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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담
자연과 교감하면서 살겠습니다
총무 동명스님
10월이 되면서 가을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9월은 여름의 연장인 듯싶게 낮이면 더웠지만, 어제부터는 한낮에도 서늘해졌습니다. 이제 나뭇잎들도 서서히 단풍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들에서는 쓰러진 벼를 일으키거나 베어야 하는 농부들의 한숨소리가 들려옵니다.
이 가을,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계신지요? 가을이 되면 우리들 자신의 삶을 한번씩 돌아보게 됩니다. 농사에 비유해보면, 가을은 수확기입니다. 봄이 파종기라면 여름은 성장기이고, 가을은 성장한 곡식과 과일을 거두어들이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그 곡식과 과일을 생산한 식물들이 할 일을 다 마쳤다는 의미도 되기에, 가을은 농부들이 한 해 농사를 잘 지었는지 돌아보게 되는 시기인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가을이면 우리 불자들은 올해 내가 잘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참 유용할 것 같습니다.
주여, 때가 됐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이틀만 더 남국(南國)의 햇살을 베푸소서.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포도주에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헤매일 것입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2.4.~1926.12.29), 「가을날」 전문
기독교인인 릴케는 자신의 종교적 관점에서 지난 여름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위대한 자연(창조주)은 지난 여름 참으로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했고, 온갖 곡식과 과일들을 익게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햇살을 통해 온갖 곡식과 과일들의 위대한 ‘완성(바라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릴케는 신과 교감하고, 자연의 위대함을 명상하고 있습니다.
릴케는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집’이란 나와 가족을 위한 아늑한 쉼터입니다. 그런데 가을이 되면 집을 짓지 않다니요? 기독교인인 릴케가 갑자기 부처님 법을 얘기하는 듯도 싶습니다. 부처님은 집을 ‘자유롭지 못한 번뇌의 공간’이라 상징하고 그 집으로부터 벗어나 ‘집이 없는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을 ‘출가’라 하셨습니다. 릴케가 그런 뜻으로 얘기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 불자들은 이 시를 보고 가을이 되면 ‘번뇌의 집’을 짓지 않으리라 생각하실 것입니다.
릴케의 시에서처럼, 지난 여름, 위대한 자연이 수많은 곡식과 열매를 익게 했듯이, 나의 수행은 무르익었는지 돌이켜보고, 또는 그렇게 무성했던 나뭇잎들이 바알갛게 단풍이 들어 마지막 아름다움을 불태우더니, 어느새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모습을 조용히 응시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 바로 그러한 ‘교감(交感)’이 필요한 시기가 가을입니다.
‘자연’은 하나의 신전, 거기 살아 있는 기둥들에서
이따금씩 어렴풋한 말소리 새어나오고;
인간이 그곳 상징의 숲을 지나가면,
숲은 정다운 시선으로 그를 지켜본다.
밤처럼 그리고 빛처럼 끝없이 넓고
어둡고 깊은 통합 속에
긴 메아리 멀리서 어우러지듯,
향기와 색채와 소리 서로 화답한다.
어린애 살결처럼 싱싱하고,
오보에처럼 부드럽고, 초원처럼 푸른 향기들이 있고,
—또 다른, 썩었지만 기세등등한 풍요한 향기들이 있어,
용연향,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무한한 것으로 확산되어,
정신과 관능의 환희를 노래한다.
- 샤를 보들레르(1821.4.9~1867.8.31), 「교감(交感)」 전문
보들레르는 자연을 하나의 신전이라고 얘기했지만, 우리 불자들에게 자연이란 아름다운 법문이 샘솟는 ‘법당’과 같은 곳이겠지요. 여러분, 숲이 들려주는 법문이 들리십니까? 여러분이 숲을 지나갈 때마다 여러분을 정다운 시선으로 바라다보는 숲의 눈길이 느껴지시는지요?
올 가을에는 보들레르처럼 자연과 교감을 나누어보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권합니다. 자연, 그 밝거나 어둡거나 깊거나 넓거나 아름다운 ‘통합’ 속에 긴 메아리가 멀리서 어우러지듯, 여러분의 삶도 향기와 색채와 소리로써 아름답게 조화를 이룰 것입니다.
어둑한 골짜기에 구름이 비로소 일어나니
연못은 공(空)하고 물은 더욱 맑아라
해질녘 숲 밖에서 연주하는 피리소리
두 가락 세 가락 바람에 실려오누나
洞暝雲初起 潭空水亦淸 夕陽林外笛 風送兩三聲
산기운은 구름과 화합하여 그윽해지네
계곡물은 햇빛을 둘러 더욱 맑아지는데
이 가운데 표현할 수 없는 것 있느니
외로운 피리소리가 부르는 가을의 노래
山氣和雲密 溪流帶日淸 箇中難畫處 孤笛起秋聲
- 운곡충휘(雲谷冲徽, ?~1613), 「복룡천에서 피리소리를 듣다(伏龍川聞笛)」 전문
운곡충휘 선사에게 가을의 전령은 ‘외로운 피리소리’입니다. ‘외로운 피리소리’가 실제 피리소린지 숲과 나무가 들려주는 피리소린지는 분명치 않지만, 아마도 숲과 나무가 들려주는 피리소리일 것입니다. 가만히 귀기울여 들어보십시오. 숲에서는 인간이 만든 악기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온갖 피리소리가 들려옵니다.
선사는 왜 피리소리를 외롭다고 느꼈을까요? 피리소리는 깨달음의 노래여서, 깨달음에 근접한 이가 드물어서일까요? 외로워야만 가을의 피리소리가 들리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실로 외롭지 않고 그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정호승 시인은 우리는 모두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정호승, 「수선화에게」)라고 말했습니다. 실로 외로움을 감당한 사람에게만 “외로운 피리소리가 부르는 가을의 노래”가 들릴 것입니다.
어쩌면 자연과의 교감은 외로움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이번 가을에는 “외로운 피리소리가 부르는 가을의 노래”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산과 들을 홀로 찾아보시고, 자연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어보십시오.
저는 부처님께서 당신의 생애 중 마지막 여행을 하시면서 새로운 도시를 만날 때마다 그곳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셨던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아난다여, 웨살리는 아름답구나. 우데나 탑묘도 아름답고, 고따마까 탑묘도 아름답고, 삿땀바까 탑묘도 아름답고, 바후뿟따 탑묘(다자탑)도 아름답고, 사란다다 탑묘도 아름답고, 짜빨라 탑묘도 아름답구나.”(D16.3.2)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께서도 항상 자연과 교감하면서 그 아름다움을 감탄하시곤 했던 것입니다.
자연과 교감하는 삶 속에 ‘여유’가 있습니다. 자연과 교감하는 삶 속에 ‘시(詩)’가 있습니다. 자연과 교감하는 삶 속에 ‘행복’이 있습니다. 저는 매일 이렇게 발원해봅니다.
“오늘도 자연과 교감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나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으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내 삶에 이바지하고 있음을 느끼겠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자연 속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음을 알게 하소서.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