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허와 19세기 강경
토론자 : 윤종관 신부(토론 시 별도 배포한 자료)
1. 한 세기 이전의 강경을 살펴볼 수 있도록 값진 연구논문을 발표하신 이철성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2. 저는 이 논문을, 김대건 신부 일행의 귀국 당시인 1840년대 중반의 강경이 어떤 곳이었나 하는 점에 관심을 두고 읽었습니다. 김대건 신부 귀국의 해 1845년은 기해박해(1839)가 일어나고 6년(헌종11년) 되던 해입니다. 천주교 박해사에 있어서 병인년 박해에 버금가는 헌종5년의 기해(1839)박해 이후 천주교는 대단히 위축되어 있던 시기입니다. 천주교 신자라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신분이었을 그러한 시기에 외국인 선교사를 포함한 김대건 신부 일행이 강경을 귀국지점으로 삼아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그 여건에 있어서 강경이 적합한 곳이었다는 반증을 가능케 합니다. 금번 차기진 박사의 논문에서(6쪽) 지적했듯이, 그 비밀리 입국하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맞이하여줄 수 있는 천주교 신자들이 강경에는 상당수 거주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강경에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살았던 사실은, 이미 강경이란 곳은 천주교 신자들의 인맥을 형성했던 지역이었음을 역 추정할 수 있습니다. 20여년 후인 1866(병인)년 박해 시에도 남포군(현 보령시)과 홍산군(현 부여군)의 신자들이 강경으로 피신하여 살았습니다. 그 박해 시의 순교자들에 관한 증언자들이 남포와 홍산에서 강경으로 이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한편 그 당시 ‘대도회’를 이룬 강경이었다고 이철성 교수가 밝혔듯이, 밀집다중 속으로 잠입할 수 있는 여건이 가능했던 곳이 강경이었을 것입니다. 박해의 감시눈길을 오히려 인구밀집지에서 용이하게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강경에서 14명이나 되는 김대건 일행을 은밀히 맞이해서 그 인원을 분산하여 머물다 떠나게 하고, 또 김대건 신부로 하여금 상당 기간 차후 활동 대비를 할 수 있도록 유숙케 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페레올 주교를 2개월여 머물게 할 수 있었던 천주교 신자들이 다수 강경에 살았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에 조선교구 제2대교구장 Imbert 주교가 치명하여 4년 동안 공석이던 교구장으로 Ferréol 주교가 1843년 임명되어 중국에서 조선 입국을 시도하다가 김대건 신부 일행의 서해 항해를 통하여 조선의 제3대 교구장으로서 1845년 강경에 입국 부임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2개월여 강경에서 교구장 직무수행을 했다. 그러므로 강경은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부임지’이며 ‘조선교구청’이 있던 곳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3. 그리고 김대건 일행의 귀국선 ‘라파엘 호’가 강경에(혹 황산포)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은, 금강하류가 서해로부터 수월하게 강경포구에 이르는 수로이기 때문이기도 하여 입국 경로로 강경을 선택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수개월여 전에 서울에서 한강을 빠져나갔던 ‘라파엘 호’가 다시 한강을 통하여 입국한다는 것은 발각될 위험 부담이 컸을 것으로 당시 입국자들이 편지에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금강을 통한 강경에로의 경로 선택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귀국항해 중 제주도에 표류하기도 했던 그들이 지칠 대로 지친 상황에서 금강하류는 수월하게 내륙 깊숙이 들어올 수 있는 수로였습니다. 전국의 큰 강 중에서 서해로부터 내륙에 들어오기 가장 수월한 강이 금강이었습니다. 금강 하류는 넓은 하폭에 하도변경이 적고 암초가 거의 없는데다가 곡류에 따라 바람과 조수간만을 활용하면 수월하게 강경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배들이 서해로부터 수시로 드나들던 강경이었습니다. 오랜 항해와 표류에 지친 김대건 일행은 폐선 지경에까지 이른 ‘라파엘 호’로 그런 금강을 거슬러 올라 많은 선박 틈을 따라 강경에 당도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저는 추측합니다.
4. 그리고 가장 수월하게 내륙 깊숙이 들어올 수 있는 금강의 결절(結節)점이 강경이었다는 이철성 교수의 지적은 매우 중요합니다. 수운의 규모와 편의에 따라 구분해서 보자면, 금강 하류와 상류의 결절지역이 강경입니다(나도승, 금강수운의 변천에 관한 지리학적 연구, (1980논문집) 217쪽 참조). 큰 배가 강경까지 들어올 수 있었고 상류와 지류로 작은 배가 올라가기는 강경에서부터였습니다. 그래서 김대건 일행이 강경에 도착한 직후(다음날) 동행인 중 다블뤼 신부가 신자들의 은거마을인 공동(현 부여군 은산면 거전리)에 조선어 연마를 위해 떠난 길은, 강경에서 부여까지의 금강에 이어서 지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뱃길이 아니었을까 저는 추측합니다.
5. 그런데, 김대건 일행의 선박이 접안한 지점이 오늘날 강경의 어느 곳에 해당 되는가? 이것을 확실하게 밝혀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차기진 박사의 연구는 ‘강경이 황산 동네’라 한 증언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강경이의 황산 동네’는 과연 오늘날의 어느 곳입니까? ‘황산포’, ‘황산포구’, ‘황산’, ‘황산리’ 등의 명칭들이 있습니다만, 이러한 명칭 말고 그냥 ‘강경’ 혹은 ‘강경이(갱갱이)’, ‘강경포’, ‘강경포구’ 등이 앞의 ‘황산’과 어떤 연관점으로 김대건 일행의 상륙과 관련하여 거론되고 있는가? 이러한 점들에 대해서는 아직 확정적 연구 실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이철성 교수 연구논문에 18-19세기 강경포와 황산포에 관한 자세한 파악이 있습니다만, 김대건 신부의 상륙 지점 고증의 연구는 아닙니다.
6. 더불어 강경에 대하여 아주 중요한 후속연구가 요청됩니다. 그것은 현재 성지로 잘 알려진 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의 ‘나바위’와 관련하여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할 과제입니다. 박해시기 후 강경 지역에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자리 잡은 1897년도 이후와 관련되어 역사가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1897년 사목구획(본당)이 도계와 관련 없이 설정되어 사목자(신부)가 부임하여 활동하던 중, 1911년 교구 분할시 부터 혼란이 야기되고, 1955년 나바위에 ‘복자 안드레아 김 신부 순교비’를 제막함으로써 현재까지의 왜곡이 진행되어온 것입니다.
1897년 강경의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베르모렐 신부가 부임 직후 강경포의 저지대 상업지를 피하여 고지대(강경대) 옥녀봉 중턱의 사유지 밭 1필지를 매입한 후 추가로 성당 부지를 마련하던 중 요행히 현 화산리(전북 망성면 나바위)의 넓은 폐가를 매입하여 자리 잡은 것이 사실상의 ‘강경 지역 성당’입니다. 그리고 베르모렐 신부가 연루된 1899년의 ‘강경 천주교 교안 사건’이 말해주듯, 화산리 성당은 당시 천주교 조선교구의 사실상 ‘강경 본당’이었습니다. 그 후 1911년 조선교구가 경성교구와 대구교구로 분리될 당시 충남-전북의 도계에 따라 교구경계가 획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경성교구에 속하는 충청 남부 지역 논산-강경은 공주 본당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강경의 신자들은 거리상 가까운 화산의 나바위 성당에 의존했습니다. 그 후 1921년 경성교구의 논산 본당 설립과 더불어 강경의 신자들은 논산 본당의 강경공소에 속하였습니다. 충남에 속한 논산-강경은 경성교구에 속하며, 그에 따라 강경의 신자들은 논산 본당의 강경공소 신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상 가까운(2㎞ 정도) 대구교구 화산 성당에 다니는 편의적 습관이 있었다가, 1946년에 당시 서울(경성)교구는 강경에 논산 본당으로부터 분리 독립본당을 설립하였습니다. 그 후 1948년에 충남지역의 대전교구가 서울교구로부터 독립됨으로써 현재 대전교구 강경 본당인 것입니다.
위와 같은 사실을 재인식함으로써 김대건 신부 입국지점과 관련한 강경의 역사를 바로 하여, 강경 근대사에 따른 강경의 명예를 되찾아야, 강경역사문화의 긍지가 보전 될 것입니다.
첫댓글 강경의 역사가 바로잡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