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짓골에서 오우라까지
하부내포성지에서 기획하고 편성한 나가사키 순례단이 드디어 9월 26일에 출발합니다.
출발지는 서짓골 성지 입니다.
목적지는 오우라 천주당 입니다.
병인 순교 150주년의 하부내포성지 특별 계획으로 역사의 여정이 되는 순례입니다.
병인(1866)년에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성인 4위의 유해가 일본 나가사키에 모셔졌던 역사적 사실을 되새기는 순례여정입니다.
갈매못의 순교성인 유해를 서짓골에 1866년에 안장했다가,
그 유골을 1882년에 일본으로 옮겨 모셨던 사연을 회상하여,
그 경로를 따라 순례자 86명이 나가사키에 가게 되었습니다.
순례단은 대전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님의 인솔 지도로 이 여정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9월 29일(목요일) 오전 11시에 오우라 천주당에서 병인순교성인 유해안장 기념비 제막식을 올리게 됩니다.
나가사키 대교구와 나가사키현 정부와 대전교구가 함께 그 제막식을 하게 됩니다.
그 제막식 현장에서 유흥식 주교님께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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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순교성인 4위 기념비 나가사키 오우라 천주당 제막기념사
1. 조선의 가톨릭교회는 그 설립과 동시에 박해를 받기 시작하여 100년 동안 헤아릴 수 없는 순교자들을 배출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가혹하고 대규모적인 박해는 1866년을 기점으로 10여 년 동안 1만 여명이 순교한 병인박해였습니다. 그 병인박해 동안에 가장 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한 지방은 현 대전교구인 충청도 지방입니다. 당시 충청도 지방은 조선교구 내에서 가장 가톨릭 신자가 많던 곳입니다. 마치 일본 교회사에서 나가사키 지역이 복음을 가장 먼저 받아드리고, 가톨릭 신앙이 가장 많이 뿌리내림으로써 순교자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듯이, 조선의 충청도가 그러했습니다. 충청도의 큰 고을들에서는 박해령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가톨릭 신자들이 처형당했는데, 그 중에서 해안 보령의 충청수영(옛 해군기지)은 교회의 주요 인물들을 처형하는 장소였습니다.
2. 그 충청수영의 사형장은 ‘갈매못’이라 일컬어지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당시의 조선교구 제5대교구장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와 선교사 2명과 평신도 지도자 2명이 1866년 3월 30일(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동시 순교하였습니다. 그 5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한 후 인근에 살던 신자들이 그분들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안장해드린 곳이 ‘서짓골’이라는 곳입니다. 당시의 신자들이 가혹한 박해를 피하여 숨어살던 곳은 충청도의 험준한 산간지역이었습니다. 일본 교회의 3백년 박해기간 동안 나가사키 지역의 이키츠키와 고토 혹은 소토메 지역에 신자들이 비밀리 신앙을 지키며 살던 것처럼, 조선의 박해기간 동안 신자들은 주로 충청도의 산간지역에 숨어살았습니다. 그러한 충청도의 비밀 신자촌들이 분포한 지역이 ‘하부내포’입니다. 그 ‘하부내포’의 한 산골 마을이 ‘서짓골’입니다. 그 ‘서짓골’에 숨어살던 신자들이 병인년 3월에 ‘갈매못’에서 순교한 분들의 시신을 안장했는데, 그 일로 말미암아 그곳 신자들 또한 체포되어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3. 그 참혹한 병인박해의 광풍이 어느 정도 소강상태이던 1882년에 ‘서짓골’에 묻혀있던 순교자들의 유해를 수습하여 여기 일본 나가사키의 오우라 천주당에 옮겨 봉안하게 되었습니다. 그 ‘서짓골’의 신자들이 순교함으로써, 그곳 순교성인 무덤을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 유골들을 수습하였습니다만, 당시 조선에서는 따로 모셔둘 곳을 마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순교성인들의 유골은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와 베드로 오매트로 신부와 루카 위앵 신부와 요셉 장주기 회장의 것입니다. 이러한 4명의 순교자 유골을 오우라 천주당에 보내드리고 모시는 일을 합의한 분들은 당시의 조선교구 재7대교구장 블랑 주교와 나가사키 교구장 프티장 주교였습니다.
4. ‘서짓골’의 순교자 유해를 받아 모신 나가사키의 프티장 주교로부터 또한 불랑 주교가 1883년에 주교성품을 받았습니다. 여기 오우라 천주당에서 그렇게 조선교구 제7대 교구장이 주교성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2년 후 1894년에 나가사키 교구는 조선교구에 그 순교자 유골을 반환해드렸습니다. 그러한 조선교회와 나가사키 교구와의 관계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여기 오우라의 라틴 신학교에 조선의 신학생들이 유학하여 성소를 키웠고, 조선교회가 필요로 하는 교리서 등을 나가사키에서 인쇄하기도 했습니다.
5. 그 엄혹했던 시대에 이러한 일련의 조선교회와 나가사키 교구와의 인연이 맺어진 까닭은, 파리외방선교회의 선교사들이 양국 교회의 선교일선에 투신했던 덕분입니다.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중국 땅을 조선 선교의 중간거점루트로 삼아오다가, 일본의 나가사키에서 투신하던 동료선교사들과의 협조관계로 여기 오우라 천주당에 조선교회를 위한 중간루트를 옮겨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인연을 오늘 여기에 조선교구 1866(병인)년 순교성인 유해봉안기념비 제막을 통하여 후대에 알리고자 합니다.
6. 이러한 역사적 기념비 건립을 윤허해주신 나가사키 대사교구장 요셉 ‘미츠아키 타카미’(高見三明) 대사교님과, 그 건립을 허가해주신 나가사키 현 ‘나카무라 호도’(中村法道) 지사님과 나가사키 시 ‘다우에 토미히사’(田上富久) 시장님께 한국 가톨릭교회를 대표하여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 건립과정의 모든 실무를 맡아 수고해주신 나가사키 세계유산 추진센터 이사 ‘노부토시 사카에’(榮信歲) 상과 나가사키 외국어대학 교수 ‘미야자키 요시노부’(宮崎善信) 상의 공로를 치하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더불어 그 모든 과정에 수고해주신 나가사키 시 관계 인사들과 나가사키 대사교구의 관계 인사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가사키 현과 나가사키 시의 무궁한 발전을 하느님 대전에 기원하며, 나가사키 대사교구에 더욱 충만한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하느님께 간구합니다. 한국과 일본의 모든 순교자들의 영광을 드높이며, 순교로 증거 한 신앙을 이어받는 한일 양국교회를 하느님께서 더욱 축복하시도록 우리 한국 순교성인들과 일본의 모든 순교성인 순교복자들이 전구해주시기를 빕니다.
2016년 9월 29일 오전11시
한국 가톨릭 대전교구장 라자로 유흥식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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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유흥식 주교님 연설의 일본어 번역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丙寅殉教聖人4位記念碑長崎大浦天主堂除幕記念辞
1.朝鮮のカトリック教会はその設立と同時に迫害を受け初め、100年間数えきれないほどの殉教者を輩出しました。そのうち一番過酷で大規模の迫害は1866年を起点に10年間1万人余りが殉教した丙寅(ビョンイン)迫害でした。その丙寅迫害の間一番多くの殉教者を輩出した地方は現大田(テジョン)教区である忠清道(チュンチョンド)地方です。当時、忠清道地方は朝鮮教区で一番カトリック信者が多かったところです。まるで日本教会史の中で、長崎地域が早くから福音を受け入れて、カトリック信仰が根ざし、多くの殉教者を輩出したところであったように、朝鮮の忠清道もそうだったのです。忠清道の大きな村は迫害令によって持続的にカトリック信者が処刑されましたが、特に保寧(ボリョン)の忠清水営(昔の海軍基地)は教会の主要人物を処刑する場所でした。
2.忠清水営の死刑場は「カルメモッ」というところです。そこで当時の朝鮮教区第5代教区長アントニオ・ダブリュー司教と宣教師2名と信徒指導者2名が1866年3月30日(聖金曜日)に殉教しました。その5名の教会指導者たちが殉教した後、近隣の信者たちが遺体を収拾し、安葬した場所が「ソジッゴル」でした。そこは当時の信者たちが過酷な迫害を避けて隠れていた忠清道の険峻な山間地域でした。日本教会が3百年間も迫害が続いた時、長崎地域の生月や五島、外海地域の信者が秘密裏に信仰を守ってきたように、朝鮮教会も迫害の間、信者たちは主に忠清道の山間地域に隠れて生活していたのです。そのような忠清道の秘密信者村が分布する地域が「下部内浦(ハブネポ)」です。この「下部内浦」の一つの村が「ソジッゴル」です。「ソジッゴル」に隠れて住んでいた信者たちが丙寅年(1866)3月に「カルメモッ」で殉教した方々の遺体を安葬したが、そのことが発覚され、そこの信者たちも逮捕されて殉教しました。
3.その残酷な丙寅迫害の狂風がある程度小康状態となった1882年、「ソジッゴル」に葬られていた殉教者たちの遺骨を収拾し、ここ日本の長崎の大浦天主堂に移して奉安します。「ソジッゴル」の信者たちが殉教したことによって、殉教聖人たちの墓を世話する人がいなかったので遺骨を収拾しましたが、当時朝鮮にはそれを奉安する場所がなかったからです。その殉教聖人たちの遺骨はアントニオ・ダブリュー司教、ペトロ・オメトル神父、ルカ・ウィエン神父、ヨセフ張周基会長のです。4名の殉教者の遺骨を大浦天主堂に送って安葬することに合意したのが朝鮮教区第7代教区長ブラン司教(当時は神父)と長崎教区長プチジャン司教でした。
4.「ソジッゴル」の殉教者の遺骨を受け取った長崎のプチジャン司教からブラン司教は1883年に司教叙階を受けます。ここ大浦天主堂でそうやって朝鮮教区第7代教区長が誕生したのです。それから12年後1894年長崎教区は朝鮮教区に殉教者の遺骨を返還しました。その後、朝鮮教会と長崎教区の関係は続きます。ここ大浦のラテン神学校で朝鮮の神学生たちが留学して召命を育てましたし、また朝鮮教会が必要としていた要理書などを長崎で印刷することもありました。
5.厳酷な時代にあって、朝鮮教会と長崎教区が縁を結ぶことができたのは、パリミッション会の宣教師たちが両国教会の宣教に身を投じていたおかげです。パリミッション会の宣教師たちは中国を朝鮮宣教の中間拠点ルートとしていたが、日本の長崎で宣教していた同僚宣教師たちとの協力関係で、ここ大浦天主堂に朝鮮教会のための中間ルートを移してきたのです。このような歴史的な因縁を今日ここで朝鮮教区丙寅年(1866年)殉教聖人遺骸奉安記念碑除幕を通して後世に伝えたいと思います。
6.この歴史的な記念碑建立を允許してくださった長崎大司教区長ヨセフ高見三明大司教様、建立の許可をしてくださった長崎県知事中村法道様、長崎市長田上富久様に韓国カトリック教会を代表し心から感謝申し上げます。そして建立過程の実務をしてくださった長崎世界遺産推進センター企画部長榮信歳様と長崎外国語大学教授宮崎善信様の功労を称賛し、感謝いたします。また、そのすべてにおいて協力してくださった長崎市関係者の皆様、長崎大司教区の関係者皆様にも感謝いたします。長崎県と長崎市の限りない繁昌を祈り、長崎大司教区に神様の豊かな恵みがありますよう祈ります。韓国と日本のすべての殉教者たちの栄光を称え、殉教で証した信仰を受け継ぐ日韓両国教会を神様が祝福してくださいますよう、殉教者の取り次ぎを願います。
平成28年9月29日午前11時
韓國カトリック大田教区長 ラザロ ユ・フンシク 司教
위와 같은 오우라 천주당의 병인수교성인 기념비 제막식을 올리기까지 아래와 같은 여정으로 순례단이 출발합니다.
나가사키 순례 및 오우라 천주당 기념비 제막식 일정표
하부내포성지 주최 2016년 9월 26-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