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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은 불교의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다
실론섬 13.05.11.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열반입니다.
이는 불교도라면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궁극적 목표가 열반이라고 해서 붓다의 가르침 중 열반 이외의 모든 것을 간과하거나 또는 열반 지상주의에 함몰된다면 이는 불교라는 몸체를 파악하는데 오류를 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부파불교에 대항하여 일어났던 대승불교 운동의 구호는 "붓다의 오리지널 음성으로 돌아가자" "붓다의 본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보면 부파불교가 혼자만의 열반 지상주의/엘리트 불교에 빠져서 자비심/대중구제라는 불교의 주요한 가르침을 소홀히 했기에 자초한 일이었습니다.
역사는 되풀이 되듯 한국불교 또한 상구보리 하회중생 중에서 상구보리만 추구하며 허황된 깨달음 지상주의에 빠져서 대중들로부터 외면 받는 현실과 무관치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열반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꼬 없는 찐빵처럼 붓다의 진정한 원음을 외면하고 열반/해탈만 추구하는 불교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부파불교의 종말이나 한국불교의 현실이 웅변적으로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번 강조드렸지만 붓다의 45년 생애가 과연 열반을 가르치고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는가?
열반이라는 정상이 산 입구에서 한발작 한발작 걸어서 점진적으로 단계적으로 향해 가는 것인가? 아니면 어느 한순간 깨달아 입구에서 정상까지 단숨에 구름타고 올라가는가?
그림자가 몸을 따르듯 수레바퀴가 소 뒤를 따르듯 열반은 그렇게 획득하는 것인가? 아니면 몸 따로 마음 따로 수레 따로 소 따로 각각 별도로 움직여도 획득되는 것인가?
요즈음 한국불교에서도 "우리도 부처님처럼"이란 말이 널리 퍼지더군요.
참 좋은 말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배우는 진정한 마음자세는 [부처님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마음은 즉 대자비의 마음이겠지요.
이것은 당연히 열반으로 이끕니다.
자비희사 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무량심이라고도 하지요.
자애. 연민. 더불어 기뻐함. 평온입니다.
불교도라면 출가승/재가자를 막론하고 이러한 사무량심이 실천 수행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사무량심은 붓다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수행의 목표는 결국 붓다의 마음을 갖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아라한이신 붓다의 마음을 갖는다면 열반이지요.
이곳 남방권은 처음부터 출가의 최종 목표인 아라한이 되겠다는 식으로 미리 방향 설정을 하는 것을 별로 중요치 않게 생각하고 이는 또한 바람직한 출가의 목표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붓다의 마음처럼 대자비심과 사무량심으로 베품의 삶을 살면서 청정한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를 배우며 실천에 노력할 뿐입니다.
또한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지는 못하지만 미혹한 중생들의 스승으로서 충분한 자질을 스스로 갈고 닦으며 빛을 밝혀주고 앞장서서 실천에 노력 할 뿐입니다.
어느 누구도 아라한이 되겠다고 그리고 아라한이 되어라고 그리고 아라한이 붓다의 가르침의 전부라고 말하는 수행승은 없습니다.
불교의 수행은 팔정도이며 계.정.혜입니다.
그 어디에도 계와 정을 무시하고 혜의 결과인 아라한이 된다고 말하는 대목은 없습니다.
불교는 흘러간 과거에 매달리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망상을 하지 말라 합니다.
즉 현재 여기 이곳의 삶이 미래와 과거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선불교의 가장 큰 폐해중의 하나가 바로 허황된 깨달음 지상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초기불교의 진정한 가르침은 열반을 궁극의 진리로 추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무량심을 세간사에 널리 퍼트리고 실행하는 것이 붓다의 원음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경전에서 열반은 99.9%가 수행승들에게 행한 설법입니다.
수행승들에게 이것을 설법하는 당연한 것이고 그리고 경전 전승자들이 그것만을 간추려서 편집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입니다.
붓다는 수행을 잘 하려면 행복한 마음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행복해야 세상사 일이 잘 풀리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입니다.
화난 마음 헝크러진 마음 온갖 고민과 번뇌에 쌓여 있는 마음으로는 수행도 사무량심도 없습니다.
초기불교가 열반만을 추구하고 그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라는 것에는 저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우리가 올바른 삶을 살도록 가르쳐주고 그리고 그 삶의 결과들을 이야기합니다.
행복/안녕/안온이라는 수행 과정과 방법을 성찰하지 않고 열반만이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하면서 산정상에만 오르려고 하는 것은 초기불교를 대하는 불자의 모습이 아닌 것 같습니다.
불교는 자비의 종교이며 한편으로 세간을 살아가는 중생들의 일상적인 고통과 아픔을 함께하지 못하고 오직 깨달음이란 환상에 사로잡히거나 그것만이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한다면 이는 붓다의 마음과는 많은 거리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붓다의 깨달은 마음은 무지한 중생에 대한 대자비심이며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이며 그것을 실천해 가는 것이 불교의 참된 수행/진리이며 그런 삶의 끝은 열반이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순서를 무시하거나 간과한다면 이는 올바른 불교관이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세간사 중생들에게는 열반이라는 정상 보다는 한발짝씩 걸어 올라가는 오늘의 하루가 더 중요합니다.
혹 붓다가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떠나라. 둘이서 같은 길을 가지 마라. 시작도 중간도 끝도 좋은 열반의 법을 설하라. 많은 사람들이 출가를 해서 열심히 열반을 얻도록 법을 설하라.....
저 스스로 상상해 봤습니다만 만약에 붓다의 전법선언이 위와 같았다면 아마도 불교는 2500년이 지난 지금 이 땅까지 오지도 못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렵고 황폐해 가기만 하는 한국사회와 그 속에서 하루하루 허덕이며 살아가는 중생들에게 희망과 단비 같은 법문은 없고 어디를 가나 깨달음 열반 성불 등의 말잔치만 봄날에 떨어지는 벚꽃처럼 흩날리니... 45년 붓다의 생애가 새삼스럽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 드려서 불교는 열반이 궁극적 진리입니다.
하지만 열반을 얻기 위한 과정은 더더욱 궁극적 진리입니다.
불교에서는 단박에 깨쳐 한순간 성불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팔정도를 통한 청정한 수행과 선업의 공덕들이 쌓여서 그 결과물로 나타나는 것이 열반입니다.
팔정도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열반이기에 팔정도 수행은 열반을 얻기 위한 수단이나 방편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이며 진리이며 불교입니다.
따라서 초기불교에서 팔정도의 삶을 이야기하지는 못할망정 자꾸만 열반을 입에 담는 것은 선불교의 깨달음 지상주의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이나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붓다는 전도선언에서 열반을 널리 알리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중생들의 안온과 안락을 그리고 열반으로 가는 불사의 문을 여는 방법 즉 팔정도의 삶을 전파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붓다가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혼자 간직하거나 또는 한두 사람의 제자들에게 비밀리에 전달하지 않고 널리 세상 중생들에게 알리라고 한 것은 사무량심에 의한 대자비심의 결과입니다.
결코 열반이라는 의미조차 제대로 모르는 무지한 중생들에게 열반이 불교라고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부처님처럼 살아가자, 우리도 부처님의 마음을 가지자, 자비로운 삶을 살자...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불교가 던지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살아가는 고달픈 세상살이에서 어렵거나 괴롭거나 아플 때에 붓다의 자비어린 따뜻한 음성을 들을 수 없고 그분의 가르침에 의지할 수 없다면 불교가 중생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스스로의 삶 자체도 주변도 제대로 청결하게 챙기지 못하고 오계조차도 지키기 어려운 세간사를 사는 중생들에게 해탈/성불/열반 같은 아지랭이 잡는 듯한 허망한 이야기만 나온다면 가슴에 와 닿겠는지요?
열반에 대한 허망한 꿈을 깨고 길상경 한 줄이라도 제대로 가슴에 지닌다면 그게 불교이고 붓다의 가르침에 충실한 참된 불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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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 하자면...
열반에는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이 있다고들 하지요.
아라한이 중생의 몸의 상태로 있는 것이 유여열반이고 화장을 해서 몸을 태우면 무여열반이라고 합니다.
오온의 상태(중생의 몸)에서 아라한은 두번다시 윤회에 드는 조건지워짐을 만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를 새가 하늘을 날아도 발자욱을 남기지 않고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거물에 걸리지 않는 경지라고 하지요.
불교의 최고의 경지인 열반은 결코 문자나 말로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중생의 머리로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는 범위밖에 있는 진리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반을 설명하는 것은 많은 중생들이 열반에 대해서 오해를 하기 때문에 그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 구구절절이 말과 글을 남겨 놓은 것 입니다.
이를 좀더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물속과 육지를 마음대로 오고가는 거북이가 어느날 물속의 친구인 고기에게 육지에 가면 땅을 밟을 수 있고 꽃도 있으며 벌레들도 산다고 이야기한다면 고기가 그 말을 이해하고 알아 듣겠는지요?? 천년을 문자와 말을 끌어다 이야기해도 물고기에게는 육지가 상상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육지가 존재하지 않는게 아니지요...
열반도 이와 같습니다.
열반은 존재하며 다만 실현될 뿐 입니다.
열반에 대해서 하도 외도들이 엉뚱한 소리를 하여서 에드워드 콘즈 교수님은 우매한 그들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글을 남겼습니다.
[열반이 어떤 것이라고 설명할 적절한 관념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열반은 '생각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열반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들이 없으며, 누구나 그것을 개인적으로 스스로 경험해야만 하며, 세상에는 미미하게나마 열반과 비슷한 것이 전혀 없으며, 추리로 그것에 가깝게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열반에 대한 모든 개념은 착각이다]...
부디 열반에 대해서 횡설수설하는 분이 있다면 잘 설명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이렇듯 불교의 모든 진리는 그것을 알아보는 지혜가 필요 합니다.
명상은 진리를 알아보는 지혜를 늘려 주는데 가장 좋은 수행법일 뿐 입니다.
명상 그자체만으로는 절대로 불교의 진리를 못 봅니다.
명상은 지혜를 얻기위한 수단이며 명상과 지혜는 또한 함께 병행하는 것 입니다.
제가 늘 한국불교의 간화선을 비판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간화선은 명상은 뛰어날지 몰라도 결코 불교의 진리를 보는 지혜를 얻는 올바른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화두를 깨처서 어느 정도의 높은 정신세계에 도달할 수 있겠지만 무상의 진리를 지혜의 눈으로 봐서 해탈의 길에 이르는 마지막까지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선종의 어느 선사들보다도 깊이 있고 높은 진리를 보는 지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그러한 지혜가 순간적이나마 번뜩여서 무상도 보고 무아도 봅니다.
하지만 그것을 오래 붙잡아 두질 못하고 돌아서면 오탁악세의 오취온의 중생이 되는 게 문제지요... 그런 지혜를 늘리고 마음을 다잡는 길은 올바른 붓다의 불교를 함으로써 가능할 것입니다.
거북이와 물고기의 비유...
대단히 중요한 비유이오니 여러군데 필요할 때 자주 사용하십시오....^^
실론섬 : 원불사 지도법사
원불사근본불교대학源佛寺
첫댓글 우리도 부처님처럼 살아가자, 우리도 부처님의 마음을 가지자, 자비로운 삶을 살자...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불교가 던지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오늘날 불자들이 반드시 마음속 깊이 새기며 불자다운 생활을 해야 할 지침이라 생각합니다.
21세기에는 옛날보다 더많은 인구가 에너지 경제 난리로 건강까지 기우러 진다 생각 합니다.
스트래스는 백팔번뇌의 원인도 되고 결과도 될 것 입니다.
나는 한국에 산지 33년 미국 이민온지 33년 유수같읍니다.
재가불자로서 청화스님을 통하여 금타대화상님의 법을 공부하다
머머님의 중풍을 만다라 그림으로 치료하게 되어 10년동안 연구하여
사람들에게 실천하여 보니 병원치료의 80%는 그림 한장으로 치료할수 있게 되어 12000여명을
1-3 분 내외에 이고득락 시켰지요! 약사여래님의 12대원중 7가지는 실천할수 있고 유마경의
8 대불가사의한 일을 금타대화상님께서 보내준 만다라에 의하여 일어 나게 합니다.
신통력 위신력
을 일으키는 신통한 만다라가 불법을 미국 에서 일으켜 세계평화를 성취하는 불씨를 찾았음을 강조 합니다.
평강 즉 평화와 강건함을 1-3분 내외에 10년동 일터에서안 12000여명을 경험시킴과 함께 육문상방자금광명 세계를 지금까지
1300영을 보게 하였는데 내가 일만 안하고 살수 있다면 수천만명을 그렇게 견증 하도록 할수 있읍니다.
부처님의 세계 자성청정법신과 광명 보신의 세계를 깨달을 수 있게 하는 일 대승불교의 핵심을
전하고 싶은데 종단에서 장학금을 주면 일터를 벗어나 평생 사명으로 몸과 마음을 전력 투구할수 있읍니다.
참고 하십시요!
서러 거리가 머나 인터넷 덕분에 편리를 많이 봅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