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전투 이후에 한일 두 지역에 새로운 문화 양상이 나타난다. 신라는 수많은 유학생을 당나라에 보내
어 당음과 당의 문화를 적극 받아들였으며 AD 757년 경덕왕 때 고유명사까지 당나라 식으로 고치기도 했
다. 중국식으로 성씨 바꾸기에 끝내지 않고 마을 이름까지도 바꾸었다. 이전에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받아들였던 오음이 거의 사라졌고 고려 광종이 과거제도를 채택하자 당음이 확고히 자리 잡았다. 해방 직
후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엉터리 발음으로 한 영어가 로얄영어로 바뀐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백강전투 이후 백제계는 주로 관서지역에 살게 되었고, 신라계는 그들에게 밀려 관동으로 이주했다. 따라
서 백제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관서어(교토)는 관동어(동경어)에 비해서 부드럽다.
중국어는 각음절에 '평상거입'의 4성조가 있는데,p, t, k로 끝나는 입성을 한국어에서는 받침으로 처리했
다. 이들은 영어의 cap, hit, look와 같이 p,t,k의 음이다. 결국 한국어에는 받침이 생기고 모음과 자음의
종류가 늘어나는데 일본어에서는 모음의 종류가 줄어들고 현재 한일어의 발음 수는 엄청나개(약 30배) 차
이나게 되었다. 가령 일본에서는 고구려를 고쿠리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고대문헌에도 고쿠리라고 읽고
있다. 즉 일본 발음 '고쿠리'가 고구려 보다 본래의 음에 가깝다. 또, 백제 박사 왕인의 이름에 대한 일본
음 '와니'는 백제음으로 한자 왕인보다 더 정확한 음이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낱말을 증식하는데 서로 다른 방향을 택했다.
중국식으로 한자를 읽어온 한반도인은 이두어로는 표시할 수 없을 정도로 음운범위를 확장했고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혁명적인 한글을 창제했다. 한국인은 한글 전용이 가능한 반면, 고대의 음운범위를 거의
그대로 유지해온 일본어는 동음이의가 많아졌음으로 한자의 뜻으로 구별하게 되었다. 한국어는 음운으로
일본어는 철자로 두 언어의 차이를 만들어온 것이다. 통역없이 대화할 수 있던 두 나라 언어는 약1400년
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전혀 다른 언어처럼 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