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역사 탐방은 몽양 여운형 선생이 1929년 중국에서 체포돼 국내에 들어온 뒤
해방되기까지 펼친 독립운동의 현장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몽양 선생이 구속돼있던 서대문 형무소, 지금은 역사박물관에서 모였습니다.
저희 사업회 강준식 사무총장과 민족문제연구소 경기동북지부장이 반가운 만남을 가졌고...
김희원 지부장께서는 몽양 역사 아카데미 동창회장도 맡으시는 등
몽양 선생 선양을 위해 애써주시고 계십니다.
역사박물관 안 영상실에서 장원석 몽양 기념관 학예사가 오늘 탐방에 대한 간단한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이번 탐방은 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이 수감되셨던 서대문형무소를 탐방하는 것이니만큼
몽양 선생에게 국한되지 않고, 형무소에 관련한 해설도 들을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박물관 김태동 학예사가 직접 해설을 해주었고, 탐방객들은 고급 해설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습니다.
아직 강제병합이 되기도 전인 1908년에 일제에 의해서 만들어진 서대문 형무소.
처음 이름은 경성감옥,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대규모 감옥
사대문 밖 교통의 요지에 감옥을 세움으로써 민중들에게 감시와 탄압의 효과를 노렸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수형기록서 복사본으로 벽을 구민 방. 정말 이 수많은 분들의 숭고한 정신이 지금 이땅에도 면면히 이어져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다면 우리의 몽양 여운형 선생은 어디?
네, 가나다 순으로 수형기록부가 붙어있어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진 중앙부의 몽양 선생 수형기록부가 보이시나요?
도산 안창호 선생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셨었죠.
도산 선생이 석방되신 뒤 몽양 선생이 찾아가 고당 조만식 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있습니다.
좌우에 옥사가 있는 복도를 따라 가다보니, 위에 교도관의 밀랍인형이 있더군요.
교도소는 가장 효율적으로 재소자들을 감시, 감독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교도관의 얼굴이 꽤 실감나지요?
최근 국정원의 정치개입 사건들을 보면, 지금은 보이지 않는 교도관이 우리의 생활을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긴 시간 민주화 투쟁을 해왔던 것을 생각하면, 지난 5년 참 많은 것을 잃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중간 도장 한 번 찍고. ^^
다음 장소는 몽양 선생이 1932년 7월 출소하시고, 1933년 2월부터 사장으로 지내신
조선중앙일보 터로 갔습니다.
벽돌 건물이 고풍스럽게 남아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이 곳부터 기념사업회 신동진 사무차장이 해설을 맡아 했습니다.
그 다음 장소는 조선중앙일보를 그만 두시고부터 살기 시작해, 돌아가실 때까지 거처하셨던
계동 자택
설명하는 곳 맞은 편, 표지석 맞은 편의 '안동칼국수'집이 바로 몽양 선생이 사셨던 자택인데
지금은 일부만 남아있습니다.
아래 사진에 도로확장을 하면서 잘려나간 부분을 대략 표시했습니다.
이 날은 특별히 계동 집에서 사셨던, 몽양 여운형 선생의 동생 여운홍 선생의 외손녀가
직접 그린 훼손되기 전 평면도를 갖고 오셨습니다.
몽양 선생 댁은 도로 방향이 북향이어서 집의 문이 집 뒷쪽으로 나있는
그리고 대청마루가 없이 통로마루만 있는 독특한 구조였습니다.
남향으로 난 학교운동장(전 휘문고등학교 운동장)의 담은 낮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화단 넘어 학교운동장이 훤히 보였다고 하더군요. 마당과 마루 사이에는 미닫이 유리창문이 있었는데,
이 창문이 학생들이 찬 공에 자주 깨지곤 했다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몽양 선생은 화를 내시기는 커녕, 학생들에게 더 씩씩하게 뛰어놀라고 격려를 해주셨다고 하지요?
평면도에서 잘려나간 부분을 표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휘문 고등학교 운동장은 현대사옥이 들어섰고, 지금 그 흔적이 그나마 남아있는 것은
방 A,B 입니다.
1947년 몽양 선생 댁에 폭탄 테러가 있었을 때 터진 방이 바로 방C 입니다.
이제 <안동칼국수> 집에 들어가서 몽양 선생의 체취를 느끼며 점심을 먹었습니다.
위 사진 뒷쪽의 방이 평면도에서의 방A 가 됩니다. 사진 앞 쪽은 마당을 메꿔 만든 방이 됩니다.
방 A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분들. 사진 중앙 안경 쓰신 분이 바로 이 날 평면도를 가져오시고 집 구조를 설명해주신 여운홍 선생의 외손년 이혜원 여사입니다.
방B 에서 식사를 하고 계신 탐방객분들. ^^
다음 탐방 장소는 1944년 8월 해방 후의 건국 준비를 위해 조직했던 건국동맹 결성터입니다.
표지석이 있는 곳이 실제 결성 장소에서 약 100M 정도 떨어진 곳이어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몽양 선생과 동지분들은 건국동맹을 결성하기 며칠 전, 다산 정약용 묘가 있는 남양주 조안면의 남한강 백사장에서 물놀이를 가장해 모임을 갖고 건국동맹의 결성을 결의했다고 합니다.
다음 탐방지는 바로 그 조안면입니다.
조용한 마을 길을 따라 걸어들어가는 곳은 바로 1943년 11월 몽양 선생이 김용기 장로의 요청을 받고 종종 기거하러 내려오셨던 봉안마을 입니다.
몽양 선생이 직접 농사도 짓고 하면서 마을 청년들과 이상촌을 만들고자 힘쓰시면서
건국동맹, 농민동맹을 구상,조직하고, 중국의 독립동맹, 상해임시정부와도 몰래 연락을 주고받던 곳입니다.
오른 쪽의 파란 옷을 입으 분은 아흔이 넘은 어르신입니다.
어르신의 우측으로 있는 고무마 밭이 바로 몽양 선생이 사셨던 집이 있었던 집터입니다.
이 집은 6.25때 허물어졌다고 합니다. 고구마 밭 뒷쪽, 산 아랫자락에 축대를 쌓아놓은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몽양 선생은 식량난을 덜기위해 이 곳에 처음 고구마를 들여와 기르기 시작했는데, 지금 그 고무마가 몽양 선생 집 터의 밭이 돼있네요.
축대 쪽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저 멀리 남한강이 (과거에는 없었을 차량 고가 밑) 보입니다.
누군가 배를 타고 건너오면 누가 오는지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더군요.
김용기 장로는 몽양 선생이 양평 신원리 묘꼴에 자신의 집에 세운 광동학교에 다녔던 학생이었습니다. 몽양 선생을 존경했고, 선생의 육촌동생인 여운혁 선생과 친구지간으로, 함께 기독교 이상촌을 건설하기 위해 자신의 고향인 봉안마을에 교회를 세우고 장로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봉안교회의 모습입니다. 마을 입구에 아담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봉안교회의 목사님이 기꺼이 간단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김봉진 봉안교회 목사님은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굴복한 1938년이 한국 기독교의 수치스런 해라고 하시며 그 때 이 곳 봉안교회에서 김용기 장로가 참 신앙으로 교회를 지켰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절하셨던 몽양 선생이 봉안마을에 오실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원래 이 날 일정은 서울 돌아가시는 탐방객분들을 고려해서 이 곳 봉안교회에서 끝내려 했으나
인근 기념관도 꼭 돌아보고 가겠다는 탐방객 분들의 요청에 따라 기념관으로 향했습니다.
장원석 학예사의 해설도, 탐방객들의 열정에 끌려 조금은 길어졌습니다만 참 뜨거운 분위기는 식을 줄을 몰랐습니다.
무사히, 의미있는 탐방을 마치고 돌아가시는 길입니다.
7월19일의 추모제와 학술심포지엄, 그리고 가을에 있을 제10회 몽양 역사탐방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이 날 탐방을 정리했습니다.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