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왜곡이란 역사 그 자체를 왜곡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위안부 문제, 독도 영유권, 임나일본부설, 동북공정이 있다.
독도 영유권은 일본이 1940년도에 러시아와 전쟁하면서 독도를 무단 점령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뒤 일본 영토로 편입할려고 했고 미국과 거래하면서 필리핀을 건들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고 무력으로 빼앗고 독도를 불법 편입했다.
일본이 주장하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독도에 리름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으로 영유권 주장한다는 것은 억지 주장이다.
독도는 울릉도군에 속해 있기 때문에 지방 도시 이름만 언급되어있다. 대표적인 예로 마라도처럼 일본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남해안의 섬들에 대해선 일절의 언급이 안 되어있다.
독도는 신라 지증왕시대 이사부가 점령하고 우리나라 영토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고 광괘토대왕릉비 탁문에는 동해라는 말이 언급되어있고 고려 시대 자료에서도 독도가 언급되어있고 지도에도 우리나라 영토인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대동여지도와 많은 자료에서도 독도가 우리나라 영토임음 증명하고 있다. 1930년대와 1940년대 고종이 황제칠령 강령 41호에 우리나라는 자주국이며 독도는 우리나라 영토임을 명백히 한다라는 내용이 있었고 일본 지도에서도 우리나라 영토에 울릉도와 독도가 표시 되어잇고 동해라는 표시가 있었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이 신라, 백제, 가야를 점령했다는 억지주장이다. 신라왕자가 칠지도르르 보내 외굘르 맺은 것을 근거로 지배했다는 주장인데 조공을 했지만 실리적은 외료를 위해 이익을 챙기기 위한 선물일 뿐이다.
일본군 위안부는 세계 2차 대전 피해자이며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살아남은 유대인들과 함께 사과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위안부는 일본군이 한국 여성 뿐만 아니라 중국인, 베트남인, 동남아시아인, 필리핀인, 네델란드인 등 많은 여성들이 공장으로 일을 하러 간다는 말을 듣고 따라가거나(취업 사기) 납치를 당하거나 징집을 당해서 일본군 분대에 들어가서 위안소 즉 강간 장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아직 14, 15살 밖에 안된 어린 소년들을 일본군 남자들이 하루에 60-70명이 어린 소녀들을 강간, 성폭행했고 어린 소녀들은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이 나가거나 트라우마를 가진 채 죽을 때까지 마음고생해야 된다.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갈려면 도항 증명서와 출입증을 써야 되고 배에 오른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승객명단으 만들어 통제를 안 받고 일본 내에 들어가고 공장으로 가거나 위안소에 보내지게 된다.
살아남은 위안부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일본군에게 몸 바친 여자로 인식되어 정부, 사회, 교향 사람들과 가족에게서 버림받고 그들끼리 모여 서로의 상처를 달래주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게다가 1950년대 6.25전쟁, 1970년대 베트남전쟁, 민주화 혁명으로 주위 사람드리 목숨이 잃거나 이산 가족이 되거나 하여 마음고생이 심한 위안부 할머니들은 지금도 사과를 받기 위해 수요집회를 열고 있다. 강제 징용 피해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어린 시절을 폐광에서 보내야 되었고 고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많은 독립열사들이 일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폭탄을 던지고 친일파들을 제거하고 소극적으로 시를 쓰기도 하고 3,1운동을 하고 금 모으기 운동도 하고 많은 희생을 치룬 결과 광복 70주년을 맞이했다.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동북공정은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고려사 일부분까지 중국사라고 세뇌시키는 프로젝트이다. 고조선 신화에 북쪽에(부여쪽0 내려온 하늘(즉 환웅)을 신으로 믿는 사람들과 함경도쪽 곰을 시능로 믿는 사람들과 평안도쪽 호랑이를 시능로 믿는 사람들이 만나 결혼 동맹을 제의하고 하늘을 신으로 믿는 사람들의 대표인 남자고 곰을 신으로 믿는 사람들 대표인 여자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시간이 지나가 그 아이를 단군왕검이라고 부르며 사람들은 그를 믿고 따르며 그가 세운 고조선 사람이 되었다.
부여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을 중국인라고 단정지울 수 없다. 중국의 소수민족 중 몇십명이 우리나라로 들어와서 살고 있지만 지금의 간도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거나 압록강, 두만강 근처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거나 러시아인일 수 도 있다.
고조선 때 중국 사람이 왕권을 빼앗아 지배했다는 주장은 불확실하며 논리적인 근거도 별로 없다. 고구려나 발해때도 동쪽의 오랑캐라고 부르며 동이족이라고 인식되었다는 것은 중국인이 아닌 우리나라 고유 민족이 세운 나라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며 발해를 해동성국으로 불리고 비단길을 통해 중국의 물건들과 인도, 중동지역 특산물이 우리나라에 전해지기도 하고 몰골인과 돌궐, 선비족, 흉노족 등 소수민족이 세운 나라와 물물교환과 함꼐 조공을 하며 실리적인 외교를 하고 있었다.
남북조 시대에 남조와 북조 모두 조공관계를 맺었지만 고구려가 강해서 지적을 할 수 없어싿는 내용이 당나라 자료에 기록되어있다. 나라 간 외교를 맺기 위해 선물 즉 조공을 받치고 외교를 맺고 나서 물물 교환을 하고 교역지점에서 시장을 열어 각 나라의 물건을 사고 팔 수 있게 했다. 대표적인 예로 부산 왜관이나 압록강, 두만강 주변에 교역지점이 있고 여진, 몽골, 청나라, 러시아, 중국의 소수민족과 무역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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