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는 어디에 붙어있을까 독도는 그리고 그 상황은 어떨까
대통령이 제주도를 다른나라에 넘겨준다면 국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청와대는 어느 도시에 있을까 그럼 간도는 어디에 붙어 있고
어떻게 생겼을까
지도의 어디쯤에 존재할까 간도가 우리땅이라고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될까
청와대 국민청원에 억울한 사연이나 독도문제가 올라오면
벌떼같이 달려들어도 간도문제가 올라오면 '너나 잘하세요'다.
우리는 주인의식이 없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있다.
언제 뉴스에 조선족학교에서 한글교육을 못시키게한다는
보도를 보고 그런가보다한다.
일제시대 국어교육을 금지시킨거에 대해선 자자손손 분개한다.
만약 일본에 있는 한국학교에서 한국어 가르치지 말라고
일본정부에서 지시를했다면 바로 일어날것이다. 또 아베총리가
대통령수행단을 두들겨팼다면 전국민이 당장 달려갈 것이다.
중국에서 두들겨팬다 조용하다 한국어 못가르치게한다 조용하다.
중국은 한국의 부모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조선의 건국세력이
만든 소중화사상에 쩔어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 한반도를
집어삼키려 한발한발 다가서도 모르는 우린점점 익어가는
냄비속 개구리들이다.
미군이 철수하면 한국은 공산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인이 된다.
이미 북한은 중국의 젖병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능력을 상실했다.
1962년 간도를 둘러싼 북한과 중국사이의 비밀협상인
조중변계조약이 있었다.
조종변계조약은 유엔의 등록은 물론 공식적인 발표도 하지 않았다.
1962년 한반도 38선 이북의 북한정권은 맹방관계인 중국과
간도문제를 협상하여 중국영토로 인정했다.
1962년 조중변계조약은 1909년 간도협약을 북한이 그대로
따른것으로 조중변계조약은 비밀리에체결되어 한국이
조약체결 상황을 알지 못했으므로 조중간의 국경협정이
전적으로 합법적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 발단은 1905년 일본이 대륙정책의 현안이었던
조선합병과 만주에 대한 권익사업의 차질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철도부설권과 석탄채굴권을 확보하는
교환조건으로 간도를 중국영토로 인정하고 말았다.
1905년 선후장정은 양국정부로부터 조약권을 위임받은 정식조약이
아니었으므로 법적효력을 갖지못하는 임시조약에 불과했다.
간도가 한국땅이라는 근거는 17세기부터 이곳은 봉금지역이었고
게다가 조선인들이 중국인들보다 먼저 간도지역을 실효적으로
점유하였으므로 영토취득 요건에 부합하며 현행국제법의
중간선개념으로 본다해도 토문강 이남까지의 지역은
조선영토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1712년 정계비가 되고 토문강을 경계한다고 해석된다.
백두산정계비에는 [대청]비로서 [동이토문],[서위압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대청]국이 세운비라는 의미이다.
백두산정계비의 기록대로 [동이토문,서위압록]으로 국경선을
정한다면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송화강-흑룡강-태평양 동안을 잇는선이
한중양국의 국경선이된다.
현재 중국영토의 60%는 남의 나라땅으로 티벳,내몽골,간도,
신장위구르,영화회족등 강압적인 식민통치를 이어가고 있다.
유고사태,,팔레스타인문제,르완다등 여러곳에서 분쟁이 일어난다.
이유는 하나다 민족주의 중국에선 지금 민족주의가 한참이다.
정부에서도 부채질하고 있다.
지금의 중국이 강압지배하고 있는 식민지는 중국것이라는
하나의 중국을 위하여다. .그 시작은 어디일까?
1989년 4월 15일 후야오총서기의 사망으로 시작된 민주화운동은
계엄군의 천안문광장 진압으로 한달여만에 끝났다.
'관다오' - 정부관료와 기업가 or 상인등이 유착하여 전매차익을
나누어 먹는다는 말로 여기엔 태자당이라는 고위 당정간부의
자제들도 끼어있었다.
국제적으로는 소련,폴란드,헝가리에서 진행된 민주적인 정치개혁과
국내적으로는 부패에 대한 국민의 불만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1989년 5월 13일부터 학생지도자의 주도로 천안문광장에서
1,000명의 학생이 단식에 돌입하였고 이것이 끝내 유혈진압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1989년 11월 동독의 베를린장벽의 붕괴가 가속화되면서 공산당이
붕괴하는데 폴란드는 10년,헝가리는 10개월,동독은 10주,체코는
10일 루마니아는 10시간이 걸렸을뿐이다.
공산주의로 뭉쳐서 개방해야되는데 이것이 민주화운동인
천안문사태로 난관에 처한 공산당은 국민의 단결을 위한
접착제로 민족주의를 도입하여 국민의 단결을 유도한 것이
지금의 중화민족주의로 연결된 것이고 하나의 중국을 외치는
근본원인이 된 것이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단체는 조직의 합법화를 요구하는데
그렇게되면 중국에도 '반대파'가 만들어지고 공산당을 반대할 기초가
놓이게된다.
등소평은 사회주의의 본질은 생산력 해방이고,생산력 발전이며
착취를 소멸하고 양극화를 해소하며,최종적으로 공동으로
부유함에 도달하는거라하였다.
경제가 장기간 동안 곤경에 빠지면 정치는 안정될 수 없고 사회도
안정될 수 없다.
민주화운동초기에는 교내학습모임에서 100만명이 참여하는
시민운동으로 확장하였으나 학생지도부는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무엇보다 운동의 주도세력인 학생과 지식인이 엘리트주의
혹은 전통적인 사대부의식이 매우강했다.
그래서 이들은 노동자와 자영업자등 다른 사회계층과 적극적으로
연대하려는 노력도 부족했다.
그 결과 정부는 별 어려움 없이 학생과 지식인을 고립시키는데
성공했고 이를 바탕으로 성공적으로 무력집압할 수 있었고
생각보다 빨리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또한 중국내에서는 소련이나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 발견되는
시민사회가 부족했다.
노동조합등 군중단체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 노동자는 공산당의 강한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농민도 마찬가지였다.
공산당은 농민의 지지와 참여를 통해 혁명에 성공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는데,
노동자의 노동조합과 같은 농민대중조직은 없었다.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농민이 민주화운동에 집단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통로나 방법은 많지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1989년의 민주화 운동은 대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나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운동의 주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운동은 오로지 학생만의
운동이었다.
그런데 학생이 민주화 운동을 성공적으로 주도할 수는 없다.
한국등 제3의 민주화물결을 경험한 국가들은 학생이 운동의
촉발과 추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전체상황을 파악하여
활동계획을 수립하고,집권세력과민주제도의 도입을 둘러싼 협상을
벌이는등의 역할은 정치조직과 사회단체의몫인데 중국에는 바로
이것이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중국정부는 국제적으로는 소련및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국내적으로는 천안문사건의 영향으로 설득력이 매우 약화된
사회주의 이념을 대신하여 국민통합을 외부인자로 돌리기 위해
민족주의가 공산당의 통이념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중변계조약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비밀공개로하고 있어 조약의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어 '조중변계
조약'은 비밀조약으로서 양국간에는 인정되나 국제법상으로는
자격이 미흡하고 국제법상으로는 효력을 갖지 못하므로
통일 한국이 그대로 계승할 수 없는 조약이다.
북한도 중국에 조중변계조약을 체결한 것은 '간도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미해결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던
것이다.
남한에선 어땠을까 박정희정부는 남북이 통일된 이후 간도문제를
해결해야한다고하여 간도문제를 조사하는등 통일한국에
대비하고 있었으나 김영산대통령이 모두 폐기했고
반기문 외교부장관이 국회에 출석해 간도가 우리땅임을 주장하는
입장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했지만 노무현정부는 중국정부에
대해 역사인식에 있어서는 양국의 입장을 존중한다고 동의를해
한국의 간도문제를 더욱 불리하게 만들었다.
민족주의라는 접착제를 이용해 국민의 단결을 이끌려는 중국정부를
상대로 간도문제를 해결해야하는 과제를 남한정부는 안고 있다.
간도협약은 침략국가였던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된
조약이었으므로 무효인것이다.
방법은 하나 흡수될 경우 흡수된 국가의 조약은 종료되며 흡수한
국가의 조약만이 흡수된 국가의 영역에 적용된다는 것이다.
참고서적
톈안먼사건
대쥬신을 찾아서1,2
동아시아영토분쟁의 패러다임
황하에서 천산까지
욕망하는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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