원고 2학년 6반의 담임이자 세월호의 영웅이였습니다. 사고가 나고 방에 물이 차오르자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입히며 구조를 돕고, 마지막에는 자기 구명조끼를 벗어 학생에게 줬다는 탈출한 학생이의 말이 있습니다.
최혜정선생님: 2학년 9반 선생님으로 탈출하기 쉬운 5층에 있었지만 아이들의 탈출을 도와 10명의 학생들을 구출하고, 다시 자신의 반의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4층으로 뛰어 내려갔습니다.
희생자분들은 사고나 3년 후 명예의 졸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남현철, 박영인 군과 양승진교사는 아직까지도 시신을 수집하지 못했습니다.
의인들
김성목: 세월호의 마지막 생존자입니다. 그는 커튼과 소방호스를 이용해 단원고 학생 17명을 구조하고 현재는 2020년 10월부터 진상규명 단식운동을 했습니다. 그는 “살려준 것과 살아내는것, 그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라고말했습니다.세월호 ‘마지막 생존자’가 말하는 내가 살아남은 이유 - BBC News 을 검색하면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박지원 승무원: 동료들이 일부가 나갈때, 박지원 승무원의 선택을 달랐습니다. 학생들에게 “너희들 다 구하고, 나중에 나갈게, 선원이 마지막이야”라며 마지막까지 구조를 했습니다. 4층에서 구명조끼를 구해 3층까지 나르며 물이 목 아래까지 차올라도 승객들을 구조했습니다.
양대홍 사무장: 사고 당시 통화가 될때 가족에게 아이들을 구해야하니깐 끊는다고하며 바로 아이들을 구하러 갔다. 그는 끝까지 남아 아이들을 구조하고 결국 빠져나오지 못해. 그 짧은 통화가 유언이 되었습니다.
김동수: 파란바지의 의인이라고 불리며 소방호스를 이용하여 많은 학생들과 사람들을 구했습니다. 생존은 되었지만, 더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병원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살려준 것과 살아내는 것, 그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진실을 밝혀내야 하는 것”이 자신의 숙제라고 했습니다.
[6] 해경의 구조 / 이인서
해경은 세월호가 완전히 침몰하기 전에 현장에 도착했다. 해경은 5분 거리를 15분에 걸쳐서 왔다. 다른 어선들보다 늦게 도착했다. 그 후 적극적인 구조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생존자들의 증언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조사에 착수하자 많은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먼저 해경은 세월호와 같이 큰 배의 구조 훈련을 한 적이 없었다. 또 충분히 선내 조타실로 들어가 탈출하라는 방송을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을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처음에는 해경이 나오라는 방송을 했다고 전 국민에게 거짓말을 했다. 또 해경은 이미 탈출한 사람들을 배에 태우는 데에만 급급했고 안에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구조를 위해 투입된 헬기도 마찬가지였었다. 전문가 분들에 따르면 안에 들어가서 방송만 했어도 지금과 같은 손해를 입지는 안았을 것 이라고 했다. 해경은 잠수 팀도 통제했다. 군에서 UDT와 SSU를 투입 했지만 해경이 이다음날까지 통제했다..
당시 현장 총관리인 관리인 해경의 미흡한 대처도 사건이 커지는 데 한몫을 했다
이를 통해서 해경 간부 10여 명이 검찰에 기소 되었지만 결과는 해당 해역에서 구조활동을 펼친 목포해경의 123호정의 선장만이 징역 3년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에 따라서 해경은 해체 되었다가 문재인 정부 때는 다시 복귀했다.
청와대
청와대는 첫 구조가 끝난 후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생존자는 안중에도 없고 영상만을 고집했다. 또 문재인 대통령도 진실은 밝히고자 했지만 결국에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 후 정부 조사는 개속 진행 되었지만 정치적인 이슈까지 번지면서 사건은 점점 길어져 같다. 또 그로 인해서 피해자 유가족 분들이 받는 고통이 점점더 커졌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가 이 일을 있어서는 안된다. 작년 12월 세월호 참사 최종 대법원판결이 나왔다. 황당한 결론 이었다. 123호정 선장 외의 다른 사람은 무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