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19일, 평화의 도시라 불리는 히로시마에 ‘평화’는 없었다.
2010년부터 외국인학교를 포함한 일본의 모든 고등학생들이 무상교육을 받는 ‘고교무상화제도’에서 배제된 유일한 학교가 조선학교(우리학교)다. 5개 지역(도쿄, 오사카, 아이치, 히로시마, 규슈)에서 원고로 참여한 250명 가운데 학생수가 가장 많은 지역이 바로 히로시마다.
아침부터 찌는 듯이 무더웠던 이날 히로시마 조선초중고급학교에 모인 고급부 학생들은 40여분을 걸어 지방재판소까지 행진을 했다. 뜨거운 햇살에 하얗게 빛나는 저고리, 곱게 다림질해 각을 세운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공정한 재판 요구를 새긴 현수막을 들고 묵묵히 재판소를 향해 걸었다. 오후 4시 선고공판을 앞두고 방청을 희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대기실을 가득 채웠다. 2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 가운데 입장이 가능한 숫자는 38명. 운 좋게 당첨된 방청권을 들고 있자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같은 시각, 재판소 앞에는 행진해 온 학생들과 학부모, 지지자들이 아스팔트를 녹일 것 같은 뙤약볕 아래 서서 도쿄 문부과학성 앞에서 매주 열리는 ‘금요행동’에 참가한 학생들이 마지막 순서로 부르는 고교무상화 노래를 불렀다.
재판을 앞두고 몰려든 보도진들의 숫자에 놀랐다. 법정 안으로 들어온 신문, 방송사 기자들은 2분간 허락된 시간에 귀가 따가울 정도로 셔터를 눌러댔다. 이들의 손으로 잠시 후 선고 결과가 알려질 것이다. 4년을 이어온 싸움이 사진 몇 장과 기사 몇 줄로 전달된다는 것이 분했다. 오늘과 같은 관심을 왜 그동안에는 외면해 왔을까. 방과 후 서명운동과 전단 배포를 위해 거리로 나선 학생들과 학부모, 지원자들의 끊임없는 외침에 눈을 돌렸던 매스컴이다.
기자들이 촬영이 끝나고 재판 시작을 알리는 안내가 있을 때까지 방청석 맨 앞줄의 15명 원고 학생들은 너무나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왼쪽 변호인단에 앉은 어머니회 회장님은 고운 한복을 입고 계셨다. 대기실에서 법정에 들어서기 직전까지 고교무상화 차별반대 뱃지를 나눠주시던 박양자어머니다. 이 어머니의 옷차림이 무엇을 말하는지 재판관들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간절함과 결의로 뒤섞인 무거운 표정으로 재판장석을 응시하던 어머니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수많은 학생들과 학부모, 지지자들의 노력이 몇 분 뒤에 내려질 선고로 승리와 패배가 결정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3명의 재판관이 입장하고 재판이 시작되었다. 무심한 얼굴로 판결 주문을 읽기 시작한 재판관의 입에서 ‘청구 기각’ ‘소송 각하’ ‘재판비용 원고측 전액 부담’ 이라는 선고가 내려진 것은 재판이 시작되고 채 10분도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어머니의 탄식이 들려오고 방청석에 있던 이들 모두는 귀를 의심하며 재판장석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바깥에서 기다리는 학생들과 학부모, 지지자들의 얼굴이 떠올랐고, 심장이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완장을 찬 2명의 기자가 순식간에 법정 밖으로 튀어 나갔고, 곧바로 선고 결과가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전해졌다. 고작 15분 만에 끝난 선고 재판이었다.
원고측 청구의 기각 사유는 첫째, 조선학교가 총련과 관련이 있다는 것과 둘째, 무상화지원금을 다른 목적으로 유용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조선학교는 정치적 이유로 타학교와 구분해 행정적 차별도 적법하다며 피고(국가)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들이 말한 ‘우려’를 구체적으로 해소시켜줄 당사자들의 증인출석조차 거부한 재판부다. 무상화교육 제도의 본질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재판관들에게 되묻고 싶다.
어린 학생들과 학부모, 교원들의 지난 4년의 고통스러운 노력을 순식간에 산산조각 부숴버린 판결을 듣고 원고석에 앉은 아이들의 뒷모습을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평등한 교육권을 주장하며 무상화제도를 만든 정치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정당한 판단으로 법제도의 차별적용에 대한 부당함을 판단해야 할 사법도 정작 권리의 당사자인 ‘학생들’은 단 한마디도 판결문에서 언급하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억지로 끼워 맞춘 조잡한 논리의 판결문이다. 정치적 권력을 쥔 부끄러움을 모르는 어른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지탱하기 위해 아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판결이다. 옆자리에 앉은 어머니가 말했다. 방금 읽은 저 재판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하느냐고.
거만한 자세의 귀찮은 표정이 역력한 재판관이 순식간에 판결문을 읽은 후 퇴장하려하자 방청석에 있던 무라카미 사토시(민족교육의 미래를 생각하는 네트워크 대표)선생님이 소리쳤다. ‘아이들의 권리를 판단해라! 이 재판은 아이들의 권리를 따지는 재판이다! 당신들은 도대체 무엇을 우선으로 판결 한 것인가!’
재판관을 향한 비난의 외침들이 학생들의 어깨너머로 날아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온몸에서 힘이 쑥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밖에서 결과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얼굴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순간 앞이 캄캄했다.
곧바로 재판보고와 기자회견이 이어졌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과 학부모, 지지자들이 모두 자리에 앉을 수 없을 만큼 가득 찼다. 좌석 옆 벽 쪽으로는 오전부터 들고 있던 현수막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는 학생들이 있다. 히로시마 조선학교 김영웅 교장선생님의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로 성명문을 발표했다. ‘재판관에게는 학생들이 보이지 않는 것인가. 17번의 구두변론을 거쳤다. 재판에 필요한 증인심문과 현장방문 요청 등이 묵살 당했지만, 적어도 사법은 정의를 지킬 것으로 믿었다’며 분노했다.
변호인단은, 조선학교에 다니는 학생만을 무상화제도에서 배제시킨 ‘위법성’을 따져야 하는 재판이 오히려 민족차별을 조장하는 행정부의 꼭두각시가 되어 사법적 판단을 한 것을 강하게 규탄했다. 판결을 수용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즉각 항소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모든 아이들에게 차별 없이 적용되어야 할 교육행정이 사회적 약자를 따돌리는 도구로 전락한 재판이며, 일본 헌법에서 규정한 차별금지가 ‘조선학교에 대해서는 정부·행정기관의 재량권 범위 안에서 판단할 수 있다’는 그들 입맛대로 재단된 판결이라 설명했다. 변호인단은 또 법적으로 구제되어야 할 학생들을 공식적으로 차별하겠다고 선언한 판결에 지나지 않는다며 소수자의 인권보호 역할을 포기하고 행정의 들러리가 되어 차별선동에 앞장서는 사법부와 끝까지 싸울 것을 다짐했다.
이날을 위해 수업도 포기하고 재판소까지 걸어온 아이들이 또다시 학교까지 현수막을 들고 행진했다. 저녁 7시, 보고집회가 열리는 학교체육관을 땀과 눈물로 범벅된 학생들이 먼저 자리를 채웠다. 오사카 조고출신으로 히로시마 조선학교의 교원이 된 선생님이 발언에 나섰다.
‘아이들의 교육권을 무시하고, 학생들의 웃는 얼굴을 외면한 것이 가장 화가 난다. 학생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가슴이 무너진다.’
아무런 잘못 없는 아이들이 입은 상처와 충격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깊어질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우리학교의 좋은 점을 반드시 보여주겠다며 힘찬 다짐을 한다.
밤 9시를 넘긴 보고집회는 냉방시설이 없는 체육관의 열기를 무색하게 했다. 누구 하나 고개를 떨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치마저고리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앞으로 나와 길었던 하루를 정리하는 발언은 오히려 어른들의 혼란스러움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선배들이 지켜 온 우리학교에 대해 부당한 판결이 나왔지만 우리가 더 노력해서 승리할 때까지 계속 싸워갈 것입니다’
평범한 고교생들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가두선전과 서명운동, 법정 출두가 일상이 되어버린 조선학교 학생들.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후배들에게 물려줄 수 없는 차별의 역사를 끝내기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며 보낸 지난 4년간 너무나도 철이 들어버린 고작 10대의 고등학생들이다.
히로시마 동포들을 응원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어머니들이 있다. 교토조선초급학교 습격사건의 피해자이자 재판을 승리로 이끈 어머니다. 2009년 12월 재특회가 초급학교로 몰려와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과 폭력을 퍼붓는 영상이 인터넷을 떠돌았고, 누구나 쉽게 검색할 수 있었다. 학생들과 학부모, 학교가 힘겹게 시작한 재판으로 일본 사회에 헤이트스피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법적 제재를 가할 수 있는 틀이 만들어졌다.
어머니는 말한다. ‘재판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 혼자 있는 시간에 아이들의 상처는 소금을 뿌린 듯 되살아 날 것이다. 그것을 견디고 있을 학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며 눈물을 쏟는다.
지난겨울 광화문을 메웠던 촛불들을 보며 차별의 대상이 된 조선학교 문제를 어떻게 일본 사회에 이슈화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한다. 유엔의 인권차별에 대한 시정권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일본 정부. 남한 땅을 고향으로 여기는 학생들과 동포들에게 고향사람들인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늦은 밤 무덥고 긴 하루를 보낸 참가자들이 한 식당에 모였다. 재판이 끝나고 분노를 감추지 못해 격분했던 동포들이 어느새 차분하게 서로를 위로했다. 반세기가 넘는 차별의 역사는 동포들의 유전자를 강하게 진화시켜 놓은 것 같았다. 차별을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권리를 찾는 강렬한 의지가 대를 이어 전해졌고, 같은 아픔을 위로하는 또 다른 힘으로 발현되는 것 같았다. 이분들과 함께 보낸 고작 하루 동안 온몸이 방전되어 버린 나는 정신을 차리기조차 힘들었지만, 동포들은 하나같이 웃음을 잃지 않았다. 아니, 너무나도 의연하고 밝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것일까. 어떻게 이토록 밝을 수 있는지 답을 찾을 수 없어 교토에서 온 어머니에게 물었다.
‘웃어야지. 안 그럼 여기서 살아나갈 수 없어요. 저들의 차별에 대한 마지막 저항은 우리가 웃는 거니까.’
끝난 싸움이 아니었다. 진 싸움도 아니다. 동포들은 웃으며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보편적 인권을 존중하는 최고의 제도를 만들었다며 선심 쓰듯 내놓은 고교무상화법을 정작 보호받아 마땅한 가장 약한 아이들을 공격하는 비열한 무기로 삼은 일본 정부와 전면전을 시작한 것이다. 선고 후 2주내에 항소를 제기하고 고등법원에서 다룰 중점 사항들을 정리해 다시 투쟁에 나설 것이다.
조선학교 학생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단순하다. 자신들의 뿌리를 배울 수 있는 학교에 평등한 권리를 보장받으면 다니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왜 차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타당한 설명을 내놓지 못한 일본의 사법부는 그 대가를 치러야 마땅하다. 식민이라는 뼈아픈 역사를 만든 장본인들, 그들의 과거를 증거하며 살아갈 어린 학생들의 존재 자체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비열한 그들에게는 ‘응징’이다.
한국 정부 또한 조선학교 학생들의 외침에 대답해야 한다. 외면해 왔던 과거를 반성하고 이제는 이들의 손을 잡아줘야 한다. 너무 오랜 세월이다. 7월 28일과 9월 13일, 오사카와 도쿄에서도 선고가 이어진다. 이들을 기억 하고 함께 할 수 있는 행동을 고민하는 고향 사람들이 있다는 걸 재판에 나선 어린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