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두 차례 씩 하던 몽양 역사 탐방을 올 해는 세 번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둘러보지 못했던 몽양 선생의 유적을 좀 더 꼼꼼히 둘러보기 위한 것입니다.
그 첫 번째 탐방이었던 지난 제8회 몽양 역사 탐방은
몽양 선생이 1886년 태어나서 1914년 중국 망명 때까지의 흔적을 둘러보는 자리였습니다.
모임 장소이자 첫 답사지는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이었습니다.
몽양 선생이 14살 때인 1900년 입학하며, 양평 신원리 묘꼴의 전통사회에서 나와
최초로 서구의 신문명을 접했던 곳입니다.
우리 기념사업회 이부영 회장님께서 탐방을 오신 40여분의 시민들께 간단한 인사말을 하셨습니다. "앞으로의 우리의 역사는 이승만, 김일성을 추앙하는 역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어서 몽양 선생이 입학하셨을 당시 배재학당의 교육과정을 소개하는 동영상을 시청했습니다.
몽양 선생이 느꼈을 지적 충격을 상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동영상 시청 후, 이 날 답사 설명을 맡은 신동진 기념사업회 사무차장이 몽양 선생을 양평에서 서울로 데리고 나와 넓고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해준 집안 어른 여병현 선생에 대한 설명을 했습니다. 여병현 선생은 일본, 미국, 영국을 유학하고 돌아와 당시 미국 공사관 통역, 배재학당 영어 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병현 선생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있는 몽양 선생은 아마 안계셨을지도 ^^ 몽양 선생 인생의 첫 번째 갈림길, 바로 여병현 선생과의 만남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벚꽃 융단길을 밟으며 간 곳은 배재학당터, 남궁억 선생터 표지석이 있는 곳입니다.
남궁억 선생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고, 황성신문의 사장이기도 했던 분입니다. 그리고 충정공 민영환 선생이 설립한 흥화학교의 영어교사 이기도 했습니다.
몽양 선생은 배재학당을 1년도 채 다니지 않고 흥화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흥화학교에는 여병현 선생도 계셨습니다. 몽양 선생이 당시 민족교육을 앞세운 근대학교였던 흥화학교로 전학을 가게되는 데는 여병현, 남궁억 선생의 역할이 컸을 것입니다.
몽양 선생처럼 우리 탐방팀도 배재학당에서 흥화학교터로 이동을 했습니다.
흥화학교 터는 이번 답사를 통해서 처음 확인을 한 곳입니다. <황성신문> 1898.10.28 일자에 관련 보도가 있더군요. '西署新門內 興化門前 五宮洞 契上園洞' -> '새문안 안쪽 흥화문 앞 오궁동과 닿아있는 웃동산나무골'이 사립흥화학교 설립 위치였습니다. 구 러시아 공사관 터 아랫 쪽의 정동공원 자리 부근입니다.
흥화학교는 1년여 뒤 신축 증설을 해서 '中署 壽洞 壽進宮 越谷'으로 이전을 했습니다. 이 곳은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 51-8 지역입니다.
그러니까 몽양 선생은 1901년 종로구 수송동으로 이전한 흥화학교를 다니셨던 것입니다.
흥화학교를 중퇴한 몽양 선생은 1903년 우무학당으로 전학을 가셨습니다.
우무학당 터로 가면서 중간에 또 한 곳 중요한 유적을 둘러봤습니다. 어디일까요?
네, 바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원 진 극장 원각사 터입니다.
1908년 몽양 선생은 이 곳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애국연설을 듣고, 당신도 애국자요, 명연설가가 되겠노라고 결심을 하게 됩니다. 당시 안창호 선생은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를 조직하기위해 국내에 들어와 계셨고, 아마도 이 때 강연도 그 일의 연장선이 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이 강연회는 <대한협회>가 주최한 것이었는데, <대한협회>의 회장이 바로 남궁억 선생이셨고, 그 회원에 여병현 선생도 계셨으니, 몽양 선생의 이 날 강연 참여는 우연이 아니였을 것입니다.
이번 답사의 또 하나의 성과라면 바로 우무학당의 위치를 거의 추정해냈다는 것입니다.
우무학당으로 오면서 새문안교회 뒷 쪽의 '육군무관학교 터'를 지나왔는데,
몽양 선생은 우무학교에 등교하면서 " 육군이 교련받는 장면을 구경하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는 회상기를 남겼고,
'우무학교'가 '통신원' 소속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통신원 터인 지금 세종로 공원이 있는 자리 인근에 우무(郵務)학교가 있었을 것으로 강하게 추정됩니다.
몽양 선생이 우무학교를 그만 둔 1905년은 몽양 선생에게 매우 힘든 한 해였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을사늑약 체결 뒤 은사였던 민영환 선생이 자결을 하는 등
소중한 분들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와중에 몽양 선생은 우편통신원으로의 취직을 포기합니다.
1905년 4월1일 역시 강제로 체결된 한일통신협정으로 이제 우편통신원으로
일제의 통신첨병 노릇을 하게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나 그때나 통신직업은 첨단직업이었고,
당시 월 27원의 월급도 적지않은 액수였습니다.
그러나 몽양 선생은 이런 현실적 유혹들을 뿌리치고
비록 힘들지라도 친일이 아닌 애국계몽운동가로서의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앞서 서울로의 진출이 어른들의 선택에 의한 수동적 결정이었다면
이 때의 선택은 본인의 판단에 의한 주체적인 결정이었다는 점에서
몽양 선생의 운명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 때 우편통신원이 되셨다면, 이 날 탐방은 없었겠죠? ^^;;
이어서 승동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승동교회는 이전에도 사진을 몇 차례 올려서 이번에는 생략합니다.
1911년~1914년 승동교회와 YMCA를 바삐 왔다갔다 하시면서 전도와 신학공부 그리고 YMCA운동부장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을 하셨던 몽양 선생은, 승동교회와 YMCA를 다니실 때 어떤 길로 다니셨을까? 하는 의문을 품고, 두 기관 사이의 지름길을 찾아봤더니, 옛 흔적이 남아있는 길이 있더군요. 마치 잠시 몽양 선생이 되어 걷는 마음으로 그 길을 따라 YMCA에 도착했습니다.
이 곳에는 놀라운 유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립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비.
비록 YMCA건물 뒷 편 주차장 한 켠에 서있었지만, 그나마 침식을 줄이기 위해 투명관으로 보호돼있어 덜 씁쓸할 수 있었습니다.
이 비가 세워진 시기가 1914년 3월 30일. 아직 몽양 선생이 중국 망명을 가기 전이니, 당시 YMCA 활동을 열심히 했을 몽양 선생의 땀이 이 비석 어딘가에 남아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전 잠시 콧등이 시큰해지기도 했습니다. 역사 탐방의 묘미가 바로 이런 cross encounter 의 순간을 맛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상동교회와 YMCA는 애국계몽운동가들의 요람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YMCA에서는 매 달 강연회가 열렸고 그 때마다 천여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그런 열정이 모여서 만들어졌을 이 비석. 당시 망명을 결심했던 몽양 선생은 이 비석건립 시 남다른 감회에 빠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비석을 직접 만질 수 있었다면 마치 체온이라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
이후 탐방단은 양평으로 가서 기념관과 생가를 둘러봤습니다.
탐방에 참여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9회 몽양 역사 탐방은 6월22일로 예정돼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