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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하던 곳 |
이 름 |
사 유 |
홍산에서 이주하여 타지에서 체포된 사람 |
황일광(시몬) |
1792년 홍산 거주 1802년 홍주에서 처형(현재 시복시성 대상) |
삽티(홍산 상천리)에서 거주하던 사람 |
황천일(요한) |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삽티에 안장한 후 체포되어 서울에서 처형됨(황석두의 양자) |
황기원(안드레아) |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삽티에 안장한 후 체포되어 서울에서 처형됨(황석두의 조카) | |
도앙골(내산 금지리)에서 거주하던 사람 |
김사범 |
공주 감영에 이수되어 처형 |
김 루카 |
공주 감영에 이수되어 처형 | |
김 바오로 |
공주 감영에 이수되어 처형 | |
오 시몬 |
공주 감영에 이수되어 처형 | |
오 요한 |
공주 감영에 이수되어 처형 | |
거칠(외산 화성리)에서 거주하던 사람 |
박 루시아 |
공주 감영에 이수되어 처형 |
송 루시아 |
공주 감영에 이수되어 처형 | |
박 첨지의 아내 |
공주 감영에 이수되어 처형 | |
양 서방의 모친 |
공주 감영에 이수되어 처형 | |
임 베드로의 모친 |
공주 감영에 이수되어 처형 | |
옥가실(외산 신근리)에서 거주하던 사람 |
임 아나타시아 |
공주 감영에 이수되어 처형 |
김 바르바라 |
공주 감영에 이수되어 처형 | |
부덕리(옥산 대덕1리)에서 거주하던 사람 |
이용래(아오스딩) |
황석두 성인의 매제 - 서울에 이수되어 처형 |
황 마리아 |
황석두 성인의 여동생 | |
박 시몬 |
이 암브로시오 외 1인과 함께 체포 서울에서 처형 | |
홍산 내대(?) |
강명흠 |
홍산체포-서울 좌포청 문초 후 처형미확인 |
홍산 대야동(?) |
김천명 |
서울 좌포청 상고 기록 |
최군서 |
서울 좌포청 상고 기록 | |
홍산 판교(?) |
강호경 |
서울 좌포청 문초 기록 |
홍산의 다른 마을 (마을 명칭 미상) |
임 데레사 |
공주 감영에 이수되어 처형 |
강순오(안드레아) |
서울 좌포청 문초 기록 | |
박중문(도마) |
서울 좌포청 문초 기록 | |
이사심 |
서울 좌포청 문초 기록 | |
이용옥(아오스딩) |
서울 좌포청 문초 기록 |
위 명단 중, 황일광(시몬)은 본래 홍주에서 살던 사람인데, 1792년에 홍산에 이주하여 이존창을 만나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의 천주교 초기(1880년대 중반)에 신앙 활동한 이존창의 선교에 의하여 홍산 지방에 천주교 신앙의 씨앗이 뿌려졌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존창은 1차 체포된(1791 辛亥年)후 석방되었다. 일시적으로 마음 약하여 순교하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으로 그는 더 열렬하게 선교활동을 하려 했으나 고향(내포 지방)에서 벽에 부딪치게 된다. 우선 가족들로부터 배척을 당했다. 그래서 그는 홍산 땅으로 이주하여 선교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한 영향 하에 홍주(洪州)의 내포 지방에서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천주교신자들 또한 홍산(鴻山) 지방의 주로 산간 지대로 이주하여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음을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천주교회에서는 1860년대 이후 홍산을 중심으로 하는 현 부여군·보령시·청양군·서천군의 산간 지역을 ‘하부내포’라 일컬어왔다. 그 ‘하부내포’의 중심 마을이 ‘삽티’(홍산 상천리)라 할 수 있다.
2. 홍산 ‘삽티’의 지리적 위치와 옛 천주교 신자들
현 부여군 내산면과 보령시 미산면의 경계를 이루는 월명산 능선이 동쪽으로 뻗어 흘러 천보산 능선과 맞닿은 고개를 ‘삽티(揷峙)’라 일컫는다. 일명 ‘삽고개’라 하는 ‘삽티’는 부여군 홍산면 상천2리와 내산면 금지2리 사이의 면계를 이룬다. 이 월명산과 천보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남쪽 계곡과 북쪽 계곡에 박해시대의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살며 ‘삽고개’를 사이로 연통하고 살았다.
‘삽고개’에서부터 남쪽으로 길게 흘러내린 계곡에 옛적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살게 되어 그곳을 ‘삽티 교우촌’이라 한다. 그 계곡에서 동쪽으로 천보산을 바라보는 비탈에 그 교우촌이 있었다.
그리고 ‘삽고개’의 서편 능선이 월명산 정상에까지 맞닿아 북쪽으로 흘러내린 계곡이 금지천을 이루는 지점에 ‘도앙골 교우촌’이 있다. 그 ‘도앙골’의 신자들 집에 숨어서 최양업 신부는 1850년 10월에 자기 활동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러한 ‘삽티 교우촌’과 ‘도앙골 교우촌’의 신자들이 1866년 ‘병인 대 박해’ 시기에 홍산 관아에 체포되어 일부는 공주 감영에서 일부는 한양(서울)에서 처형 되었다. 그러므로 ‘삽티 교우촌’과 ‘도앙골 교우촌’은 홍산 지방의 천주교 순교 유적지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매우 중요한 순례지(성지)로 보전되어야 한다.
3. ‘삽티 교우촌’의 중요성
홍산면 상천2리에서 북쪽으로 내산면 금지2리(속칭 ‘산정말’)로 넘어가는 자동차 길이 613번 지방도이다. 이 도로를 천주교 신자로서는 옛 사연을 회상하여 순례하는 코스로 주목하게 된다. ‘삽티 교우촌’은 우선 황석두(루카) 성인의 유해 안장지이기 때문이다. 1866년(병인년) 3월 30일(음력 2월 14일)에 보령 오천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한 성인 5명의 머리를 사흘 동안 장깃대에 매달았다가 그 몸과 함께 마구잡이로 모래밭에 묻었는데, 그 중에서 황석두 성인의 시신은 그분의 양자 황천일(요한)과 조카 황기원(안드레아)에 의해 거두어져서 홍산 삽티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황천일과 황기원은 이러한 일로 인하여 체포되어 서울에 압송 처형되었다.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안장한 곳으로 추정되는 홍산 삽티의 ‘즘터’에서는 1964년에 산림개간 작업을 하던 사람들에 의해서 박해시기의 성물(聖物)이 담긴 옹기가 발견 되었다. 당시 산림작업에 참가하여 현장에서 그 발견을 목도한 박종선(안드레아)은 현재 금지2리(산정말)에서 살아온 신자로서 그 사실을 증언한다. 그 ‘즘터’는 금지2리에서 삽티를 남쪽으로 넘어 홍산면 상천2리에 닿기 전 오른쪽 계곡 너머 경사지에 위치한다. 그 경사지는 상천리에서 도앙골(내산면 금지1리)로 넘어가는 오솔길의 성황당 고개 아래 계곡과도 만나는데, 그 현장은 현재 개인사업자가 절개 평토하고 여러 동(棟)의 공장을 건축하였다. 그 경사지였던 ‘즘터’는 아마도 황석두 성인의 안장지였고 성물이 담긴 옹기도 황 성인과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차기진 박사는 추정하고 있다.
그 ‘즘터’의 윗자락은 모 문중의 재실과 묘원이 10여 년 전에 조성 되어 있고, 그 옆 경사지 일부를 천주교회 측에서 2013년 초에 매입하여 성역화를 계획하고 있다.
도앙골의 신자들은 아마도 삽티의 그 ‘즘터’로 넘어 다니며(성황당 고개를 넘어) 홍산 지역의 다른 곳 신자들과 연통하고 살았을 것으로 필자는 추정한다. 현재 금지1리의 주민들도 도보로 홍산 읍내 방향에 일보러 다니던 과거사를 회상하고 있다. 그리고 성물 옹기를 발견한 곳을 ‘즘터’라 일컫는 것으로 추정하건대, ‘삽티 교우촌’의 잔류 신자들이 대를 이어 살던 옹기 제작지로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황석두 성인의 유해 안장지로서의 의의와 그와 관련된 순교자들을 배출한 ‘삽티 교우촌’은 한국 천주교회의 주요 성지로서 보전 성역화 해야 할 중요성을 지닌다.
4. ‘도앙골 교우촌’의 중요성
앞에 ‘삽티’의 지리적 위치를 설명하는 중에 언급한 월명산 북향 중턱에는 고찰 금지사가 위치한다. 금지사 본전의 뒤편 바위 밑에서 솟는 샘물은 특이한 약수로 알려져 있는데, 그 샘으로부터 흘러내리는 계곡물가의 좌우로는 산복사(일명 개복숭아)나무가 많이 자란다. 봄철에는 그 계곡 따라 붉은 복사꽃이 굽이쳐 피고 산골 가득 그 향기가 채워진다. 하여 ‘도원곡(桃園谷)’이라 일컫던 산골 이름을 ‘도왕골’ 또는 ‘도앙골’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앞에 설명한 바와 같이 ‘삽티 교우촌’과 수시로 연통하며 은거하던 ‘도앙골’의 옛 천주교 신자들이 1866년에 일망타진 처형되었다. 최양업 신부가 숨어서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었던 그 교우촌의 신자들이 모두 순교한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그곳 역시 천주교회의 성지로 중요성을 지닌다. 천주교회 측에서 그 교우촌 지역 중 일부(580평)을 2010년에 매입하여 성역화를 시작하였다. 앞의 ‘삽티 교우촌’과 연계하여 순례 코스로 조성하도록 추진해야 한다.
5. 그 외 인근 교우촌들
‘산정말’과 ‘뒹굴’ :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이 ‘삽티’의 면계 넘어 속칭 ‘산정말’과 건너편 ‘뒹굴’을 합쳐서 내산면 금지2리라 한다. ‘뒹굴’은 도앙골에서 금지1리의 아랫마을을 비껴서 ‘산정말’로 넘어가는 동쪽 능선 아래에 형성된 취락지이다. 증언에 의하면, 도앙골의 후기(박해 후) 신자들이 ‘뒹굴’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그 ‘뒹굴’에는 누대에 걸쳐 신앙인들이 살았고, 6.25 전쟁 당시 외지 신앙인들이 피난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 구룡면 금사리 성당의 몰리마르 요셉(J. Molimard) 신부가 뒹굴 신자(박종선 부모)의 집 뒤 대나무 숲 토굴에 피신하여 있다가 공산군에 의해 피납 된 후 대전 형무소에서 순교하게 된 사연의 관련성에 따라 현대 순교사의 유적지로 인식할 필요도 있다.
‘내대’ : 현 부여군 외산면에 속한 마을이다. 속칭 ‘안골’ 혹 ‘안터’라 하는 ‘내대(內垈)’는 현 외산면 갈산(葛山)2리를 일컫던 옛 이름이다. 현 주민들은 ‘내대마을’이라 부르고 있고 그 옆의 백마산 모퉁이를 돌아서 외산면 소재지인 만수리(임수대 마을)에 일보러 다닌다.
‘고갈(高葛)’ : 현 갈산1리를 일컫는 옛 이름이다. ‘고갈’의 주민들은 갈고리처럼 휘어진 백마산 줄기 안부(鞍部)를 넘어서 ‘내대(갈산2리)’를 통과하여 만수리에 일보러 다닌다.
‘거칠’ : 현 외산면 화성리 산골을 일컫는 곳이다. 앞의 ‘고갈’에서 북동쪽의 월하산(月下山 : 속칭 ‘달하산’) 자락을 넘어 북향의 계곡과 주변 경사지 일대를 ‘거칠’이라 한다. 이 ‘거칠’은 험한 산간 교우촌을 이루어 순교자들을 다수 배출한 곳이며 1880-90년대에 꽤 많은 신자 수를 기록에 남긴 마을인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구룡 금사리 성당 관할의 중요한 공동체를 유지하던 곳이다. 보령 미산면 평라리의 ‘서짓골’에 살던 이 바오로(李化萬)와 이치문(힐라리오)이 병인년의 갈매못 순교자 4명의 유해를 이장하고 후대(박해 후)에 타지로 이주하였는데, 그 후손(이우대)이 주도하여 ‘거칠’에 신자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이우대의 아들 이완성(사도 요한 1914-1954) 신부가 이 신자 공동체에서 출생하고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치문(힐라리오)의 후손 대에 살던 산간 오지 거칠에 교우촌이 형성된 기원은 황석두 성인의 활동기에 해당된다. “황석두는 한때 ‘홍산 거칠 교우촌(현 부여군 외산면 화성리)’에서도 거주했다고 하는데(‘병인박해 시복 재판 기록’ 회차 88, 김흥칠 마티아의 증언), 당시 천주교의 주요 거점이었던 서천 판교면의 ‘산막골’이 ‘거칠’에서 약 50리 상거에 있다”라는 근거로 보아서 그렇다.
‘고칙’ : ‘고갈’과 ‘거칠’에 연관성이 있는 명칭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최양업 신부의 활동기(1850-1860년대) 중에 동료 사제로 입국활동 하던 선교사 프티니콜라 신부의 행적과 연관하여 이 마을 이름들이 나타나고 있다. 1856년 3월경 조선에 입국한 프티니콜라 신부는 ‘내대 교우촌’에서 조선어를 익히며 사목 준비를 하였다. 홍산 지방에는 인근에 ‘내대(內垈)’라는 지명의 마을이 세 곳이 있다. 외산면 갈산리의 내대와 또 다른 마을로 홍산 읍내의 건너편에 위치한 옥산면 내대가 있다. 옥산면 내대는 ‘안골’이라 일컬어지는 내동(內洞)과 소안동(小安洞)이라는 옆 동네와의 사이에 붙어있는 곳이라 하여 일컬어지는 차동(次洞)을 덧붙여 합촌(合村)하고 행정개편한 후에 ‘내대리(內垈里)’라 부른다. 그리고 은산면 내지리의 ‘내대’도 있다. 은산의 내대는 앞에 언급한 ‘거칠’에서 ‘새재’라는 험준한 고개 너머에 있다.
그러므로 후대(일제 강점기)에 붙여진 이름의 옥산 내대에서 프티니콜라 신부가 조선어를 익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내대 이웃 동네에 신자 5가구가 사는 ‘고칙(高葛)’이라는 교우촌이 있는데, 프티니콜라 신부가 1856년에 박해를 피하여 그곳에 피신한 일이 있었다고 쓴 편지를 지적한 문건이 있다. 이 문건에서 인용된 ‘고칙(高葛)’이라는 교우촌은 옥산면 내대와는 정황이 맞을 수가 없다. 옥산에는 ‘고칙’과 비슷한 이름의 동네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산면 내지리의 ‘내대’는 프티니콜라 신부의 문건에 ‘고칙’을 깊은 산골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서 그 궁벽한 형세가 흡사하다. 그러나 은산면에도 또한 ‘고칙’과 비슷한 이름의 동네가 없다. 반면, 외산면의 내대 인근에는 현재까지도 주민들에게 전해지는 마을 이름 ‘고갈’과 ‘거칠’이 있지만, 프티니콜라 신부의 문건에 표기된 ‘고칙’(Ko-tchick)이라는 마을은 없다.
그러나, ‘거칠’을 프티니콜라 신부 혹은 문건 편집자 Darney에게서 Ko-tchick으로 잘못 표기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칡’을 뜻하는 ‘葛’자로 한자표기를 하는 ‘고갈(高葛)’과 ‘거칠’은 산 너머 사이이므로 ‘葛’자와 연관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현 외산면 월하산의 남쪽 아래 마을은 ‘고갈’, 산 넘어 북쪽 계곡의 옛 취락지를 ‘고칙’이라 일컫는 것으로 보아서 양쪽 지명이 동일하게 사용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한 예는 다른 지역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고갈’(高葛=갈산1리)에 프티니콜라 신부가 피신하였다는 ‘고칙’일 수가 있다. 한자의 ‘갈’은 ‘칡’이기 때문이다. ‘거칠’은 앞에 언급한 이치문의 후손들과 관련하여 천주교 신자들이 오래전 피신하여 살던 곳으로써 프티니콜라 신부가 그곳에 피신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프티니콜라 신부가 기록한 ‘내대(Nai-tai)’ 마을과의 연관성은 ‘고갈’에 개연성을 둘 수도 있다. 산 하나 사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티니콜라 신부가 ‘내대(Nai-tai)’를 프랑스어로 ‘ma pipe(내 담뱃대)’라 표현한 것으로 보면 황당한 상상을 할 수도 있다. 하여튼, 산 너머 사이로 두 마을은 은신할 수 있는 오지이지만 신앙인 후예들의 족적이 ‘거칠’에 짙게 남아 있다.
옥가실 : 외산면 신근리의 성태산 남향 계곡이다. 이곳에 은거하던 옛 천주교 신자들이 1866년 홍산 관아에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 이수 처형되었다.
부덕리 : 옥산면 대덕1리의 계곡 마을이다. 이곳은 현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의 산막골과 더불어 황석두 성인이 교우촌으로 형성한 곳이다. 황석두 성인은 자기 양자와 조카를 시켜서 홍산 삽티에 교우촌을 형성하였듯이 여동생 부부를 부덕리에 거주케 하여 그곳 또한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을 형성케 하였다. 거기 살던 신자들 역시 1866년 병인 박해에 의해 순교했다.
위와 같은 외산면 지역의 여러 마을들과 옥산면 지역 역시 ‘삽티’와 ‘도앙골’에 연계한 주요 순례지로 알려져야 한다.
그 외 현 보령시 미산면에 속한 ‘서짓골’과 ‘생계’, 서천군 판교면에 속한 ‘산막골’과 ‘작은재’ 등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생략한다. 사실 이러한 인근의 타 시군 지역 마을들도 옛 홍산 지방에 연계된 천주교회의 역사를 공유한 지역이다. 앞으로 홍산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 순례 코스를 연결 조성해야 한다.
맺는 말 : 홍산 지방의 현 천주교 성지 조성 현황과 그 의의
위에 열거한 홍산 지방의 천주교 교회사 관련 유적지의 성역화 작업은 현재 초기 단계의 매우 미미한 현실이다. 그 가운데 옛 임천군 관할지에 속하는 충화면 지석리에 20여 년 전 홍산 성당의 주도로 작은 필지를 성역화 한 것과, 내산면 금지1리의 도앙골에 조성한 시설은 조악한 실정이다.
충화면 지석리에 조성한 성지는 옛 임천군 지역 출신으로 전주에서 순교한 정문호 성인과 손선지 성인의 기념비 건립이 그 전부이다. 그리고 내산면 도앙골 성지는 2011년에 건립한 작은 기도의 집과 ‘최양업 신부 기념비’가 그 전부이다.
천주교 대전교구는 홍산면 상천리의 ‘삽티 교우촌 성지’를 조성하기 위해서 2013년 초에 부지를 확보하였으나 그 진입로를 개설하지 못하고 있다.
‘삽티 교우촌 성지’는 위에 피력한 바와 같이 천주교회의 전 세계적 추앙 대상인 황석두(루카) 성인의 안장지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지니며, 그곳에 유서 깊은 천주교 교우촌의 역사를 읽을 수 있어서 향후 순례시설을 우선적으로 건립해야 한다. 그리고 아주 가까운 거리의 ‘도앙골 성지’와 연계한 산림 도로의 이용으로 도보 순례 코스를 조성함이 바람직하다.
‘삽티 교우촌 성지’의 진입로 개설을 위한 부지를 2013년 10월에 천주교 대전교구 측이 매입하였으나, 우선 막중한 토목 공사를 계획해야 한다. 이에 따라 용지의 형질 변경 및 설계 허가 절차를 위한 행정 당국의 협조가 필요하며, 가능한대로 한 지역 관광 벨트화의 연계성이 바람직하다.
참고적으로, 부여 일원의 백제 문화권 역사 테마관광 자원과 더불어 천주교 교회사를 테마로 하여 홍산 지역 일원에 전국과 외국의 천주교 신자들을 순례 행보로 유치하여 부여군의 문화유산 고양을 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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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천주교 하부내포성지 전담신부 윤종관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로 243
☎ 041-836-9625 / 010-4745-9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