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은 집현전에 명령해 훈민정음을 창제케했고 10년간의 연구끝에 반포하셨다.
無에서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한글을 창제하셨을까?
총.균.쇠로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제3의 침팬지,문명의 붕괴,섹스의 진화등을 쓴
세계최고의 지식인 100인에 선정된 대표적 석학 제러드 다이아몬드교수 같은
분들은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게 고안된 과학적인 문자체계"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문자는 왜 있을까 언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언어의 기원부터 거슬러올라가보자.
동물들이 짝을 찾으며 서로에게 보내는 신호가 아마 최초의 언어였을 것이다.
술의 기원도 인간의 조상이 나무위에 살때 땅에 떨어진 과일에 고인 발효된 물을
마신게 기원이다.
큰짐승을 사냥하려면 사냥꾼들 사이에 협력과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사냥가설에 따르면, 큰 짐승사냥이 인류의 진화에 중요한 추진력을 제공하여
도구제작과 사용,언어,뇌팽창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
인류문화의 발달과정을 보면 그림문자에서 표의문자로 다시 표음문자로 발달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대표적 그림문자를 보자
사우투올라라는 학자는 어느날 딸과 함께 북부스페인 알타미라에 있는
자신의 부지에서 우연히 거대한 동굴을 발견했다.
순록,메머드,말,멧돼지,곰등 평소에 먹기 힘든 고급음식이었다.
기원전 16,000년전의 구석기시대문화가 마들렌문화다.
이런 그림문자는 세계 어디에나 무수히 많다.
지금도 그림문자가 지배하고 있을까 지금은 영어다.
알파벳을 보자 알파벳은 장사를 편하게 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알파벳은 기원전 3,000년 이집트에서 시작하여 크레타섬에서는 1,600년경에
등장하고 페니키아상인들에 의해 널리 유포된다.
지금도 왕이 존재하는 곳이 있지만 최초의 왕은 제사장이었고 알타미라,알파벳의
기원도 따지고 올라가다보면 제사장이 나온다.
인류최초의 문명은 이라크땅에 있던 수메르문명으로 이곳에선 음력과 윤달을
사용했고 성경의 소돔과 고모라이야기도 사실은 수메르명망설화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이다.
원시부족시대의 문자는 성직자의 전유물이었다.
태국(당시 시암왕조)에서 문자를 만들기 위해 베트남 승려들을 끌고갔고 미얀마는 문자를
만들기 위해 태국(시암) 승려들을 잡아갔다.
임진왜란이나 고려말 위화도에서도 승려들이 동행한 예가 이를 증명한다.
각 문자는 그 언어를 기술하도록 오랜 시간을 두고 가꾸어진 것이어서 어떤
문자가 우월하고 어떤 문자가 열등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어느 민족이건 국가를 세우면 문자를 제정하는 것이 동서고금의 상례다.
거란,여진,위구르문자가 있었고 원나라도 한자만으로 표기생활이 가능했지만
훈민정음이 모델로 삼은 파스파문자는 한자의 발음교육을 위한
문자역할도 했다.
[동국정운]의 편찬을 위하여 제정된 것이 훈민정음이다.
훈민정음의 제정목적은 발음기호의 역할이 그 직접적인 제정목적이었다.
우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몽고의 원에서 제정한 파스파문자로부터
훈민정음은 많은 영향을 받았다. 몽고간장,격구,소주,하루방등
전두환씨뒤에 김재익청와대경제수석이란 경제대통령이 있었기에 5공때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세종대왕의 뒤엔
신미,김수온형제와 같은 학승과 불교전문가가 있었기 때문에 사상 유례없는
독창적인 문자가 세종이 창제한걸로 여기게 된 것이다.
원세조 쿠빌라이 뒤엔 누가 있었을까
파스파문자는 원세조 쿠빌라이 칸이 라마승 팍스파 라마를 시켜 만든문자로
훈민정음이 제정되기 170여년전 만든 표음문자이다.
팍스파 라마는 원세조 쿠빌라이 칸의 명령에 따라 토번왕국에서 제정한 서장문자
즉,티베트문자를 근거로 원세조를 위한 새로운 문자를 제정하였는데 이것이
파스파문자로서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첩아진,첩아월진으로 불리던 문자였다.
7세기경 티베트의 토번왕조때에 송찬 감포가 톤미 아누이브를 인도에
파견하여 인도의 발달된 성명학 즉 비가리온을 학습케 해 돌아온 다음에
표음적인 티베트문자를 제정하였는데 중국의 북방민족이 이 문자에 대해
인지한 시점부터 한자문화에 대한 저항으로 요의 거란문자,금의 여진문자,
칭기즈칸의 외올자,남송을 점령한 쿠빌라이 칸의 파스파문자를 제정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전통에 따라 훈민정음이 제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269년 몽골은 파스파문자를 국가의 글자로 제정하고,위구르문자 병용을
인정했다. 그러나 한자를 국가의 글자로 삼는 행위는 허용하지 않았다.
파스파문자는 티베트문자의 일종인 표음문자로 나중에 고려에도 전해진다.
파스파문자를 사용한 지식이 기초가 돼서 고려에서 바뀐 조선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는 계속해서 한자를 쓰다가 지나(차이나)에 동화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7세기 토번왕조의 대신이었던 톤미 삼보다가 인도의 음성학 파니니를 배워
티베트문자를 제정했고 장족인 사키야 판디타의 조카로 원래 이름은
로도이 잘트산인 팍스파 라마는 7세때에 경서 수십만언을 능히 외웠고
15세때에 처음 쿠빌라이 칸을 만나 티베트문자를 모태로한 파스파문자를
만들어 1269년 국제적인 문자로 쿠빌라이 칸에 의해 공포되며 이후 명태조에
의해 시행된 철저한 오랑캐(원) 말살정책으로 대부분의 서적이 망실된다.
오늘날 파스파문자의 전모를 살필 수 있는 것은 런던박물관에 있는 몽고운인
[몽고자운]이 유일하며 [몽고자운]은 권두에 파스파문자를 정확히 기록하였고
집현전 학자인 신숙주와 최세진도 [공고자운]을 많이 참조했다고 한다.
원은 시조도 사실은 칭기즈칸으로 그는 나이만을 정복한 후 위구르인
타타퉁아로 하여금 위구르문자로 몽고어를 기록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태자 오고타이와 제한에게 가르쳤다.(원사)
사실 우리가 중국것이라 알고 있는 삼국지,수호지,서유기도 연극문화가
발달한 원대의 원곡이 원형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원의 영향을 받은 한국과 일본은 서로 다른 방향을 택했다.
중국식으로 한자를 읽어온 한반도인은 이두어로는 표시할 수 없을 정도로
음운 범위를 확장했고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혁명적인 한글을 창제했다.
한국인은 한글전용이 가능한 반면 고대의 음운범위를 거의 그대로 유지해온
일본어는 동음이의가 많아졌으므로 한자의 뜻으로 구별하게 되었다.
한국어는 음운으로 일본어는 이두로 두 언어의 차이를 만들어온 것이다.
통역없이 대화할 수 있던 두나라 언어는 약 1,4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전혀 다른 언어처럼 변한 것이다.
새로 만든 훈민정음이 한자학습에 도움이 되는 발음기호로 마치
파스파문자가 몽고인이나 색목인(아랍인,서양인)들에게 한자학습을 위
한 발음기호의 역할을 했던 것과 같은것이다.
파스파문자의 재정목적인 중국어 학습에서 한자음의 표준음을 학습하기
위하여 발음기호로 만든 것이다.
영어발음기호인 돼지발톱,번데기기호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모든 민족의 언어를 기술할 수 있는 문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많은 문자들이 자생적으로 자신들의 언어를 기술하는데
알맞도록 만들어졌다.
백성들을 가르칠 바를 한자음이라는 뜻의 훈민정음의 모태는
원나라의 파스파문자였던 것이다.
反중국역사
한국어는 신라어 일본어는 백제어
진화심리학
문명이야기
왜 사람은 바람을 피우고 싶어할까
성서의 뿌리
훈민정음과 파스파문자
황하에서 천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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