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남연군 묘를 평하며 천하대지요, 2代天子之地라고 극찬한다. 이곳에 묘를 쓰고 고종께서 태어나고 황제까지 되었기 때문이다. 풍수의 계파는 틀려도 혹은 풍수를 모르는 일반인들까지도 이곳에서의 평가만큼은 이구동성 탄성이다. 아마 구한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도록 이곳만큼 사람들의 입에 회자된 곳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풍수를 처음 시작할 당시부터 납득할 수 없는 의문점으로 남연군 묘를 한시도 잊어 본적 없다.
그토록 좋은 땅이라면 어째서 국가적으로 극도의 혼란을 초래하고 조선왕실의 말로가 불행했을까?
명당은 그토록 처절한 고통이 수반되는 것인가?
몇 십 년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가족을 포함한 주변 모든 것을 잃어도 좋은 것인가?
황제가 되었으므로 명당이라는 등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혹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설에 의하면 흥선군 이하응은 정만인이란 풍수가 제시한 만대영화지(萬代榮華之地)와 2대천자지(2代天子地) 두 묘 터 중에서 2대천자지를 선택했다고 하는데, ‘정만인’이 역사적으로 실존인물이었는지 알 길 없으며, 그 말의 사실여부 또한 어떠한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없다.
정만인은 손석우 선생 ‘터’라는 책 이후에 비로소 등장하는데, 손석우는 매천야록에 나오는 만인(萬印)이라는 이름을 자신의 소설에 차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매천야록에는 山人 萬印이 대원군에게 팔만대장경 간행을 부탁하였다는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이 묘를 쓰고 나서 고종과 순종 두 분 황제를 배출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후대사람들이 대원군의 극적이며 풍운아적인 삶에 귀납적으로 지어낸 말일 가능성 있으며, 아니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2대천자지지라는 말을 유포시켰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든다
남연군 묘를 쓰고 70년 동안 벌어진 일이다.
묘 이후 수많은 혼란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명당의 발복인가?
명당의 말로가 이토록 비참하고 굴욕적이라면 풍수 공부할 필요 없다.
매천야록은 조선의 선비, 황현이 구한말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황현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지식인으로 살기 부끄럽다는 시를 남기고 자결한다.
매천야록에는 남연군 묘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나온다.
남연군 아들 4명 중 흥선군은 끝으로 남연군이 작고할 때 흥선군 나이는 18세였다. 그가 地師를 따라 덕산의 大德寺에 도착하자 지사는 한 古塔을 가리키며 저곳은 큰 吉地라 그 귀함을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흥선군에게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흥선군은 즉시 집으로 돌아가 그의 재산을 모두 팔아 현금 2만냥을 마련 한 후, 그 절반을 대덕사 주지에게 주고 절을 소각하도록 하였다. 절이 모두 타버리자 흥선군은 상여를 모시고 가서 재를 쓸고 그곳에 머물렀다. 한밤중에 그의 형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각기 꿈 이야기를 하였다.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꾸짖기를
“나는 塔神인데 너희들이 어찌 내가 사는 곳을 빼앗느냐?
만일 이곳에 葬事를 지내면 제사가 끝나기 전에 너희 4형제가 폭사할 것이니 속히 돌아가거라.“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3형제 꿈이 모두 같았다.
이 말을 들은 흥선군은 분통을 터뜨리며
“과연 그렇다면 참으로 吉地입니다.
주인에게 명하는 것이니 신이 어찌 해를 끼치겠습니까?“
“그리고 종실이 몰락하여 우리 형제들이 옷자락을 끌고 날마다 안동김씨 문전을 찾아다니며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한때 잘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형님들은 모두 자식이 있지만 혈육 하나도 두지 못한 것은 저 혼자뿐이니 죽어도 아무 두려움 없습니다.
형님들은 아무 말씀 마시고 계십시오.“
그가 이른 아침에 탑을 무너뜨리고 묘를 썼다
下棺을 한 후 훗날 누가 옮길까 염려되어 쇳물을 수만 근 지어붓고 그 위에 흙을 덮었다. 그리고 스님을 데리고 경성으로 가던 중 수원의 대포진을 건널 무렵 배에 탔던 스님이 갑자기 고함을 치며 불을 끄라고 말한 후 머리를 움켜쥐고는 불에 탄 모습을 하더니 잠시 후 물에 뛰어 들어 죽었다.
많은 사람들은 남연군 묘가 복치형(伏雉形)이라고 하였다.
갑자년(고종 2년) 이후 나라에서는 국비를 들여 대덕산에 절을 짓고 이름을 보덕사(報德寺)라 하였다.
土木에 금을 칠하여 극히 웅장하고 화려하게 하였다. 그리고 논밭도 하사하고 보화도 후하게 주었다.
병인년(1866) 겨울에 양인들이 강화에서 도주할 때 邪敎에 빠진 우리 백성들은 그들을 덕산으로 인도하여 그 묘를 파헤치려 했지만 파지 못하고 다만 그 묘에 불만 지르고 달아났다.
대원군은 이건창(李建昌)에게 장례 치른 일을 말하면서 탑을 헐고 보니 그 속에 백자 2개, 다병 2개, 사리 3개가 있었는데 그 사리는 작은 머리만 하여 빛이 매우 밝고 물에 담그면 물을 빨아들이며 푸른기운은 실오라기 연기 같았다.라고 말하였다.
아래 사진은 현재 보덕사 석탑으로 사리가 나왔다는 가야사 석탑과 비슷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부터는 남연군 묘에 대해 자세히 분석해 보겠다.
남연군 묘의 주산은 석문봉(656m)이다. 하지만 정작 묘 뒤편에 보이는 봉우리는 옥양봉(621m)이다.
전체를 가야산이라고 하는데, 경승지로는 좋을지 모르지만 혈을 맺기에는 산이 거칠고 험해서 적합하지 않다.
이름난 명산에 명당 없다고 했다.
남연군 묘는 당판 곳곳에 강한 암반이 깔려 있는데, 그 암반이 힘과 권력을 의미하기 때문에 황제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강한 힘이 있다면 어째서 허수아비 황제가 되었고 고작 60년 만에 나라와 백성을 맥없이 빼앗겼는가?
황제로서 언제 큰소리 한번 쳐 본적 있던가?
매천야록 기록을 보겠다.
흥선군 이하응이 이른 아침에 탑을 무너뜨리고 보니 탑 터가 모두 암석으로 되어 있었다. 도끼로 팠지만 도끼가 튀기만 하자 그가 도끼를 어깨에 메고 공중을 향해 크게 꾸짖었다.
그런 후 다시 도끼질을 하자 튀지 않고 암석이 잘 파졌다.
이곳은 청룡의 한 줄기가 험한 암석으로 되어서 묘소의 앞부분을 날카롭게 찌르는 모습이다. 청룡 백호의 소임은 혈을 보호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청룡은 묘소에 대해 오히려 창을 들이대고 능멸하는 형태다.
마치 표독스런 뱀이 머리를 곧추 세워 노려보는 듯한 모습이다.
山의 至尊인 혈은 이처럼 멸시받고 핍박받는 곳에 비굴하게 머물지 않는 법이다.
가야사가 있을 당시에도 깊은 이곳 골짜기가 마음에 걸렸던지 미륵불을 세워 비보하였으나 결국 가야사도 화마에 폐허가 되고 만다.
남연군 묘 앞에는 안산이 없다. 그래서 물이 곧고 길게 빠져나간다.
물이 묘 앞으로 곧게 달아나면 천만금이 하루아침에 흩어진다고 했다.
따라서 당연하게 그리고 허망하게도 군주는 모든 재산과 주권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고 통분의 피눈물을 뿌리게 된다.
이곳에 남연군 묘를 쓴지 70년만의 일이다.
상황을 설정하고 추리해 본다.
기세등등한 아비로부터 벗어난 고종께서 홀로서기를 할 무렵 군주가 절대 절명의 위험에 처했는데 청룡이라는 신하는 저 혼자 잘살겠다고 물 따라 도망가기 급급하고 심지어 달아나면서까지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겁박하고 있다.
안산은 임금을 최측근에서 보필해야 하지만 어디에도 없는 관계로 빈자리를 틈타 썰물처럼 물이 빠진다.
그래도 주산은 사태파악을 못하고 고집스럽게 유아독존의 오기와 살기만 내뿜고 있으니, 누구하나 다정다감하게 주군을 도와주지 못하고 각자의 이해득실만 따질 뿐이다.
남연군 묘는 웅장한 듯 보이지만 실제는 고독한 모습이다. 좌불안석 하루도 마음 편할 날 없이 근심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급기야 혈 자신도 주변 모든 것들에 의해 버림받은 체 쓸쓸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남연군 묘에 대해 100년 넘는 오랜 세월 명당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는데, 이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거듭 말하지만 나라를 빼앗긴 곳이 명당이 될 수 없다.
명당의 가치는 그처럼 허무하지 않기 때문이다.
https://youtu.be/GSb95ljHP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