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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chas Gracias, Cuba (2)
2018년 2월 6일 화요일 아바나 구도시 관광
6, feb. 2018 (mardo) EKSKURSO “HAVANO TRARIGARDE”
Malnova Havano:
Veturo al la Malnova Havano.
Urba promenado laŭ la cirkvito de la kvar ĉefplacoj, nome:
Placo de la Katedralo (religia centro),
Placo de Armiloj (militista kaj registara centro),
Placo de Sankta Francisko el Aziso (komerca centro) kaj
Malnova Placo (bazaro).
Moderna Havano:
Veturo laŭ la avenuo Malecón (Moleo) al 5-a Avenuo ĝis la Sporthaveno Hemingway, itinero laŭ kiu sinsekve oni konatiĝas kun la kvartaloj Centra Havano, El Vedado, Miramar kaj laste Siboney.
Reveno laŭ la 5-a Avenuo al la Kongresa Palaco (sidejo de UK-oj 1990 kaj 2010). Vizito al la Arbaro de Havano (la verda pulmo de la urbo) ĝis Placo de la Revolucio. De tie pluveturo laŭ la avenuo Karolo la 3-a, strato Reina ĝis Parko de la Frateco, Kapitolo kaj Centra Parko.
쿠바 여행은 다른 여행객들과는 좀 특별나다.
숙소를 찾아야 하거나 교통편을 예약하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바나에서 열리는 아메리카 에스페란토 대회에 참석차 왔기 때문이다.
대회 앞뒤로 일주일간씩 여러 곳을 둘러볼 수 있는 관광코스가 있기 때문이며 체류 중의 모든 일정을 아바나 에스페란토 협회의 일정에 맞췄고 따라서 숙식과 교통 등을 일임했기 때문에 어찌 보면 아무런 부담 없이 일정을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대회 기간 중에는 구아바나의 관광지와 한인회가 있는 지역과 코트라(Korea Trade-Investment Promotion Agency, KOTRA)를 방문하기도 하면서 주민들의 어려운 형편에도 열심히 살아가는 애잔한 모습을 보면서 마치 우리나라의 60년대의 생활을 회상하는듯하여 마음이 매우 안타까움을 느끼곤 했다.
대회 전 관광은 비냘레스 지역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면서 시가생산 공장을 방문하였고 대회 후 관광에는 동쪽 부분의 산타클라라 까지 둘러보면서 주민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 숙소는 거의 민박(까사)을 이용하기도 했고 말은 안 통하지만 서로의 마음을 통해 대화할 수 있었으며 쿠바인들의 밝고 소박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혁명 이후의 공산화 영향으로 국민들의 생활은 매우 궁핍해 져 있으나, 우리가 전쟁으로 곤란을 겪을 때 우리 나라를 도왔던 나라이기에 더욱 더 애잔한 마음이 들었으나 관광지를 들를 때마다 그들의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손님을 맞기 위해 집을 새로 수리하고 에어컨이나 텔레비전 설치, 목욕시설의 현대화 등 새로운 변화를 접하고 있었다. 이처럼 관광지마다 주민들은 손님들의 숙소를 마련 중이었고 큰 호텔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러한 민박제도로 하여금 국민들이 수입을 올 릴 수 있게 되어있는 시스템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가장 어려움을 느꼈던 것은 통신망이다. 다른 나라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와이파이 시설은 특정한 곳에서만 접할 수 있었고 그나마 접속하려면 접속용 번호를 사야하는데 그 일이 쉽지 않았고 관광을 하기 위해 자주 장소를 바꿔야하는 여행자들에겐 정말로 이용하기 어려운 통신이었으며 숙소에서 조차도 와이파이는 접속할 수 없었고 주민들조차 이용이 쉽지 않음을 볼 때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음을 실감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말은 ‘관광객의 절대 안전’이다. 실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정마다 수입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유일하게 관광객 유치이며 정부에서도 이것을 인식하기에 관광객들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에겐 가혹할 정도로 다스리기 때문에 안전상태를 유지할 수 있음이라. 식당이나 관광 상품 판매점 등에서는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길거리에서도 지나는 여행객에게 호의를 보이는 국민성에 대하여 매우 호감이 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안전을 위함인지는 모르지만 집집마다 철골 구조로 창을 막고 있었고 담장도 넘을 수 없게 쳐 놓은 것을 볼 수 있었으며 그러한 분위기가 안전하기는 하겠지만 오히려 치안상태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음에 매우 안타까웠다.
오래 전에 멕시코, 과테말라 등지에서 일하던 한국 농민들이 쿠바로 이주해 에네켄 농장에서 강제노동을 하였다. 그 후 한국전쟁 때 쿠바의 경제 원조를 지원받기도 하였으나, 쿠바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지금까지 외교관계가 없는 상태로 남아있으나 여행을 위해 입국은 자유롭다. 현재는 대한민국의 멕시코 주재 대사관에서 비공식적으로 쿠바와의 교류를 담당하고 있다. 반면, 비슷한 이념을 가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는 수교하였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처음으로 성립한 공산주의 정권을 기념하여「카리브에 떠오르는 붉은 섬」이라고 형용되기도 한다. 체 게바라가 참여한 쿠바 혁명으로 피델 카스트로가 집권한 이래 공산주의(사회주의) 국가로서 미국의 경제 봉쇄로 경제의 어려움을 자립 경제 체제로 버티면서 미국과 대립하고 있었으나 2014년 12월 18일 국교정상화 선언을 했다. 1961년 자본주의 체제에서 공산주의 체제로 바뀌었으며, 냉전 시기인 1991년까지 중남미의 수많은 사회주의 혁명의 주요 지원 국가였다. 쿠바 섬은 카리브 해의 진주라고 불리면서 세계인들에게 동경의 섬으로 알려진 곳이다.
쿠바에는 수천 년 전에 타이노족 등 원주민이 농경 등을 영위하고 있었으나, 15세기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쿠바에 건너온 이후 19세기까지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었다. 16세기 초부터 스페인사람들은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를 수입하여 19세기까지 쿠바에 수입된 흑인 노예의 수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 17∼18세기에는 흑인들이 여러 차례 해방투쟁을 일으켰으나 스페인의 가혹한 탄압으로 끝을 맺었다. 쿠바와 미국 간의 긴밀성은 쿠바의 역사에 매우 많은 영향을 끼쳐 미국은 끊임없이 쿠바를 지배하려고 넘보았다. 19세기에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와 호세 마르티는 각각 독립전쟁을 일으켰으나 스페인은 쿠바의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고, 군사 통치자 발레리아노 웨일러(Valeriano Weyler)는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1898년 미국의 메인 호가 아바나 항에서 정박 중에 폭발한 사고(후에 미국의 자작극으로 확인되었다.)를 구실로 미국이 일으킨 미서전쟁((영어: Spanish-American War, 스페인어: Guerra Hispano-estadounidense)은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스페인은 쿠바를 미국에 넘겨주었다. 종전 후 3년 동안 쿠바에서는 미국 군대의 군정(軍政)이 실시되었으며, 1903년에는 관타나모에 미국 해군의 기지가 설치되고 쿠바의 중추적 기능을 미국 자본이 장악하는 등 쿠바는 미국의 사실상의 식민지가 되었다. 쿠바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측으로서, 명목상 선전포고는 하였으나, 실제 전투에 참가는 거의 없었다.
1930년 마차도의 쿠데타 이후로, 10여 년간 계속 군사 정권이 들어섰다. 1940년 쿠바 자유당의 바티스타는 선거로 정권을 획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삶의 질은 향상되었으나 빈부 격차도 극심해졌다. 1952년에는 군부의 지지를 받는 바티스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얻어냈고 바티스타에 대항한 1956년 바르킨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1959년 카스트로가 정권을 장악하여 쿠바는 공산화 되었다. (이 때 쿠바는 프로 야구인 큐반 리그를 없애 버렸다.) 이후,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쿠바 공산화 때부터 1993년까지 쿠바의 독재정권을 피하고자 120만 명의 쿠바인이 쿠바를 탈출하였다. 1970년대 쿠바는 볼리비아, 앙골라 등의 공산당 군벌들을 원조했고, 미국은 이에 대응하여 해당 국가의 정부군을 지원하였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쿠바의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1993년에는 일부 민간차원의 미국과의 교류를 허용하였으나 미국은 금수 조치로 쿠바에 제재를 가했다. 카스트로 정권에 반대하여 수감된 양심수가 500명에 이른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등 쿠바 정부는 지난 30년 동안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로부터 인권 침해에 대해 비난받아 왔다. 2008년, 피델 카스트로의 건강악화를 이유로 친동생 라울 카스트로가 새로운 국가평의회장직을 계승했다. 2014년 12월 18일, 쿠바는 적대적인 관계였던 미국과 국교정상화를 했다. 2016년 11월 28일에 마침내 피델 카스트로는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쿠바는 카리브 해 북쪽에 있으며 주변으로 카리브 해, 멕시코 만, 대서양에 둘러싸여 있다. 쿠바 북쪽으론 미합중국 플로리다 주와 바하마, 동쪽으로는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와 아이티, 서쪽에는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 남쪽으로는 케이맨 제도와 자메이카와 이웃하고 있다.
쿠바는 카리브 해의 군도로, 쿠바는 주요 섬이다. 주변의 섬들을 네 가지로 분류하는데 콜로라도스 제도, 사바나 카마구에이 제도, 하르디네스 데 라 레이나 제도, 카나레오스 제도이다. 쿠바 본섬은 면적이 105,006㎢로 국토의 대부분을 이루며, 길이는 1,233km에 이르는 세계에서 17번째로 큰 섬이다. 쿠바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은 남서쪽의 이슬라 데 라 후벤투드(젊음의 섬)으로 그 면적은 3,056㎢이다. 쿠바의 총 면적은 110,860㎢이다. 쿠바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지구온난화의 영향을 받고 있어서 2050년이 되면 국토의 6%가 바다에 잠긴다는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본섬은 대부분 평탄하거나 언덕이 있는 평야이다. 섬 남동쪽 끝에는 가파른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이 있는데, 가장 높은 곳은 피코 레알 델 투르키노 산(높이 1,975m)이다.
기후는 열대에 속하지만, 연중 부는 북동쪽의 무역풍으로 온화하다. 일반적으로(지역차가 있지만) 11월에서 4월까지는 건기이며, 5월부터 10월까지는 우기이다. 평균 기온은 1월에는 21°C, 7월에는 27°C이다.
교육
카스트로는 쿠바가 미국의 반식민지가 되었던 것은 미국의 선전을 국민들이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국력을 교육에 집중하였다. 1959년 쿠바혁명 이후 카스트로 정권은 교육 사회 복지 부문에 대한 투자비율을 강화하고 관련 예산이 국가예산의 16%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농촌의 문맹률이 크게 하락하였고 대학을 포함한 모든 교육은 무료로 제공한다. 유치원을 거쳐 예비학교 1년,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은 의무교육(obligatorio)이며 이후 고등학교, 대학교로 이어진다. 초등학교에서는 학급을 20명으로 하거나, 서브티쳐(sub-teacher)를 도입하고 있다. 고등학교 과정은 크게 직업교육을 목적으로 한 실업계고등학교, 대학교 진학을 목적으로 한 인문계고등학교, 예술고, 체육고로 나뉜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모두 교복을 입으며, 학년에 따라, 기숙사 여부에 따라, 전공에 따라 교복의 색과 무늬가 달라진다. 특히 농촌에서 높았던 문맹률 일소 운동을 전개하여 문맹률이 낮아졌다. 2002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15세 이상 국민의 문자 해득률은 99.8%이며 이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와 함께 라틴아메리카 최고 수준이다. 또 국민의 대다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주요 고등교육기관으로 1728년에 개교한 아바나 대학 등이 꼽힌다. 2001~2002년 기준으로 19만 1262명의 학생이 고등교육을 받았다. 또한 쿠바는 학교교육에서 스포츠에 주력하고 있으며 특히 야구는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필수과목으로 도입했고 쿠바 최고의 인기 스포츠다.
쿠바 국민들은 정부허가(하지만 극히 드물다) 없이는 쿠바를 떠나거나 돌아올 수 없다. 쿠바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비슷한 광범위한 검열제도를 실시하고 있으며, 국경 없는 기자회의 2008년 언론 자유 지수에서 최하위 순위를 보였다. 검열은 쿠바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전달을 제한한다. 모든 국민이 배급표를 가지고 있으며 퇴직한 사람들을 위한 전용 식당이 있다고한다. 언론매체는 정부에 의해 통제된다. 쿠바의 매체는 공산당의 혁명 지도부에서 관할하며, "선전 전략을 발전시키고 협조한다.".
당국은 인터넷을 "21세기의 큰 질병"이라 부른다. 컴퓨터 소유가 금지되어 컴퓨터 보유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 인터넷을 이용할 권리는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허가되며, 이들도 감시받는다. 불법적인 인터넷 연결은 징역 5년형에 처해질 수 있다.
아침 식사는 까사(숙소)에서 제공한다. 식사라고 해야 빵과 과일 주스, 햄과 커피, 우유와 달걀부침 등이지만 원주민들의 식단에 비하면 진수성찬이다.
식사 후에 협회로 이동한 후 Geomar Martínez Pérez의 인도로 관광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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