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생기의 우리학교 VOL.23 홋카이도(北海道)조선초중고급학교
(글 황리애)
- 삿포로시 도요히라구 히라오카 학교 운동장에서 겨울놀이를 하는 학생들 -
오후 야간학교에서 이어져 온 민족교육의 등불
홋카이도 조선초중급학교 창립된 해는 1961년.
그때까지는 도내 각지에 <오후야간학교>를 만들어 자주학교라는 형태로 교육이 이어져 왔다.
홋카이도에서 민족교육은 어떻게 시작되어 발전해 왔을까. 많지 않은 자료와 당시를 알고 있는 동포들의 증언을 토대로 고급부가 병설되기까지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본다.
- 1959년, 하코다테 조선인학교. 교실 한쪽에서는 어머니들이 공부하는 모습도 보임 -
해방 후 15년의 발자취
해방 후 일본 전국에서 그러했듯이 홋카이도에서도 각지에 국어강습소가 설치되었다.
1948년 6월 8일에는 삿포로 조련초등학원이 개설. 학생 30명에 몇 명의 교원만으로 자주학교로 운영되었다.
탄광이 많은 홋카이도의 동포들은 대부분이 노동요원으로 일본에 건너 온 사람들이었다. 우리말과 고향의 지리 등 자신들이 가르칠 수 있는 범위의 지식을 아이들에게 열심히 가르치며 소박한 형태의 민족교육이 시작되었다.
49년, '학교 폐쇄령'에 의해 도내 각지에 세워진 국어강습소가 당국에 접수되자 아이들은 일본학교에 갈 수밖에 없었는데, 규제가 조금씩 완화되자 다시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져 갔다.
한편 삿포로(札幌), 무로란(室蘭)、쿠시로(釧路)、오타루(小樽)、유바리(夕張)、히다카(日高)등 도내 10여 곳에서 <오후 야간학교>가 개교 되었다. 오후야간학교는 이름 그대로 일본학교가 끝난 오후와 야간에 동포들을 모아 가르치는 장소다. 지역의 지부사무소를 거점으로 하거나 선생님이 동포의 집을 방문하는 등 여러 형태가 있었다고 한다. 오후야간학교는 <하코다테(函館) 조선인학교> <치토세(千歳) 조선인초급학교> <조선인 초등학교 아카비라(赤平)분교> 같은 이름이 붙여진 곳도 있어(모두 59년) 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인과 학부형들도 배웠다.
이처럼 홋카이도에서는 50년대 말까지 초등교육만 실시되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노동요원으로 일본에 온 동포들이 대부분이었던 홋카이도에서 중등교육을 실시하려면 가르치는 사람도 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은 인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홋카이도 동포들은 제한된 조건 아래서도 민족교육의 현장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들의 말과 조선민족으로서의 자각을 어떻게든 아이들에게 전하려고 노력해 온 것이다.
조선대학교 창립은 56년. 이때 홋카이도 동포들도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대학창립을 기뻐했다고 한다. 일부이기는 하나 홋카이도에서 도쿄조선중고급학교로 진학한 동포도 있어 그들이 다시 대학에 진학함으로써 드디어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가 나오게 된다. 대학에서 배운 학생들이 졸업해 조선학교의 교원으로 각지에 부임한 것이 50년대 말 이후다. 이러한 흐름 속에 동포들의 요망도 높아졌고, 61년에는 <홋카이도 조선초중급학교>창립으로 이어진다.
- 1948년 6월 8일, 개교한 삿포로조련초등학원 -
동포들의 애교심 하나로
“우리들의 학교도 세워 정규교육을 하자고. 말하자면 하루 종일 우리의 교육을 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자는 동포들의 강한 희망이 있어서 61년 4월 10일, 드디어 홋카이도 조선초중급학교가 개교했어요. 이 무렵엔 아직 교사가 만들어지지 않았었죠. 일본 교육시설과 삿포로시의 시설을 빌려서 1학기는 그곳에서 수업을 했어요. 2학기부터 삿포로시 시로이시구(白石区) 난고(南鄕)에 새로 준공된 교사에서 배우기 시작했어요.”
홋카이도 초중의 초대교장을 역임한 故이진택(李珍澤)씨의 말이다.
같은 해 9월 1일에는 치토세(千歳)조선인초급학교가 통합되어 9월 23일에 준공식을 가졌다.
홋카이도에서는 창립 당시부터 초급부 아동을 기숙사로 받아들여 운영되었다.
61년에 중급부 3학년으로 입학했고, 홋카이도 초중고에서 약 30년간 교원을 역임한 오옥순(吳玉順 69)씨. 이전부터 자신이 살고 있던 아사히카와(旭川)의 오후야간학교에서 공부한 오씨는
“조선학교가 창립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부모님이 ‘우리말을 배워야 된다’고 하시며 학교에 보내주셨죠. 나처럼 많은 동포들이 도내에서 와 있었죠. 기숙사가 있었으니까.”
- 오옥순씨, 오씨의 졸업 앨범 -
오씨는 이듬해부터 이바라기조선초중고급학교 고급부로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자신이 다녔던 오후야간학교의 강사로 홋카이도에 돌아왔다. 왓카나이(稚内), 소라치(空知), 다키가와(滝川)에서 4년간, 도내 각지에서 아이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쳤다. 넓은 토지 면적에 조선학교가 1개밖에 없는 홋카이도에서는 홋카이도 초중학교가 창립된 후에도 한동안 오후야간학교가 남아있었다. 오씨의 말에 따르면 80년대 초기까지는 각지에서 운영되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 전국에서 공화국 귀국사업이 활발해진 것과 맞물려 홋카이도 초중의 아동·학생 숫자는 증가해 갔다. 지방에서 오는 아이들 중에는 초급부 저학년 어린 아이들도 많아서 전용으로 쓰는 <꼬마 기숙사>같은 곳이 있었다.
63년에는 교사와 기숙사를 증축해 도서실과 미술실, 이과교실도 차례로 완성되었다. 입학을 희망하는 아동·학생들이 계속 늘어나 60년대 말에는 약 450명에 이르렀다. 69년에 새교사 건설위원회가 발족되었고, 71년 10월 25일 삿포로시 도요히라구(豊平区) 히라오카(平岡)에 5,500평의 새교사와 기숙사가 설립되었다.
- 젊음과 열의로 학교운영에 힘쓴 제3대 교장을 역임한 박일침씨-
‘훌륭한 교사도 설립되었으니, 우리학교를 더욱 빛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좋을까’
73년,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교장으로 부임해 온 박일침(朴一針, 78)씨는 이런 고민 끝에 교원들의 자질향상과 중급부 축구부 육성에 힘을 쏟았다.
“스포츠와 학업에서 아이들이 활약한다면 동포들은 ‘우리학교 최고!’ 라며 자랑스러워할 것이라 생각했죠. 축구부 학생들에게는 매일 공을 다루게 하는 특별훈련이 이어졌어요. 학력 면에서는 이 무렵 조선대학교에 통신교육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교원들은 그것으로 배우게 했죠. 그랬더니 가르치는 것도 좋아졌어요. 아이들이 공부의 재미를 알게 된 거죠.”
열심히 노력한 결과 75년 재일본 조선학생 중앙체육대회에서 홋카이도 중급부 축구부가 무려우승을 차지했다. 조선학교 전국통일시험에서도 홋카이도 학생이 성적 상위에 올랐다.
같은 시기, 학부형들의 애교운동도 활발해졌다. 한 때는 하코다테(函館)에 사는 어머니들 25명 정도가 홋카이도 초중을 찾아와 학교 청소를 하고 밤에는 기숙사에서 자면서 교원들과 좌담회도 가졌다.
“하코다테에 이어서 아사히카와(旭川)와 이부리히다카(胆振日高) 지방에서도 왔죠. 어머니들이 자주 오셨었죠.”(박씨)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살던 지역을 떠나 대부분이 센다이(仙台)에 있는 도호쿠 조선초중고급학교(당시)로 진학했다. 시설과 교육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이곳에서도 고급부를 창설하자는 동포들의 염원이 강해져 82년 4월 5일 드디어 고급부가 병설되었다.
*월간 <이어> 2017년 1월호에서
첫댓글 이 글을 쓴 황리애 기자는 혹가이도 우리학교를 졸업한 친구입니다. ^^ 졸업생이 잡지의 기자가 되어 자신이 졸업한 학교의 역사를 기사로쓰는 일. 참 멋진 일입니다. ^^