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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의 19세기 역사지리학적 연구(이철성 교수)에 대한 토론문안
하부내포성지 전담신부 윤종관
1. 금번 이철성 교수의 연구논문에 의하여 18-19세기 강경 지역과 포구 및 시장의 실상(1세기 이전의 강경)을 접하게 되어 매우 감사한 일이다. 조선조후기 강경 지역의 경제사회적 및 문화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값진 연구라고 본다.
2. 이 귀한 논문을 읽는 중에 토론자로서 본인은 성 김대건 신부의 강경 상륙 시점인 1845년 10월과 관련한 그 전후시기에 해당되는 내용만을 제한적으로 주목하였다. 그 이유는, 김대건 신부 일행의 강경 상륙 배경에는 박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 지역에 천주교 신자 공동체가 비밀리 존재했음을 역사적 사실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해시기 후(개항 이후) 강경 지역 천주교 사목자(신부)의 최초 부임으로써 기록 된 공식적인 지역교회의 역사에 대하여 향후의 토론을 제안하고 싶다.
3. 본 논문은 ‘조선후기 지리지와 고지도 및 요고(要攷)를 활용하여’ 19세기의 강경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시도’함에 있어, 1910년대의 ‘민적자료(民籍資料)와 각종 조사보고서(調査報告書) 및 지적원도’를 이용하여 이 지역의 19세기 역사지리적 상황을 역추정하는 연구이다. 이러한 연구로써 강경포와 강경시장의 위치 및 특징, 그리고 그 지역 민가 상황에 비추어 성 김대건 신부 일행의 입국 후 머물렀던 장소(유숙지)의 입지조건을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저자는 판단하고 있다. (주1)
4. 강경은 금강 지류유역 내륙수운과 해운과의 결절점에 위치했다는(주2) 저자의 지적이 있듯이, 강경포구는 서해로부터 내륙 깊숙이 선박이 수월하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다. 이러한 강경에서 금강의 서해합류점 군산까지의 하구간은 수로 37㎞인데 하폭이 크며 조고는 평균 3m, 수심 5∼6m이고 암초가 별로 없고 하도변경이 적어서, 전국의 큰 강 하구에 비하면 선박 운항이 가장 수월했다.(주3) 그리고 조류와 바람을 이용하면 운항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주4) 그러한 강경포가 있던 김포면은 인근 타 지역에 비하여 인구가 많았으며 계속 증가하였다고 이철성 교수는 밝히고 있다.(주5) 더불어 서해와 내륙 지류 간 용이한 수운의 덕으로, 물산 집산지로 각광을 받던 ‘강경포’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관하여 18세기 은진현 인구 현황에 대한 자료 제시(주6) 및 택리지와 여도비지를 근거로 한 당시 강경의 번창 면모를 추론하고 있다.(주7) 그러한 강경에는 이미 조선조전기부터 세창이 존재하여 서울로의 조운 사실을 1759년도(영조 35) 강경포의 세곡선 하역 기록으로 증명하고 있다.(주8) ‘선박이 모여들고 자유롭게 운반되는 금강의 대도회’(주9)라 평가된 강경포이다.(주10)
이러한 강경은 개항기 이전부터(주11) 대외무역의 터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주12) 즉, 서해를 통한 해외로의 진출 거점이 금강 하류 지역이었고 그 주요 지점이 ‘강경포구’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을 감안하여 추정할 수 있는 바, 중국에서 출발한 김대건 일행의 귀국선 항로를 금강하구로 하고 강경을 목적지로 하였음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이 단순히 풍랑을 피하거나 혹은 어디인지 모르는 상태로 우연히 들어온 것이 아니라, 서해에서 조선 반도의 내륙 깊숙이 항해하여 들어올 수 있음을 김대건은 미리 숙지했었다고 단정할 수 있다.
5. 그러나 이러한 ‘강경포’에 대비하여 거명되는 <‘황산포’는 무엇인가>를 토론함이 김대건 신부 일행의 상륙 입국과 관련한 관심사항이다. 논문이 밝히고 있는(주13) 금강하류의 여러 포구 중에 ‘강경포의 유통 독점을 방해하고 있던 황산포와 나암포’가 거명되고 있다. 이미 1739년(영조15) 나암포의 선박 세금수취 시도 사실, 그리고 1839년(헌종5) 나암포와 강경포의 유통분쟁 기록과 더불어 황산포 역시 강경포의 경쟁지임을 밝히고 있는 저자는 논문의 3장 ‘강경포구의 역동성과 김대건 유숙지의 입지 조건’에서(주14) 특별히 황산포의 당시 실상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강경포와 황산포의 분쟁은 더욱 흥미롭다”는 저자의 지적처럼(주15), <요고>에 의해서 전해지는 황산포의 생생한 모습에 대한 관심을 기우리고 싶은 이유는, 김대건 신부 일행이 은밀히 상륙한 지점을 ‘강경이 황산 동네’라 한 증언이(주16)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증언이 중요하다는 까닭은, 전북 익산군 망성면 화산리의 ‘나바위’라는 곳을 지금까지 김대건 신부의 상륙지점으로 여겨온 바에 대한 재고를 촉구하려는 때문이다. 그렇다면 ‘황산 동네’는 어디인가? 이에 대해서는 금번 차기진 박사의 연구 내용에 의하여(주17) 제기되는 질문이다.
6. 이철성 교수는 논문에서 <요고>가 전하는 당시 사정에 대한 서술을 통하여 강경포와 황산포 사이의 상업적 갈등 관계를 밝히고 있다. 이에 덧붙여 토론과 연구를 이어가야 할 과제로는, 양 포의 당시 지리적 환경과 주민들의 주거상황을 알아보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김대건 일행이 타고 온 선박(라파엘 호)의 접안지점과, 상륙 후 어떤 장소(가옥)에 머물고 상당 기간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추정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7. 김대건 일행은 총 14명이었다. 서양인 2명(J. Ferréol 주교, A. Daveluy 신부)과 김대건 신부 및 동행 승선원 11명이 하선하여 발각 되지 않게 행동할 수 있을만한 선박 접안지점 및 상륙 후 이동과 숙식이 가능한 통로와 가옥들이 어디였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하여 간과할 수 없는 점은, 그 많은 인원이 조밀한 상업 지역이었을 강경포에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하선하여 황산포 지역에 상륙한 다음의 행동조처를 할 수 있을만한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이미 산개하여 여러 집으로 나뉘어 들어갈 방도를 찾았을 것을 추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황산포와 강경포에 그들이 숨어 들어갈 수 있는 천주교 신자들의 집이 여럿 있었을 것으로 추정 된다.(주18)
8. 그리고 이른바 ‘김대건 신부 유숙지’에 대한 관심연구와 더불어, 김대건 신부 일행의 ‘라파엘 호’가 세인들의 눈길을 피하여 접안할 수 있었던 곳이 과연 어느 지점인가 하는 논의는 더욱 중요하다. 그 이유는, 천주교 자체 내에서 김대건 신부 상륙지점에 관한 확실한 연구가 없음으로 해서 강경의 지역교회사까지 왜곡 되고 있기 때문이다. 박해 후, 실제로 강경에 사목자가 공식 부임한 1897년 직후 강경대(옥녀봉)에 성당 부지 확보를 시도하며(주19) 사목을 시작하였다. 강경의 본당사는 그래서 1897년으로 소급 기록되어야 한다.(주20)
9. 토론자로서 위 8항까지 진술한 내용은, 거시적으로 강경의 역사문화적 통찰을 이 지역 천주교 역사의 상황과 연계하여 연구와 토론으로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제시한 것이다. 김대건 신부 일행의 강경 상륙에 관한 연구는 단순히 천주교만의 관심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다. 김대건 신부 일행이 왜 강경으로 입국 경로를 택하였는지, 그 이유는 강경이라는 곳이 당시 사회-지리적으로 어떤 곳이었기에 그러했는가 하는 연구의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주21)
이철성 교수의 금번 논문은 18-19세기와 20세기 전반기 강경 지역의 지리-역사적 연구서이다. 이러한 연구 성과는 강경의 문화사적 위상을 알리는 계기가 된다. “강경은 어떠한 곳이라서 그러한가?”에 대한 강경민들의 자긍심을 일깨우기도 한다. 강경민들의 자긍심 안에 천주교 역사의 색깔이 함께 들어있다. 이른바 ‘근대 문화 역사의 강경’, 그것을 개항기 이후와 일제강점기(20세기 전반기)의 유적에 특성적 관점을 집중하여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반면, ‘조선조의 강경 역사’, 그 중에 19세기의 강경에서 천주교와 관련된 역사를 인식함은 강경의 당연한 자긍심이다.
그러한 강경의 조선조 말엽 역사에서 천주교와 관련된 대표적 사실(史實)에 대해서는 김대건 신부 일행의 강경 상륙 및 유숙의(주22) 유적과 강경교안 사건을 들어 말할 수 있다.
10. 박해시기 후 1897년 강경 지역 최초의 사목자로 부임한 베르모렐(Vermorel) 신부가 공식적 천주교 사목구(司牧區)의 본부를(주23) 은진현 강경(옥녀봉 기슭)에(주24) 자리 잡도록 시도하다가 인근 황산포 너머의(주25) 전북 화산리에 요행히 옮기게 되어 앞의 ‘주19-20’의 역사적 사연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1911년 천주교 조선교구가 2개로 분리되기 이전까지 망성면 화산리에 ‘본당’을 둔 천주교는 ‘강경성당’으로 불려졌다. 조선교구가 경성교구와 대구교구로 분리된 후 도계를 기준으로 하여 전북 지역은 대구교구에 속하게 된다.
이러한 교구 분할에 의하여 강경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혼란이 오게 되었다. 경성교구에 속한 충남 지역의 강경 신자들은 도계 너머 대구교구 지역의 성당이 거리상 지척이고 그간 그곳의 ‘본당’소속 신자들이었다. 그러나 논산-강경 일원의 천주교 신자들은 행정상 경성교구의 공주 본당 관할의 신자들이었다. 10년 후 1921년에 논산 본당이 설립된다. 그럼으로써 강경의 신자들은 논산 본당의 공소 신자들로 교회행정상 분류된다. 그리고 1946년 8월에 강경읍에 본당이 설립 된다. 이어서 1948년에 경성교구로부터 충남 일원이 대전교구로 분립된다. 그럼으로써 대전교구 소속의 현재 강경 본당이다.
11. 이러한 강경지역의 천주교 1세기 간 역사 기록에 있어서, 즉 한국천주교 대전교구 내 본당 설립 역사에 있어서, 논산 본당과 강경 본당의 분립도표에 위 10항의 내용이 간과-왜곡되어 있다.(주26) 금번 연구토론을 기화로 하여 왜곡을 바로잡는 후속 연구를 기대한다.
12. 성 김대건 신부 일행(사실은,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 부임 일행’이라 해야 함)의 강경 도착점은 현재의 ‘나바위’가 아님이 분명하다. 강경이다. 그러나 또한 현재의 강경읍내의 어느 지점을 ‘황산 동네’라고 증언한 곳인지 확실한 고증이 요구된다. ‘황산포’, ‘황산포구’, ‘황산’, ‘황산리’ 등의 명칭과 장소를 확실히 구분 고증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김대건 신부 도착지로서의 강경 역사를 확정적으로 기록하여 왜곡된 ‘나바위’의 내용을 바로 잡아야 한다. 1897년 사목구획(본당)이 도계와 관련 없이 설정되었다가 1911년 교구 분할시 부터 혼란이 야기되고, 1955년 나바위에 ‘복자 안드레아 김 신부 순교비’를 제막함으로써 현재까지의 왜곡이 진행되어온 것이다.(주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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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이철성 논문 2쪽에 저자 지신이 그 연구방법론을 밝히고 있음.
(주2) 이철성 논문 3쪽 : 강경포와 그 상류의 여러 포구에 관한 저자의 지리 파악임. (주3) 나도승, 금강수운의 변천에 관한 지리학적 연구, 1980(논문집 ‘공주 금강권의 역사 지리’), 219쪽 참조.
(주4) 나도승의 위 논문 213쪽 : “금강은 군산항에서 조류가 1시간 4절이므로 한강에 비하면 완속이며 입조시에는 약 6시간, 출조 시에는 약 5시간을 요하게 된다. 선박은 출입조를 이용하면 매우 편리하며 구조곡간의 곡풍을 이용하면 주행시간은 더욱 단축된다. 또 하안은 암초가 적은 편이어서 대소 선박의 안전운행을 할 수 있게 한다.”
(주5) 이철성 논문 4쪽 참조.
(주6) 이철성 논문 5 <표 1> 및 <표 2>
(주7) 이철성 논문 6쪽 참조.
(주8) 이철성 논문 7-8쪽 참조.
(주9) 이철성 논문 7쪽에 이렇게 대동지지를 인용하였음.
(주10) 논산시지 2편 역사와 문화유적(2005), 219쪽 참조.
(주11) 이미 고대의 사비시대 백제는 이 금강 하류를 통하여 해양 진출을 도모하였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조수간만의 영향, 즉 항행의 여건은 부여에까지 미친다.(나도승, 금강수운 하항시장권의 변천에 관한 연구, 위 논문집 264-268 참조)
(주12) 나도승, 금강수운 하향시장권의 변천에 관한 연구-하항 취락 성쇠를 중심으로-1981(논문집 ‘공주 금강권의 역사 지리’), 255쪽 참조.
(주13) 이철성 논문 13-14쪽 참조.
(주14) 이철성 논문 24-26쪽.
(주15) 이철성 논문 26쪽.
(주16)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 회차 100(1886.11.3), 최 베드로의 증언
(주17) 차기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일행의 1845년 입국 장소와 강경 유숙지 연구, 2-2) ※특히 7-8쪽 참조.
(주18) 차기진 박사는 연구 논문에서 “강경에 믿을 만한 신입 교우들이 있었으므로” 김대건 일행이 목적지를 은진 강경으로 결정했다고 단정하고 있다(차기진의 논문 6쪽).
(주19) 강경의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베르모렐 신부는 강경 옥녀봉 중턱의 사유지 밭 1필지를 매입한 후에 옆의 국유지를 추가 매입 추진 중에 망성면 화산리의 폐가를 적절히 매입할 수 있어서 현 나바위 성당 구옥과 부지를 기초로 하고 강경 지역 사목을 하던 중, 1899년 강경 천주교 교안 사건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주20) 박해시기가 지난 1897년 강경 지역의 사목자로 부임한 베르모렐 신부가 강경포 저지대의 상업지를 피하여 고지대 옥녀봉 중턱에 성당 부지를 마련하던 중 요행히 현 화산리(전북 망성면 나바위)의 넓은 폐가를 매입하여 자리 잡은 것이 사실상의 ‘강경 지역 성당’이다. 1899년 ‘강경 천주교 교안 사건’이 말해주듯, 화산리 성당은 당시 천주교 조선교구의 사실상 ‘강경 성당’이었다. 그 후 1911년 조선교구가 경성교구와 대구교구로 분리될 당시 충남-전북의 도계에 따라 교구경계가 획정되었다. 그러나 당시 경성교구에 속하는 충청 남부 지역 논산-강경은 공주 본당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강경의 신자들은 거리상 가까운 화산의 나바위 성당에 의존했다. 그 후 1921년 논산 본당 설립과 더불어 강경의 신자들은 논산 본당의 강경공소에 속하였다. 충남에 속한 논산-강경은 경성교구에 속하며, 그에 따라 강경의 신자들은 논산 본당의 강경공소 신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상 가까운(2㎞ 정도) 화산 성당에 다니는 편의적 습관이 있었다가 1946년에 당시 서울(경성)교구는 강경에 논산 본당으로부터 분리 독립본당을 설립하였다. 그 후 1948년에 충남지역의 대전교구가 서울교구로부터 독립됨으로써 현재 대전교구 강경 본당인 것이다.
(주21) 김대건 일행의 입국 경로를 한강 서울이 아닌 금강의 강경으로 변경한 이유 : 차기진 논문 3-4쪽 참조.
(주22) ‘유숙(留宿)’이라 함은 그저 잠시 묵고 간 사실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금번 차기진 박사의 연구 논문에서 밝혀졌듯이, 천주교 박해 시 조선교구의 제3대 교구장으로 부임하던 페레올 주교가 강경으로 입국한 후 상당 기간(2개월여) 강경의 신자 공동체 안에 머무르며 교구장 직무수행을 했다. 그러한 교구장 직무수행을 가능케 하도록 김대건 신부가 조처를 취했던 곳을 ‘유숙지’와 관련하여 역사적 의의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가 강경에서 한 동안 머무르며 한양으로 올라갈 선박을 매입한 과정을 비추어 보면, 여기서 주민들과의 상거래 접촉 및 상황 적응을 한 것을 유추할 수 있기에 그 시기 강경 항(포)구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강경은 당시 ‘대도회’를 이룬 곳으로서 그 밀집다중 속에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의 감시를 피하면서 비밀 공동체를 형성하여 교구장의 임시 집무처(임시 교구청)를 제공할 수 있었다는 점을 충분이 추정할 수 있다.
(주23) ‘지역 사목구’의 본부를 한국천주교회의 공용어로는 ‘본당(本堂)’이라 한다. 라틴어로 parochia, 영어로 parish라 한다. 그리고 그 원거리의 예속 공동체를 ‘공소(公所)’라 한다. secondary station이라는 뜻이다.
(주24) 당시 충남 은진현 김포면 강경대, 현 충남 강경읍의 옥녀봉.
(주25) 당시 전북 여산부와의 경계선 너머.
(주26) 대전교구 본당 분리도 참조.
(주27) 차기진은 금번 논문에서 이를 지적하고 있다(논문의 15쪽 맺음말과 16쪽 부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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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선교구의 제3대 교구장으로 부임하던 페레올 주교가 강경으로 입국한 후
상당 기간(2개월여) 강경의 신자 공동체 안에 머무르며 교구장 직무수행을 했다.>
김대건 신부 일행이 입국한 후에 강경지역에서 유숙한 사실이 중요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