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8 삶의 위엄을 기억하며
김옥엽 (시인 문학평론가 서울신학교 교수)
종로구 숭인동에 동망봉이라는 언덕이 있다.
17살 단종과 그의 아내 정순왕후가 마지막 밤을 보내고 영영 이별했다는 청계천 영도교를 지난 뒤, 숙부 세조가 내리는 사약을 먹고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영월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매일 새벽 절을 하고 통곡하였다는 봉우리다.
정순왕후는 부인으로 강등되어 단종 임금과 생이별을 한 후 시녀들 몇과 그 옛날 자주통 샘터에서 옷감에 자주물감을 들이는 품을 팔면서 82세까지 살다갔다는 기록이 있다. 그 때 살던 정업원터 가까이 왕후가 매일 올랐다는 언덕에 있는 정자 부근에서, 2008년부터 종로구에서 정순왕후를 기리는 행사를 한다.
아무리 가난해도 남편의 원수인 세조가 내리는 집과 양식을 거절하고 근근이 끼니를 때우면서 백성들이 남몰래 갔다주는 양식과 동냥으로 살았던 어린 왕후.
그 왕후의 슬픔과 한, 한 지아비를 향한 굳세고 곧은 충절이 역사의 한으로 남아서인지 이곳에서 그날을 기리는 행사를 할 때마다 비가 온다.
3년 전 식전문화행사에 초대받아 정순왕후의 삶과 사랑을 노래한 글을 지어서 낭송가인 내 제자가 읽었다.
그리고 다음 해 창신초등학교에서 열린 행사는 이제 추모제가 아니라 지역 축제가 되어 지역민들의 사랑받는 행사가 되었다. 그리고 며칠 전 4월21일 제8회 추모제 식전 문화행사에 초대되어 참석하게 되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연이지만 단국대 김문식 교수가 전하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일생을 들으며 아무런 잘못도 죄도 없이 죽어간 단종과 그의 아내 왕후의 어이없는 슬픔의 깊이를 생각해보았다.
세종의 손자로, 문종의 아들로 태어난 잘못밖에 없는 단종 이홍위, 어린 시절 왕위에 올라 천지분간을 할 수 없는 나이에 거대한 야먕의 복판에 내던져져서 소용돌이치는 권력의 물살을 건너가다가 결국 믿고 따르던 아버지의 동생에게 죽임을 당한 비련의 왕, 왕위를 숙부에게 내어줄 때 나를 죽이지만 말아 달라 애원했던 어린 왕, 그러나 살아있으면 그를 따르는 무리가 일어나고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세력이 생겨날 것이고 그러면 수많은 사람이 죽어야할 것이기에 미래에 죽어갈 목숨들을 대신해서 죽어줘야 했던 어린 임금,
시인의 음성으로 왕후와 단종의 삶을 읽어나가다가 그만 울컥 오래된 슬픔이 기침처럼 올라왔다.
많은 사람의 죽음을 대신 해 미리 죽어야하는 그 목숨, 열 입곱 소년이 혼자 감당하기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그 죽음이 문득 주님의 대속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 지아비를 기리며 백발이 되도록 사랑의 절개를 지키느라 수양대군의 회유를 받아들이지 않은 여인의 결기 또한 세상이 감당하기엔 벅찬 것 아닐까?
돈이면 양심도 팔고 권력이면 신의도 내려놓는 세상에 살기에 몇 백 년 전에 죽은 한 소년과 소녀의 죽음을 두고 오늘까지 그 의미가 회자되는 것이리라.
비정한 운명의 왕의 일생에서 대속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약을 들이켰던 그 연약하나 연약하지 만은 않은 삶의 위엄을 기억하며 우리 역사 속 인물로 고통과 그 고통을 의연함으로 받아들인 왕과 왕비의 비애와 속울음을 다시 생각해본다. 지금 시대 같으면 말도 안 되는 희생을 주장했던 당시의 세도가 한명회와 세조의 이기적 욕망 앞에 무력하게 엎어진 약자의 슬픔, 인간기본의 유린-. 아마 거기 행사장에 모인 모두가 조선왕조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같이 슬퍼하고 분노하면서 인간과 왕조와 숙명을, 그리고 목숨보다 처절했던 사랑을 반추하는 하루가 되었다. 올해 처음으로 비가 오지 않는 맑은 날씨의 행사를 치르며 아직 끝이 나지 않은 그 여인의 가난하나 눈부셨던 사랑을, 억울하나 의젓했던 한 소년이 주는 역사의 외연을 생각하는 깊이 있고 뜻있는 하루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