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는 폐사지를 통해 입지의 불리한 지형을 살펴보았는데, 이번에는 천년 고찰을 통해 좋은 입지는 어떠한 곳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한반도에는 불교가 전해진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17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사찰이 명멸해 갔지만 병화를 입지 않고 온전히 유지되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 사찰의 입지를 통해 온고지신의 지혜를 배우고자 한다. 이를 통해 작게는 개인의 집터를 정할 때 활용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공공건물의 입지를 정할 때 참고할 수 있으며, 크게는 도시계획 등에 접목할 수 있게 된다.
천년고찰은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합천 해인사, 고창 선운사, 공주 마곡사이다.
영주 부석사
봉황산(818m) 자락에 자리한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676년)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곳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 의상대사를 보호하였다고 한다.
의상대사가 이곳에 절을 지으려할 때 도적떼가 절을 짓지 못하게 방해를 하자 선묘가 큰 바위로 변해 공중에 떠있는 모습으로 위협하여 물리쳤다고 한다. 그 후 선묘바위는 무량수전 뒤에 자리했으며, 그 바위에는 浮石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1376년에 지은 목조 건축물로 대한민국의 국보 제18호이다. 경북 안동의 봉정사와 함께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봉황산 정상부터 이어진 산줄기 끝에 자리했다. 풍수에서 산줄기는 용맥이라 하는데, 주산의 기운을 혈처까지 공급해주는 탯줄과 같은 역할이다. 그러므로 입지에서 용맥이 이어졌는지 여부는 터를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 이때 나무의 꽃과 열매가 가지 끝에 열리듯 혈 또한 산줄기 끝에서 맺히는 법이다.
무량수전은 봉황산 중심맥으로부터 역동적인 모습으로 이어지다 부석사 뒤편에서 좌우를 날개를 벌려 포근히 감싸주는 곳에 자리했다. 멀리서 바라본 부석사 지형은 오목한 제비둥지 같은 와혈이 되었다.
와혈은 바람을 막아주기에 최적이니 편안한 입지가 되어 예로부터 가장 선호하는 명당의 형태다.
한편 가람배치를 보면 무량수전 좌향은 부속건물 등과 확연히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무량수전은 단아한 안산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데, 안산은 사랑스런 부인에 비유한다.
이곳에서 눈을 돌리면 백두대간의 수많은 봉우리가 펼쳐져 보이는 화려한 조망이지만, 무량수전은 오로지 한 여인만을 바라보는 모습이니 지고지순한 사랑의 모습이다. 그리고 귀부인은 무량수전을 대한민국 최고의 사찰이 되게끔 내조하고 있으니 현모양처의 모습이다.
만약 무량수전이 단아한 안산을 바라보지 않고 화려한 조망을 보았다면 지금과 같은 국보급 사찰은커녕 평범한 사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부석사 무량수전의 현재와 같은 고귀한 품격은 오로지 안산의 덕분이니 새삼 좌향의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부석사 관계자는 작은 건물 뒤편의 나무가 여름이면 잎이 무성해서 안산을 가리는데, 나무를 옮겨 심던가 아니면 가지를 쳐서 안산이 잘 보이게 해 줄 필요가 있다. 무량수전은 안산으로 인해 더욱 빛이 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안동 봉정사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때(672년) 능인대사가 종이로 봉황을 만들어 날렸는데, 종이 봉황이 내려앉은 곳에 절을 지은 것이 지금의 봉정사(鳳停寺)다. 봉정사 극락전은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국보 제15호이다. 대웅전 또한 최근에 극락전보다 오래된 것이라는 문서가 발견되어 국보(제311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고려 태조 왕건이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으며, 1999년에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도 방문한 바 있다.
부석사와 마찬가지로 천등산(575m) 정상부터 이어진 산줄기 끝에 자리하였고 좌청룡 우백호가 물샐틈없이 감싸준 지형이다.
그러면서도 전면이 가로막힌 답답한 지형이 아니라 단아한 안산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데, 부석사 안산과 매우 닮은 꼴이다. 이것을 보면 부석사와 봉정사는 풍수논리에 의해 터를 정하고 좌향을 정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니 어찌 풍수를 소홀히 할 것이며, 어찌 좌향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합천 해인사
해인사는 합천군 가야산 중턱에 있는 사찰로 통일신라시대인 802년 창건되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이 가야산에서 참선을 할 때 등창으로 고생하던 애장왕 왕비의 병을 낫게 해주어 왕이 절을 창건하도록 했다고 한다.
해인사는 불교의 三寶寺刹 중 法寶寺刹로 유명하다.
삼보사찰은 불교에서 귀하게 여기는 세가지 보배라는 뜻으로 佛寶寺刹 통도사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해인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고려대장경이 보관돼 있어 法寶寺刹이라 하며, 송광사는 보조국사를 비롯한 16분의 국사와 덕이 높은 고승을 많이 배출해 僧寶寺刹로 불린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고려시대에 부처님의 법력으로 외적을 물리치려는 염원에서 시작되었으며, 16년 걸린 끝에 1251년 완성되었다. 대장경을 만드는 데에는 엄청난 정성이 들어갔다고 하는데, 한 글자를 새길 때마다 세 번씩 절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30명 남짓한 사람들이 새긴 글씨가 무려 5천 2백만 글자에 달하지만 마치 한 사람이 쓴 듯이 일정하며, 한 글자도 잘못 쓰거나 빠뜨린 자가 없이 완벽한 장경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6.25 전쟁 때는 이곳에 숨어있던 인민군 게릴라를 소탕하기 위해 비행기로 해인사를 폭격하려 했으나 당시 편대장이었던 김영환 대령이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소실될 것을 우려해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그 후 김영환은 명령불복종으로 군법회의에 불려나가지만 우리민족에게 소중한 문화유산인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키기 위해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고 당당히 말한다.
해인사는 가야산(1430m) 줄기인 서장대(1100m)부터 이어진 산줄기 끝에 자리했다. 전체적으로 높은 산에 둘러싸인 분지를 이룬 곳이지만, 남쪽 멀리까지 웅장한 산이 바라보이는 호쾌한 국세를 이루고 있다.
지대가 높은 곳이지만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바람이 아늑한 곳이다.
사찰 앞을 흐르는 물길은 북에서 남으로 진행하다가 90도로 방향을 틀어 동쪽으로 흐른다. 이때 수구를 양쪽의 산이 마치 옷깃을 여미듯 긴밀하게 막아주었다.
고창 선운사
도솔산 아래 자리한 선운사는 서기 577년 백제 위덕왕 때 검단선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대웅전(보물 제290호) 등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여럿 있다.
선운사는 도솔산 정상 수리봉부터 이어진 산줄기 끝에 자리했다. 산줄기 흐름을 보면 묵직하고 중후하게 이어지면서 수리봉의 빼어난 기운이 멈춘 곳이다. 이곳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은 저절로 명당의 기를 받는 것이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명당의 기운은 많이 받을수록 좋으니 가급적 오래 머무는 것이 좋다.
선운사 앞쪽을 보면 웅장한 4개의 봉우리가 구슬처럼 이어져 있는데, 그 형태 또한 예사롭지 않다. 안산의 봉우리가 좋으면 그에 걸맞는 큰 인물이 나게 마련이다.
선운사 앞을 흐르는 도솔천은 두개의 물길이 합수된 후 우측에서 좌측으로 흐르는데, 물 빠지는 쪽에 있는 좌측의 산줄기가 거듭거듭 막아주고 있다. 그리고 도솔천이 수구처에 이르면 여러 산이 또 한 번 철저하게 틀어막고 있다.
공주 마곡사
마곡사는 640년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곳이다. 대웅보전과 영산전 5층석탑 등이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세조임금의 친필 현판(靈山殿)도 있다.
근세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황해도 해주에서 일본군인을 처단하고 이곳 마곡사로 도피하여 잠시 승려생활을 하며 은둔하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되기도 했으나 곧이어 사세를 회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는 다른 폐사지와 달리 터의 경쟁력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이곳은 대웅전과 영산전 두개의 중요한 전각이 마곡천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두 곳 모두 산줄기 흐름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했다. 태화산(423m)부터 산줄기가 이어지다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지점에 정확히 자리한 것이다.
특히 영산전 뒤편의 군왕대는 세조임금이 올라 만년 동안 망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萬世不亡之地라 찬탄했다는 곳으로 풍수에서 요구하는 명혈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그런 관계로 이곳에는 예로부터 암장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때마다 큰 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곳의 물줄기 마곡천은 크게 S자 형태로 수태극을 이루며 흐르는데, 수구교쇄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곳이다.
수구가 이처럼 철저하면 상류에 반드시 명당이 있게 마련이다. 그곳이 군왕대일 수 있고 아니면 그보다 상류에 또 다른 명혈이 있을 수 있다.
이처럼 유명세를 탄 군왕대는 명당의 기운을 받으려는 파워스팟 체험이 그치지 않는 명소가 되었다.
이상 5곳 사찰에서 입지의 특징적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두 주산의 봉우리부터 이어진 산줄기 끝에 자리했다는 점이다.
이는 풍수에서 산천정기를 공급하는 용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때 주산의 봉우리는 반드시 크고 웅장할 필요는 없지만, 주변 봉우리에 비해 높거나 비슷해야 하고 단정해야 한다.
둘째, 5곳 사찰은 모두 오목한 지형에 자리해서 바람을 막는데 유리한 지형이었다.
폐사지 편에서도 보았듯이 전면이 탁 트여 전망 좋은 곳은 바람이 치거나 물이 직수로 빠지게 되므로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셋째, 물길이 크게 구비치며 흐르거나 혹은 수구가 잘 막혀있는 지형이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물길은 곧 경쟁력이다
넷째, 중요 전각은 산줄기 흐름에 따라 순리적으로 좌향을 정했다. 이때 터가 좋은 곳은 안산이 자연스럽게 조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모든 터에서 굳이 남향을 고집할 필요 없다는 뜻이다.
다섯째, 마곡사처럼 입지가 좋은 곳은 화재로 소실되었어도 곧바로 회복되는 복원력이 강하다는 점이다. 이는 터의 경쟁력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이상을 보면 풍수에서 요구하는 장풍득수를 이룬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터를 정할 때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훨씬 유리하게 된다. 이는 국내 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보편타당성이 있으니 대한민국의 우수한 풍수를 언제 어디서든 활용할 수 있다.
https://youtu.be/Zi6Hl5pB5K4
첫댓글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이번 설 연휴에도 칠장산 칠장사, 봉황산 부석사를 방문했엇습니다. 부석사를 갈 때마다 사찰의 입지에 풍수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찬탄해 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풍수무전미라는 말이 있듯이 흠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1. 용진처에 좋은 자리가 잇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 보령 성주사지나 서산 보원사지를 가보면 그 흔한 용진처 하나도 배경으로 금당을 앉히질 못했죠.
2. 부석사의 좋은 점은 주 건물인 무량수전이 화강암의 강한 암기가 있는 곳에 올려진 것이지 장충이 잘되고 수구가 잘 막혀 된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무량수각에서 앞을 보면 그 바람을 어찌해야 할까 싶지요. 그 바람을 직접 받는 범종루가 안양루가 불에 소실되는 우너인이 무얼까요? 거기에 더해 안산이 청룡방으로 비켜 앉은 것도 흠이지 장점이 아니겠지요.
3. 봉정암을 나머지 사찰에 비교하는 것을 찬성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 관정이지만 봉정암은 나머지 사찰에 비해 격이 너무 떨어집니다.
그 정도의 풍수적 입지를 가진 사찰은 많고도 많습니다.
4.. 태화산 마곡사는 산태극 수태극이 잘 어울리며 두 곳에 사찰터를 만들어 놓은 곳으로 봅니다. 즉 대웅보전
과 영산전 옆의 명부전이 그곳이죠. 군왕터는 허명일 뿐입니다. 용맥의 기운이 멈추질 못하고 명부전에가서 끝이 나는 것으로 봅니다.수행터를 답사해 보면 그 자라거 높은 곳에 형성될수록 장풍득수의 논리보다는 그 자리에 맺힌 기운의 유무가 중요하죠. 예를 들어 설악산 봉정암에 가서 장풍득수를 따지기는 곤란하다고 보죠. 물론 산속 깊이 자리 잡은 명찰들이 대부분 보국이 좋지만 그런 곳들도 기운의 유무에 따라 사찰의 흥망이 좌우되는 것으로 보이고 거기에 더해 고승대덕이 배출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