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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멘토, 그 위대한 가슴에 얼굴을 묻어라 | |||||||||
이 름 | visionschool | |||||||||
멘토, 그 위대한 가슴에 얼굴을 묻어라 그날도 소년은 오후 내내 얼음판에서 뛰놀다 해거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어…? 선생님!!” “그래, 너 오랜만이구나. 얼굴 보기 되게 어렵구나! 도대체 이게 몇 달 만이지?” “네에...,” “어머님, 그런데 세수 대야는 어디에 있어요?” “글쎄…. 우물가에 있겠죠.” 소년은, 어머니의 대답소리로 봐선 선생님은 이미 오래 전에 집에 오셔서 어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하고 난 다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너 이리 와봐. 나하고 같이 세수부터 하고 이야기 좀 하자.” 선생님은 부엌으로 들어가시더니 미리 끓여놓은 물을 한 바가지 퍼들고 나오면서 아이의 손을 막무가내로 끌고 우물가로 향했다. 아이는 사실 날씨가 워낙 춥고 집안 사정도 어수선해서 며칠씩 세수를 안 하고 지내기가 일쑤였다. 당연히 손등과 목덜미에는 까만 때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선생님은 소매를 걷고 연신 더운 물을 떠오면서 아이의 손과 얼굴, 그리고 목덜미의 때까지 모두 깨끗이 벗겨내고는 머리를 감겼다. 그리고 아이와 어머니 옆에 앉아 집안 사정을 자세히 물었다. 이야기를 끝내고 일어서면서 선생님은 다시 한 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씻겨 놓고 보면 이렇게 미끈한 신사인데, 너무했다. 사람은 어려울수록 내색을 하면 못쓰는 법이란다. 넌 반드시 나중에 훌륭한,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선물을 주는 사람이 될 거야. 이건 정말이야. 나중에 반드시 내 말이 생각날 거다.”
다음날, 아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학교에 갔다. 3교시가 끝나고 담임선생님은 늘 하시던 대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월사금을 내지 않아 점심시간에 집에 가서 월사금을 가지고 와야 하는 아이들의 명단이었다. 집에 다녀온다고 없는 월사금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학교 일과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매일 불리던 친구들의 이름이 다 불렸는데 소년은 자기 이름만 빠지자 의아한 눈초리로 담임선생님을 쳐다봤다. 담임선생님은 왜 그러는지 알겠다는 듯이 빙긋 웃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넌, 어제 너희 교회선생님이 오셔서 다 내고 가셨다.” 학교가 파하고 아이는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동네 어귀에 가서 완전히 캄캄해질 때까지 누나를 기다리며 놀았다. 6학년인 누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밀기울 수제비국을 먹으면서 그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어, 어제 와서 누가 월사금을 다 내고 갔다고 그러던데?” 아이가 그렇게 말하자, 누나도 말했다. “그래? 내 것도 다 냈다고 그러던데?” 그때 잠자코 듣고만 있던 엄마가 말했다. “반년도 넘게 밀려 있었을 텐데….” 그 후로도 선생님은 소년을 만날 때마다 따듯한 말을 잊지 않았고 오며가며 틈만 나면 소년의 집에 들러 소식을 묻곤 하였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52년 전, 춘천에서 있었던 일이다. 소년은 살면서 한 순간도 선생님의 인자한 미소를 잊을 수가 없었다. ‘나도 선생님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결심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그 선생님의 이름은 중앙감리교회 교사 이혜숙, 52년 전의 그 소년이 지금 이렇게 눈시울을 붉히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어디든 교회 앞을 지날 때면 미소 지으며 손짓하시는 선생님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특히 그리스도의 초상을 보면 그 위에 선생님의 얼굴이 포개지며 가슴이 뭉클해진다. 오늘도 서울의 어떤 교회의 “교사대학”에 가서 특강을 하였고 난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목이 메고 앞이 보이지 않으면서 말문이 먹히는 것을 제어할 수가 없다. 나는 막막했었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었음을 이제는 일 것 같다. 나의 아픔이 멘토의 아픔이다. 함께 아파하는 멘토의 위대한 얼굴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은 삶의 용기를 되찾는 지혜 중의 으뜸이다. 그런데도 난 지금 선생님 소식을 모른다.
선생님, 어디 계십니까? 뵙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